<미키 17>에서 죽음은 미키(로버트 패틴슨)의 정체성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인류의 진화와 발전이라는 명목하에 자행되는 험한 일을 도맡고, 더러는 누군가를 대신해 죽는 ‘익스펜더블’이다. 업무를 자원한 건 거창한 포부 때문이 아니라 단지 가혹한 지구의 삶을 빨리 청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은 건 그의 큰 실수였다. 그의 기억이나 성격, 외형은 평범한 벽돌 모양의 특수 기기에 그대로 보존되어, 그가 죽으면 그와 똑같은 내면과 외면을 가진 사람을 반복해서 프린트하게 된다. 이름 뒤에 붙은 숫자 ‘17’은 그가 16번 죽었고, 17번째 삶을 사는 중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그는 이미 여러 번 죽은 사람이다. 사람들은 죽음이 미키의 특권이라도 되는 양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라고 묻곤 한다.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놓고 볼 때, 죽음은 미키만의 것이 아니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누군가는 반드시 죽는다.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살인의 추억>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에서는 아파트에 사는 반려견들이 죽거나 실종되며, <괴물>에는 불특정 다수의 시민이, <마더>에는 한 여고생이, <설국열차>에는 생존 인류 대부분이 죽는다. <옥자>에는 유전자 변형으로 몸을 키운 슈퍼 돼지들이 도살당하고, <기생충>에서는 한낮의 대저택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물론 영화에서 죽음을 다루는 경우는 흔하고, 자신의 영화에서 매번 누군가를 죽인 감독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봉준호의 영화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무언가를 촉발하는 대상이다. 죽음의 위협은 소동과 다른 세계로의 모험, 적어도 이동을 불러온다. 퍽 우습고 서글프다가도 때때로 섬뜩한 감정의 동선은 봉준호 영화 세계를 위한 안내도에서 굵게 강조할 부분이다.
복제를 통해 반복되는 미키의 삶은 큰 틀에서는 <사랑의 블랙홀>식의 타임 루프물과 통한다. 다만 죽음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서로 다르다. <사랑의 블랙홀>에서 필(빌 머리)은 매일의 삶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똑같은 하루를 ‘버전 업’의 기회로 삼는다. 반면 미키는 이전 미키가 가진 삶과 죽음의 경험치를 계승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미키는 여러 번 죽었지만, 각각의 미키에게 죽음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미키는 매번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가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는 모습이 충분히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 기본적인 아이러니가 있다. 미키의 존재 방식은 죽음(과 탄생)의 가치가 추락했음을 가리키는데, 미키의 반응은 그래도 죽음은 죽음임을 시사한다.
반영과 반성의 영화사
봉준호가 매번 전보다 나은 영화를 만든다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이전 작품에 대한 반영 혹은 반성으로 다음 작품을 만든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설국열차>는 <괴물>에 대한 반성이다. <괴물>에서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했던 현서(고아성)는 <설국열차>의 세계에서 요나로 귀환해 모든 것이 사라진 세계에서 끝까지 살아남는다. <괴물>에서 끝내 딸을 구하지 못했던 강두(송강호)는 남궁민수로 귀환해 자신을 버리고 딸을 지키는 꿈을 이룬다.
<미키 17>은 봉준호의 영화가 동물 혹은 괴생명체를 다룬 방식을 복기하도록 이끈다. 전작에서 보인 동물과 인간과의 관계는 후작에서 급격히 전환되거나 계승되곤 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아파트에서 실종된 개들은 평범한 인간에 의해 살해되는 약자의 위치에 있다. 반대로 <괴물>에서 한낮의 한강에 출몰한 돌연변이 생명체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돌진하는 공격적인 생물이다. 괴생명체의 공격성은 희생된 개들을 대신한 복수다. <옥자>에서 유전자 변형으로 탄생한 슈퍼 돼지는 <플란다스의 개>와 <괴물> 속 동물과 생명체의 특성을 재조합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옥자>의 돼지는 <플란다스의 개>의 개처럼 인간에게 도살당하는 인간 친화적 피해자의 위치에 있으나, 거대한 신체를 통해 <괴물>의 괴생명체만큼의 파급력을 내뿜는다. <미키 17>에서 니플하임 행성의 생명체, ‘크리퍼’의 외형은 어딘가 <괴물> 속 괴생명체를 상기시킨다. 다만 하나의 모체에 수천, 수만의 파생체로 이뤄진 점이 특징이다. 공격적인 외형과 달리 기본적으로 인간 친화적인 점에서 <옥자>를 연상시키는데, 인간과 동물의 원초적인 소통 방식에서 벗어나 번역기를 통해 인간의 언어로 소통한다는 점에서 진전된 관계를 그린다.
사라진 아이들
봉준호의 영화 세계에서 <미키 17>을 생각할 때, 떨칠 수 없는 지점은 아이들의 부재다. 특수한 행성을 배경으로 하며, 선발된 요원들만 탑승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충분한 답이 되지 않는다. 개척선의 예외적 존재라 할 정치인 부부 케네스 마셜(마크 러펄로)과 일파 마셜(토니 콜레트)의 자녀 역시 부재하며, 이들은 젊은 대원들의 성행위와 출산을 통제하려는 야욕을 내비친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아이들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아이들은 자신보다 약한 생명을 돌보거나 끝까지 생존했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실종된 반려견을 찾기 위해 제일 먼저 나선 사람은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아이였다. <괴물>에서 괴생명체에 납치된 현서는 자신보다 어린 소년을 만나 그를 보살핀다. 소년은 현서를 대신해 살아남는다. <설국열차>에서 요나는 지하에 갇혀 기차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소비되던 어린 소년과 함께 생존한다. <옥자>에서 미자는 자신의 반려 돼지를 도살당할 위험에서 구출한다. 한편 개척선 내부에서 벗어나면 어린 생명체들의 기하급수적인 발생 양상을 마주하게 된다. 니플하임 행성에 먼저 존재했던 똑같은 모양과 크기의 작고 어린 생명체들은 제한적 방식의 진화에 대응하는 자가복제형 과잉생산의 세계를 이룬다. 성행위가 사실상 금지된 인간의 규칙을 비틀어 말하자면, 생명체들은 인간의 몸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비)수정체들의 외화로도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퍼는 재생산 대신 바이오 프린트가 상용화될 세계의 앞선 결과물이자 이미 죽거나 폐기된 존재들의 귀환이다. 이들은 또한 봉준호의 영화에 부재한 아이들의 자리를 대신한다.
