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BIFAN #3호 [인터뷰] '곡비' 롭 자바즈 감독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싶었다”
2022-07-09
글 : 이유채
사진 : 최성열
<곡비> 롭 자바즈 감독

만약 코로나19 증상이 발열과 기침이 아니라 살인 욕구라면 어떨까. 좀비 영화 <곡비>는 감염병으로 사람들이 극도의 폭력성을 띠게 된 대만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에서 난리 통에 헤어진 남녀커플이 다시 만난다는 이야기는 최소한의 뼈대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전에 없던 잔인하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살인 장면을 구성해 보여주는 것이다. 좀비 떼의 스펙터클도, B급 유머도 없이 건조하게 살육을 이어 나가는 영화가 누군가에게는 1분도 못 견딜 영화겠지만 고어영화 팬들에겐 한여름의 반가운 선물이 되겠다.

첫 장편 영화 <곡비>를 들고 부천을 찾은 롭 자바즈 감독을 화상으로 만났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인터뷰가 진행된 탓에 감독은 방들을 오가며 짐 정리와 인터뷰를 동시에 해내야만 했다. 분주한 와중에도 그는 첫 연출작에 대한 애정과 확신을 또박또박 전했다.

- 코로나19를 반영한 영화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구상했나.

= 우선 내 아이디어는 아니다. 코로나19 초기에 제작사로부터 팬데믹 상황에서 좀비들이 마구 날뛰는 재난 영화를 연출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대신 예산은 별로 없다고 했다. 승낙한 뒤 준비하다 보니 돈을 많이 안 쓴, 그저 그런 좀비 영화를 내놓고 싶진 않은 거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한정된 예산 내에서 관객이 열광하고 오래 기억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기존 좀비 영화보다 훨씬 더 유혈이 낭자하고 잔인함을 부각하는 게 해결법이 될 수 있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코로나19 초기 방역에 성공한 대만에서 감염병으로 서로를 헤치는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대만의 코로나19 상황을 반영할 수 없었다. 감염 사례가 거의 제로에 가까웠으니까. 대신 나라에 떠도는 갖가지 코로나19 음모론에서 아이디어를 얻긴 헸다.

-왜 제목이 곡비(<The Saddenss>)인가. 좀비로 변한 사람들이 느끼는 주 감정이 슬픔보다는 분노에 가깝다고 느껴서 궁금했다.

=좀비가 된 뒤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증상이 눈물이 나는 것이다. 눈물이 보통 슬픔을 의미하니까 제목으로 괜찮겠다 싶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영화가 다 끝나고 곡비(<The Saddness>)란 타이틀이 떴을 때 이미지적으로 쿨하고 멜랑콜리한 느낌이 드는 게 마음에 들어 결정했다.

-식당, 지하철, 병원 등 좁은 공간을 활용한 장면들이 눈에 띄었다. 실내 공간을 주 무대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예산 때문이다. 예산이 넉넉했다면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이 밖을 뛰어다니는 야외 신을 더 찍을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크게 아쉽진 않다. 다수가 다수를 공격하는 장면은 시나리오 작업 단계에서부터 임팩트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제각기 다른 행동을 한다면 어수선하기만 할 것 같았다. 그보다는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엄청나게 잔혹한 행위를 하는 장면이 관객에게 더 강력한 감정을 느끼게 할 것 같았다.

-VFX(시각특수효과)가 많이 쓰지 않은 것도 예산 때문이었나.

=그렇지 않다. 그건 의도적이었다. 예산을 줄일 생각이었다면 오히려 VFX를 더 썼을 거다. 몇십 명의 배우들을 데리고 시간을 들여 촬영하는 게 돈을 더 잡아먹는다. 내 생각에 세트를 짓고, 피 분장을 해서 촬영한 장면을 관객들이 더 고통스럽게 느낄 것 같았다. 물리적으로 리얼하니까. 특히 VFX를 많이 쓴 영화에 익숙해진 밀레니얼 관객에게 진짜 끈적끈적한 피의 촉감, 진짜 건물이 무너지는 파괴감 같은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관객이 고어 장면이 가짜라고 느끼지 않도록 미술팀, 특수분장팀과 많은 의논을 거쳤을 것 같다.

=처음에는 스태프들에게 창작의 자유를 주면 각자 알아서 끔찍한 효과들을 만들어올 거라 생각해서 특별히 어떤 말을 하지 않았다. 첫 장편영화라 디렉션을 어떻게 줘야 하는지 모르기도 했고. 그런데 다들 나만큼 잔인한 상상은 안 하는 건지, 그들이 가져온 아이디어가 굉장히 보수적이었다. (웃음) 그래서 내가 제대로 나서야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그때부터 내장 하나하나까지 그림을 그려가면서 스태프들에게 나는 이만큼 잔인하고 역겹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원하는 결과물을 빠르게 얻을 수 있었다. 회의 지옥에 빠지긴 했지만.

-불쾌할 만큼 적나라한 성적 묘사, 장기가 쏟아지는 하드코어한 묘사가 상당한데 연출자로서 어디까지 가도 될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나.

=전혀. 극한까지 가보자는 욕심이 있었다. 영화 내에 끓어 넘치는 에너지를 최대한 전달하는 것이 목표였다. 사람들이 머리로 생각하고, 장면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어렸을 때 보았던, 아주 강렬한 자극으로 내 가슴을 쿵쾅쿵쾅 뛰게 했던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 가장 화제가 될 배우는 아무래도 비즈니스맨을 연기한 쯔 치앙 왕일 것 같다. 우산과 도끼로 무시무시한 공포 액션을 선보이는데, 그와의 작업은 어땠나.

= 특이하게도 첩보 기관에서 일하다 40대에 연기를 시작한 배우다. 현장에서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앞장섰고, 젊은 배우들이 많았는데 현장을 잘 이끌어 줘서 고마운 마음이다. 항상 대본을 꼼꼼히 읽어 오고 매번 열정적으로 임했다. 꼭 다시 함께 작업하고 싶다.

-당신은 캐나다인이다. 어떻게 대만에서 활동하게 됐나.

= 2008년에 캐나다에서 대만으로 건너와 원래 하던 일인 애니메이션 작업을 했다. 애니메이션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영화에도 관심이 생겼는데, 정말 운 좋게 연출 기회가 왔다. 원래 리더 역할을 하는 성격이 아니라 망설였지만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행운일 수 있고, 주변에서 한번 해보라며 부추기기도 해서 도전했다. 여기저기서 상도 받고 영화제도 초대받았으니 잘했다 싶다. 결과적으로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영화의 스탭도, 라인 프로듀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대만인이다.

- 차기작은 이전에 만들었던 SF 단편 영화 <Clearwater>를 장편으로 만드는 것이 될 거라고.

=6개월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 (웃음) 그런데 <곡비>가 잘 되면서 같이 작품을 해보자는 제안들을 받고 있어 지금은 잘 모르겠다. <곡비>에서 잔인성을 좀 덜어낸 크리처물에 대한 아이디어도 최근에 떠올랐다. 그래도 지금까지 가장 확률이 높은 건 <Clearwater> 프로젝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