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속도 빠른 깔끔함 덕분에 혹은 그 때문에, <중증외상센터>, 분명 재미있는데… 그런데 말입니다
2025-02-20
글 : 이유채

<중증외상센터>를 보면서 ‘10초 앞으로’ 버튼을 눌렀나 하는 착각을 자주 했다. 그만큼 빠르게 느껴졌다. 이 빠름이 뭔가 달랐던 건 그동안의 시리즈에서 느껴본 적 없는 속도였기 때문이다. 캐릭터 빌드업 구간이 짧고, 잘게 쪼갠 편집은 쇼츠 시대의 요즘 시리즈가 가진 공통적 특징이니 이게 이유의 전부일 리 없다. 그렇다면 이 기묘한 속도감은 의료진이 긴 병원 복도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장면이 많은 탓일까. 아니면 속전속결을 절대 추구하는 주인공의 장악력이 컸던 걸까. 빠른 체감 속도의 근원을 찾다가 불현듯 기시감이 들었다. 시간과 시간 사이를 점프한 것 같고 모든 장면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동시에 사라지는 이 스피디함은 시리즈 요약본 콘텐츠에서 느끼던 감각을 닮아 있었다.

“딱 보면 감 안 와?”

시리즈 전체를 몇 시간 분량으로 정리해주는 요약본 콘텐츠에서 중요한 건 속도와 핵심이다. 배경 공간과 등장인물의 기본 설정, 회차마다의 주요 사건 등 꼭 필요한 정보만 빠르고 명확히 전달하면 된다. 핵심 위주이기에 부수적인 건 들어갈 필요가 없다. 예컨대 자연과 일터의 풍경숏이나 소품 인서트숏, 엑스트라와 주인공이 대화하는 장면 같은 건 선택되지 않는다. 전체적인 흐름을 잡아주고 쾌속으로 재미를 만드는 요약본의 건너뛰기 문법을 <중증외상센터>는 그대로 가져간다. 백강혁 교수(주지훈)의 “딱 보면 감 안 와?”라는 대사가 이 시리즈의 스토리텔링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시청자가 내용을 이해하는 데 알아야 하는 최소한까지만 전달한다. 기본적으로 한국대학병원 중증외상팀은 매우 바쁘고 열악한 파트라는 점, 환자들은 모두 의사의 처치를 받아야 하는 위급한 상황이라는 점이다. 캐릭터는 의학 드라마의 등장인물로서만 묘사된다. 직업의식은 투철하나 막무가내인 천재 의사 백강혁, 어리바리하지만 갈수록 제 몫을 다하는 성장형 의사 양재원(추영우), 털털하고 열정적인 시니어 간호사 천장미(하영)다. 시리즈는 이들 주요 3인방이 어떤 아들과 딸이고, 누구와 연애 중인지엔 전혀 관심이 없다. 대사는 에두르는 법이 없다. 백강혁은 외상팀에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며 짝꿍인 후배 양재원 앞에선 ‘항문’(항문외과 출신인 양재원에게 백강혁이 붙여준 별명이다)을 다양하게 변주해 부르는 걸로 할 말을 대신한다.

응급실로 들어가는 베드처럼 빠르고 완벽한 봉합처럼 깔끔하다. <중증외상센터>는 쇼츠 시대에 걸맞은 강점을 내세워 설 연휴 동안 글로벌 흥행을 거뒀다. 그럼에도 이 시리즈의 스피드와 깔끔함에 지지를 표하긴 어렵다. 과도하게 덜어낸 탓에 사이사이에 공백이 생기고 말았다는 인상이다. <중증외상센터>가 군더더기라고 여긴 부수적인 부분들은 빠른 전개에 도움이 안될지언정 완성도에는 영향을 미친다. 디테일들이 쌓이고 쌓여 작품과 인물의 생동감과 부피감을 만들기 때문이다. 중증외상팀이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에 처했는지를 짚어주고 구성원들에게 성격을 고루 주었다면 현실의 불 꺼질 일 없는 병원처럼 다가왔을 것이다. 긴 밤에 동료들과 졸음을 견디기 위해 나누는 시시콜콜한 대화 신이나 스쳐 지나가는 환자와의 눈인사 신, 취향이 엿보이는 머그컵을 잡은 숏과 같은 일상적인 면을 배제하지 않았다면 주요 3인방에게서 지금도 어느 병원 복도를 달리고 있는 것만 같은 현실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환자와의 라포르 형성은 없는

