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 파트1, 2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작품에 대한 리뷰나 구구절절한 설명을 따로 보태진 않겠다. 지금부터 하려는 건, 주로 보이는 것 ‘그다음’ 혹은 ‘그 주변’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한번쯤은 들어봤을 ‘세카이계’에 대한 동시대적 해석본에 가깝다. <데드데드 데몬즈 디디디디 디스트럭션>(이하 <데데디디>) 시리즈는 세카이계의 계보에 뚜렷한 궤적을 남길 만할 문제작이고, 이곳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히로시다. <데데디디>의 표면적인 주인공은 물론 절대적 관계로 맺어진 두 여학생 카도데와 오란이겠으나 <데데디디>적 정서의 핵심축은 다름 아닌 히로시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1995년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기점으로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그 종결 혹은 변주를 꿈꾸는, 속칭 세카이계의 실타래에서 히로시는 우리에게 새로운 풀이의 가능성을 던진다. 미성숙한 소년·소녀의 미시적 감정 관계가 거시적 세계의 존폐로까지 뻗쳤던 세카이계. 이 성장 혹은 반성장의 서사가 그 정서의 범위를 넓힐 수 있다는 것. 달리 말해 이제는 더이상 아이가 아닌 우리, 즉 어릴 적 세카이계를 보고 자란 지금의 우리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온 모종의 책무 의식이 세카이계 속의 어른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마음을 전한다. 어른 히로시가.
멀티-세카이계의 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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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무슨 일이 일어나면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은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그때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으려면 어떡해야 할까? 누군가를 지키는 거야. 모두를 걱정할 필요 없어. 한명이면 충분하니까. 그 대신 그 누군가를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줘. 그 마음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힘이 될 거야. 그럴 때 너는 누구를 지킬래?”
앞서 세카이계의 정의가 미지수의 영역이라 말한 바가 무색할 만큼, 초등학생 오란에게 건넨 오빠 히로시의 말은 세카이계의 덩어리를 적확히 매만진다. 세계가 멸망할지라도 당장 내 옆의 한 사람을 지키겠다는 마음의 힘, 그것의 파동이 지난 30년간 우리를 울려왔다. 그런데 2010년대 무렵부터 일종의 가능 세계 서사가 이 흐름에 섞이면서 세카이계는 변곡점을 맞이했다. 이를테면 <극장판 마법소녀 마도카 마기카(신편): 반역의 이야기>(2013) 전후나 <너의 이름은.>(2016) 등이 세카이계의 전통을 어느 정도 지키는 듯하면서 주체적 구원이란 새로운 선택지의 가능성을 끌고 왔다. 이 시대의 (마법)소년·소녀는 어차피 멸망하거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무릎 꿇지 않고, 외려 그 운명의 실을 치열하게 거슬러 올라가 세계의 선을 뒤틀었다. 커다란 절망 속 한줌 희망에 그치곤 했던 세카이계의 멜랑콜리를 천연한 희망의 빛으로 채우기 시작한 것이다. ‘너를 지키겠단 마음’이 곧 세계를 구했다. <너의 이름은.>을 두고 많은 평자가 기성 세카이계의 완결이나 종말이라 말한 것 역시 이러한 정서의 역전에 기반을 둔 논지였다.
위처럼 가능 세계 혹은 평행 세계의 세계관을 포섭한 세카이계의 종류를 멀티-세카이계라고 거칠게 이름 붙여도 좋을 듯하다. 전통적인 세카이계의 상징이었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아키가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2021)을 만들어 이카리 신지와 아이들을 (전작에 비해 명확히) 구원한 사실 역시 마찬가지 맥락이다. 구에반게리온과 다른 일종의 평행 세계를 작품 바깥의 차원에서 메타적으로 조립한 것이다. 근래 아즈마 히로키가 <정정하는 힘>에서 주장한 대로 이것은 이미 진창에 빠질 대로 빠져버린 세계를 ‘리부트’하고 싶다는 커다란 대중적 욕망의 발현일 수도 있고, ‘세기말 감성’으로 치부되던 지구의 위기가 현실의 전제가 되어버린 바에 대한 기성 창작자들의 죄책감이나 책임감일 수도 있겠다.
