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BIFAN #2호 [인터뷰] 알렉스 가랜드 감독 “대화는 생략하고 비주얼로 내러티브를 쓰고 싶었다”
2022-07-08
글 : 이유채
개막작 <멘> 알렉스 가랜드 감독 인터뷰

남편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도시 여성 하퍼(제시 버클리)는 안정을 위해 한적한 시골로 떠난다. 그림 같은 집과 평화로운 자연 풍경에 마음을 놓은 것도 잠시, 누군가가 따라다닌다는 듯한 불안감이 그녀가 도시에 두고 왔던 불행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미드소마>의 쾌청함과 <티탄>의 끈적함이 깃든 <멘>은 여성을 향한 가부장 권력의 계속된 공격을 독창적인 비주얼로 옮겨낸다. 세공된 미장센이 돋보이는 SF 스릴러를 만들어왔던 알렉스 가랜드 감독을 화상으로 만나 <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작 <멘>은 7월 13일 국내에서 개봉한다.

- 그린맨이라는 유럽의 유명 상징물에서 영감을 받아 <멘>을 구상했다. 그린맨의 어떤 점에 매혹돼 시나리오까지 쓰게 됐나.

= 사실 그린맨은 유럽에서 그렇게 유명하지 않다.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어디에서 온 건지 알려진 것도 없다. 그런데도 그린맨 문양은 빌딩, 교회, 어디에서나 볼 수 있고 사람들은 그걸 목걸이에도 새긴다. 거기서 우리 주변에 만연하지만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 <멘>의 초고를 쓴 게 15년 전이다.

= 그동안 계속 시나리오를 개발했다. 사실 이전에 두 번 정도 영화로 만들 기회가 있었는데 잘 안됐다. 좀 묵혔다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기면 고치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다.

- <멘>의 주요 장소로 시골 주택을 선택했다. 전작들에서 보여준 공간, <엑스 마키나>의 첨단 맨션이나 <데브스>의 IT 기업 사옥에 비하면 소박하다.

= 현대 도시인들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나 중세 시대의 교회, 한국이라면 절 같은 옛날 공간에 신화적인 환상을 품는 것 같다. 이번 영화에는 그런 공간에 대한 환상성이 필요했기 때문에 컨트리 하우스로 정했다.

- 성스러우면서도 마치 진공관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웅웅대는 사운드가 영화에 긴장감을 더한다. 음향감독과는 사운드에 관해서 어떤 의견을 주고받았나.

= 우선 뭘 해달라고 요구한 건 없다. 딴 얘기지만, 내 연출 스타일이 원래 그렇다. 나는 웨스 앤더슨 같은 작가주의 감독처럼 모든 걸 계획적으로 짜는 감독이 아니다. (웃음) 중요한 건 대화다. 동료들에게 앞으로 내가 이런 영화를 만들 건데 당신은 뭘 할 수 있겠냐, 하고 물으면 그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시작하고 거기서 아이디어가 나온다.

- 오프닝 시퀀스에서 남자가 추락할 때 흘러나오는 노래는 레슬리 던컨이 부르는 <Love song>이라는 감미로운 발라드다. 시작부터 기이한 영화가 될 거란 생각을 하게 만든다.

= 이 시퀀스에서 내가 가장 노력한 것은 대화를 최대한 빼려고 했던 거다. 실은 영화 전체적으로도 그러려고 했다. 많은 대사 없이 속도나 톤, 앵글, 분위기를 조금씩 바꾸는 것만으로 내러티브를 만들 수 있다. 아무래도 내가 소설(그의 소설 <비치>를 대니 보일 감독이 영화화했다)을 쓰다가 영화로 건너와서인지 특별한 비주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 하퍼는 정원에서 나체의 남성을 목격했을 때 놀라서 도망가지 않고 이성적으로 경찰에 신고한다. 남자들의 계속되는 침입에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가 의연한 성격의 여성이란 게 드러난다.

= 처음부터 하퍼는 침착한 본성을 가진 캐릭터로 설정했다. 그랬던 그녀가 점차 감정이 격해지는 서사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 하퍼가 잘 놀라고 편집증적인 성격이었다면 후반에 그녀가 하는 결정적인 행동을 관객이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 배우 로리 키니어는 혼자서 9명 이상의 역할을 소화하는 고난도의 연기를 선보였다. 배우에게 특별히 준 디렉션이 있나.

= 맡은 인물 한 명 한 명에 대해 간단한 전기를 써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이 인물이 실제라면 어떤 사람일지, 내 주변 사람하고 어떻게 같고 다른지.

- 제시 버클리는 뛰어난 가수이기도 하다. 철로 터널에서 하퍼가 발성 연습하듯 소리를 내며 메아리 놀이하는 장면이 그녀의 청아한 음색 때문에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 장면에 제시 버클리의 아이디어가 들어가기도 했나.

= 나도 아름답게 나왔다고 생각한다. 이 장면은 제시의 즉흥으로 만들어진 것과 다름없다. 현장에서 나는 그저 그녀에게 처음에 한 음 한 음 찍듯이 소리를 내고 그다음부터는 화음을 넣어서 불러보라는 식으로 말했을 뿐인데 그녀가 바로 무언가를 만들어 냈다.

- <멘>의 제시 버클리뿐만 아니라 <엑스 마키나>의 알리시아 비칸데르, <서던 리치: 불멸의 땅>의 내털리 포트먼, 차기작인 <시빌 워>의 커스틴 던스트까지 여성 주연의 영화를 만들어오고 있다. 의도적인 선택인가 우연의 일치인가.

= 둘 다다. 어릴 때부터 본 수많은 영화의 주인공 중 90% 이상이 남성이었다. 여성이 이끄는 영화라고 해도 그들은 3신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게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좀 달라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 <엑스 마키나> <멘>에 이어 차기작 역시 A24에서 제작한다. A24와의 신뢰 관계는 어디서 오나.

= 대형 제작사 경우 아무래도 돈이 많이 드는 영화를 찍다 보니 보수적으로 움직인다. 그 점 때문에 아이디어 하나도 돌려 말하게 된다. 그런데 A24에는 내가 진짜 영화로 만들고 싶은 이야기를 분명히 얘기할 수 있다. 그들은 주류에서 벗어난 이야기를 원하는 관객도 있다면서 내 말에 주목해주기 때문이다.

- 과학에 관심이 많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오히려 홈드라마나 시대극 연출에 대한 호기심은 없는지 궁금한데.

= 있다. (웃음) 그런데 시대극을 만든다고 하면 대화를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고민된다. 시대극의 인물들은 옛날 말투를 쓰잖나. 나는 그게 가짜처럼 느껴져 어렵다. 그래도 기회가 온다면 최대한 리얼한 시대극을 해보고 싶다.

- 팬데믹 시대의 영국 영화계 사정은 어떤가. 최근 극장에서 재밌게 본 영화가 있다면.

= 언젠가 영화가 없어질 거란 얘기를 들어도 그동안은 별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코로나19와 스트리밍 서비스 급성장이 함께 온 최근 2년 동안은 정말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젊은 관객은 극장으로 많이 돌아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극장에서 본 건 아니지만 최근 조엘 코엔의 <맥베스의 비극>을 재밌게 봤다. 재밌어서 연속으로 2번 봤다.

사진제공 R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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