크리퍼들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행성을 가득 메운 광경은 영화 속에서 이름 없는 엑스트라 혹은 그래픽 이미지로 대체된 군중의 자리를 연상시킨다. 대규모 전투나 학살 장면 속 엑스트라는 의미 없이 죽거나 사라진다. 크리퍼의 존재 역시 이같은 대규모 학살을 위해 마련된 것처럼 보인다. <옥자>에서 슈퍼 돼지를 식품으로 소비했던 것과 유사하게 일파는 크리퍼의 꼬리에서 식용 소스의 잠재력을 발견해, 이들의 꼬리를 최대한 많이 잘라 올 것을 명령한다. 컴퓨터그래픽 이미지에 불과한 크리퍼의 죽음과 학살을 묘사하는 것은 인간화된 캐릭터를 처리하는 것보다 손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미키 17>에서 크리퍼의 죽음은 한정적으로 드물게 묘사된다. 케네스에 의해 죽을 위기에 놓인 크리퍼는 나샤(나오미 애키)의 도움으로 불구덩이에 빠질 위기에서 벗어난다. 손이 묶인 나샤가 입과 이를 이용해 끝까지 끈을 지탱해 크리퍼를 구하는 장면은 <옥자>에서 옥자가 굵은 노끈을 입으로 지탱해 미자(안서현)를 구하는 장면과 짝을 이룬다. 이제 구조해야 할 최우선 대상의 목록에는 아이와 동물에 더해 미지의 비인간 생명체가 추가된다.
1/n 존재의 딜레마
<괴물>에서 희봉(변희봉)은 강두가 총알의 개수를 혼동하는 바람에 죽음을 맞는다. 오류와 오판은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 반면 <미키 17>에서는 오류로 인해 삶이 증폭된다. 얼음 계곡 아래로 추락한 미키 17이 실종된 사이, 미키 18이 복제되어 그의 자리를 대체한다. 실종된 미키 17이 뒤늦게 돌아오면서 ‘멀티플’이 금지된 세계 속 두명의 미키는 생존을 놓고 서로 싸운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1인2역이나 쌍둥이 모티프가 전면화된 사례는 <옥자>에서 틸다 스윈턴의 1인2역에 의한 쌍둥이 자매 루시와 낸시를 제외하면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1인2역을 다중정체성으로 확장하면, <기생충>에서 기우/케빈(최우식), 기정/제시카(박소담) 등 가명과 조작을 통해 다른 존재를 연기한 사례에서 어렴풋하게 복수 존재의 흔적이 드러난다. 거슬러 가면 <살인의 추억>이나 <마더>에서 범인의 자리에 적합한 몽타주를 두고 벌이는 오인과 혼동의 난장은 멀티플을 예고하는 잠재태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존재하게 된 두명의 미키는 죽이려는 자와 살아남으려는 자의 도망과 추격의 소동을 벌이며, 봉준호 영화의 인장과도 같은 난장 시퀀스로 향한다. 그러나 난장의 화력보다는 사소한 협상의 말들이 절묘하게 느껴진다. 미키 17은 미키 18과의 공존을 위해 배당된 식사와 급여와 업무를 정확히 반으로 쪼개어 나누자고 협의한다. 이는 무엇이든 n분의 1로 나누는 것이 ‘공정’하다고 말하는 시대에 자신이 가진 몫까지 나눌 수 있는지에 관한 지극히 현실적인 질문을 던진다. 애초에 우리는 지출과 수입에 대한 감정을 공정하게 조정할 수 없으므로 n분의 1은 이기적인 사회의 온전한 해결책일 수 없다.
공존 불가능의 비애는 봉준호 영화의 오래된 주제였다. 공존의 대상은 동물이나 미지의 생명체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기생충>처럼 그 대상이 인간이 될 때 예상치 못한 화력을 불러왔다. 공존의 어려움과 파괴의 손쉬움은 버튼으로 환원된다. <기생충>에서 일가족의 실체를 까발릴 영상의 전송 버튼은 당사자에게는 (극 중 대사처럼) 미사일 발사 버튼에 준하는 위력을 지닌다. <미키 17>에서도 버튼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간단하고도 두려운 대상이다. 미키가 어린 시절 무심코 누른 버튼이 불러온 사고 트라우마는 17번째 삶을 사는 동안에도 끈질기게 프린트되어 사라지지 않는다. 이후 그가 마주한 버튼은 첫 번째 버튼의 변형으로 인류의 문제이자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를 함축한다. 여기에 빗대 말하자면 봉준호의 영화는 관객에게 두개의 버튼을 제공한다. 하나는 현실의 비관이고, 다른 하나는 판타지의 낙관이다. 이는 선택을 위해 마련된 보기가 아니나 비겁한 양비론도 아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다른 한쪽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고 자꾸만 되살아나리라는 것을 기억하기 위함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