<데데디디>도 명확히 멀티-세카이계에 속한다. <데데디디> 파트2에서 밝혀진 것처럼 사실 우리가 보던 <데데디디>의 세계는 오란이 카도데를 구하기 위해 만든 새로운 세계였다. 원래 세계의 카도데는 침략자의 도구를 잘못 사용했단 자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에 오란은 침략자의 ‘시프트’ 기술을 사용해 자신의 정신을 카도데가 죽기 전으로 전송하여 시간의 분기점을 만들었고, 새 세계에서 오란과 카도데는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귀엽기 그지없는 공기계(일상계) 차원의 이야기를 꾸려나간다. <데데디디>의 암울하고 비일상적인 전지구적 재난 서사조차 매번 “후냐냐후와~”거리며 게임만 하고 현실에 등을 돌린 오란과 카도데의 전략적인 모에함을 이기지 못하고 후경으로 밀려나버린다.
괜찮아, 일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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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요약하자면 오란은 이미 망가진 하나의 A 세계를 버리고 또 다른 가능성의 B 세계를 택했다. 오로지 카도데만을 위해서.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오란을 포함한 ‘시프터’들은 자신이 남기고 갈 세계에 대한 죄책감과 미련을 어떻게 이겨내고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한 세계를 떠날 그 추진력을 어디서 어떻게 채울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뭉뚱그림으로 <데데디디>는 시프터가 점차 시간 이동에 대한 기억을 잃고 정신적으로 다소간의 피격을 입을 수 있다는 설정을 부가했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 A 세계는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멀티버스 서사가 고민하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이전 세계에 남은 이들은 그들만의 삶을 살아 나가고 그곳에서의 싸움을 이어가야 한다. 어린 오란 역시 이러한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고 고심하지 않았을 리 없다. 바로 이때, A라는 세계 하나를 아틀라스처럼 짊어지는 이가 있었으며, 바로 히로시다.
A 세계에서 B 세계로 시프트하기 직전의 오란에게 히로시가 말한다. “오란, 괜찮아. 네가 어떤 사람이든 난 네 편이야. 운명을 바꿔. 카도데를 지키기 위해서 너 자신도 바뀌는 거야. 넌 네가 믿는 길을 가. 누가 뭐라고 하든 네 인생은 네 거야.” 새로운 세계, 세계의 전환, 즉 세카이계의 무거운 운명론을 어깨에 지는 것은 곧 A 세계의 기억을 잃을 오란이 아니라 동생을 북돋아 떠나보내야 한 히로시의 몫이었던 셈이다. 그간의 세카이계에서도 소년·소녀의 뒤를 지켜주던 어른들이 없진 않았다. 대표적으로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카지 료지나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에 등장한 카지 료지 포지션의 에노모토가 있었을 것이다. 카지 료지와 에노모토는 세계 멸망의 무게를 짊어진 소년이 결전에 이르기 전에 함께 작은 밭을 경작하거나 옥상에서 라면 한 그릇을 먹으며 “어떻게 해도 괜찮아”라는 식의 멋들어진 조언을 건네곤 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유약한 마지막 방책일 뿐 기실 공허하게 흩어질 수밖에 없는 유언에 가까웠다.
멀티-세카이계의 어른은 달라야 한다. 이들에겐 소년·소녀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사하기 위해 지난 세계를 짊어져야 할 책임이 있다. B 세계의 부피가 커지는 만큼 A 세계의 상실 역시 클 수밖에 없기에, 그 상실의 구멍을 오롯이 감싸안고 혼자서 채워나가는 사람 혹은 어른이 필요하다. 기어코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을 만들면서까지 구세카이계의 문을 닫고 멀티-세카이계의 꿈을 펼치고자 했던 안노 히데아키의 마음도 이제야 조금은 이해될 듯하다. 어느 정도의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진정한 어른이란 좋은 세계를 만끽해야 할 소년·소녀의 버팀목이자 일종의 망각 장치가 되어야 하나 보다. 혹은 지금의 너희에겐 (아직) 살 만한 세계가 있다는, 얼른 일어나라는 자명종의 역할로 이름 붙일 수도 있겠다. <데데디디> 파트2의 시작, A 세계에서의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긴 악몽을 꾼 듯한 오란의 얼굴 위로 히로시의 커다란 형체가 다가오며 말한다. “오란, 일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