<중증외상센터>가 의학 드라마로서의 매력을 깊이 살릴 수 있는 지점에서조차 여지없이 속도와 핵심을 선택한 판단에는 의문이 남는다. “꼴딱꼴딱 숨 넘어가는 사람도 메스 하나로 딱딱 살려내는” 천재 의사 캐릭터를 앞세웠음에도 수술 시퀀스는 대체로 평이하다. 백강혁의 얼굴, 수술할 부위, 배열한 도구 등을 각각 따로 잡은 화면들을 한 프레임 안에 슬라이드처럼 밀어넣어 수술 상황을 동시에 보여주고 수술이 성공했다는 결과를 빠르게 명시적으로 알려주지만 ‘신의 손’으로 불리는 백강혁의 솜씨는 제대로 펼쳐 보이지 않는다. 휴머니스트 백강혁을 그리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중증외상센터>는 백강혁의 또 다른 한축인 인간적인 면모를 그가 국경 없는 의사회 시절에 치료한 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과 짧은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 것에 그친다. 돌이켜보면 백강혁이 살린 환자는 헬기를 타고 겨우 구조한 북한산 등산객에서부터 남수단에서 한국으로 데려온 파병군 대위까지 여럿이지만 모두 수술에서 끝날 뿐 백강혁은 그 어떤 환자와도 엮이지 않는다. 이건 양재원과 천장미도 같다. 양재원은 상사인 한유림 과장(윤재호)의 딸이자 과외 학생이었던 한지영(박정윤)이 교통사고로 내원하면서 감정적으로 동요하지만 거기까지다. 천장미가 개인적으로 마음을 쓰는 환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작품의 속도가 지연되지 않도록 환자의 이야기를 벌리지 않은 걸로 짐작된다. 휴머니즘을 말하는 의학 드라마에서 의료진과 환자가 라포르를 형성하는 에피소드를 제외할 경우 서사적 공백은 불가피하다. 바로 그 에피소드에서 휴머니즘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사연을 늘어놓는 이야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필요한 건 사람을 살리는 걸 최우선으로 하는 주인공이 그 사람을 신경 쓰고 있다는 이야기다. 실력을 자랑하는 에피소드만으로 인간적인 의사를 그리는 건 역부족이다.

<중증외상센터>는 주제 의식도 핵심만 빠르게 전달한다. 이때 시리즈가 이용하는 건 미디어다. <중증외상센터>가 세상에 외치고 싶은 메시지를 하나 꼽으라면 닥터헬기의 확대 도입이다. 이 메시지는 닥터헬기가 제때 뜨지 못해 골든타임을 놓치고 그 결과 식물인간이 된 환자 에피소드에 담겼다. 그러나 에피소드를 통해서가 아닌 백강혁의 목소리를 통해 직접 전달된다. 진상조사 간담회에서 기자들 앞에 선 백강혁은 닥터헬기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할 시 “이 모든 대가는 환자가 치러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메시지는 마지막 회에 이르러 한번 더 직접 전달된다. ‘남수단의 영웅’으로 뉴스에 출연한 그는 “닥터헬기가 도입되지 못하는 건 오로지 돈 때문입니다. 생명에 인색한 시대는 끝나야 합니다. 부디 여러분께서 그 시대의 끝마침에 동참해주십시오”라고 호소한다. 건물 외벽과 공공장소에 걸린 대형 스크린을 통해 전달되는 그의 목소리는 또렷하지만 여운이 길지 않다. 듬성듬성 건너뛰어 도착한 종착지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는 다소 공허하게 들린다. 브레이크 없이 핵심만 가지고 직진하는 <중증외상센터>는 혁신적일 만큼 빠르다. 이 속도가 주는 신선한 쾌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이런 감정이 밀려왔다. 인물과 장소와 감정을 내 것같이 감각하게 했던 미세한 디테일들이 다 사라져버리고 윤곽만 남은 시리즈의 시대가 도래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 말이다. <중증외상센터>의 흥행이 앞으로의 한국 시리즈 제작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몇년 뒤에 나올 시리즈의 속도와 방향을 예의 주시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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