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BIFAN #7호 [인터뷰] 배우 정려원 “결핍이 있는 사람은 다른 이의 결핍을 알아볼 수 있다”
2022-07-13
글 : 임수연
사진 : 백종헌
<하얀 차를 탄 여자> 배우 정려원

5년 전 방송국 연기대상에서 최우수 연기상을 받은 정려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전했던 수상소감을 잊지 못한다. “<마녀의 법정>을 통해 성범죄, 성폭력에 대한 법이 강화돼 가해자들이 처벌을 제대로 받고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더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여성·아동 대상 범죄를 다각도로 다룬 대중 드라마가 사회에 미칠 수 있는 힘에 기대를 걸며 약자들의 연대를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부천영화제) 코리안 판타스틱: 장편 부문에 초청된 <하얀 차를 탄 여자> 역시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정려원의 최근 행보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칼에 찔려 의식을 잃은 언니를 데리고 설원병원에 도착한 도경(정려원)의 혼이 나간 얼굴은 매사에 무감한 경찰 현주(이정은)에게 미묘한 연민을 느끼게 한다. 평소답지 않게 수사에 열을 올리며 자매에게 생긴 일을 추적하던 현주는 병원에 누워있는 여자가 도경의 친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 받는다. 장르적으로는 한밤중 벌어진 살인미수 사건의 전말을 놓고 사건에 연루된 여성들의 감춰진 진실을 하나씩 드러내며 미스터리를 견인하는 스릴러물이지만, 여러 여성이 서로를 이해해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묘사하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 <하얀 차를 탄 여자>는 드라마 <검사내전>의 공동작가 서자연 작가가 대본을 썼고, 드라마 <눈이 부시게> 조연출과 <검사내전> 공동연출을 맡았던 고혜진 PD가 연출했다.

= <검사내전> 때 고혜진 PD와 마음이 잘 맞아서 친해졌다. 1990년생이라 나랑 나이 차는 좀 났지만 소통이 매우 잘 됐다. 통나무집, 한겨울, 하얗게 쌓인 눈의 이미지가 담긴 작품으로 입봉을 준비하고 있다며 이야기를 들려준 적도 있다. 나중에 대본이 완성된 후 정식으로 출연 제안을 받았다. 익숙지 않은 설정이었지만 당시엔 JTBC 단막극으로 예정돼 있던 터라 부담이 크지 않았고, 무엇보다 대본이 무척 재미있었다. 여자들만 나오는 이야기라는 점도 흥미로웠다. 단지 그 이유로 작품을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여성 배우들이 이끄는 현장은 어떨지 경험해보고 싶었다.

- 최근 필모그래피에서 대체로 출세 지향적이거나(<마녀의 법정>) 똑 부러지는(<검사내전>) 검사와 같은 전문직 연기를 주로 했다. 반면 <하얀 차를 탄 여자>의 도경은 세상 밖에 나오지 않고 정신질환을 앓는 것으로 추정되는 작가다.

= 전작과 굉장히 다른 톤의 작품이었지만 바로 그 이유로 도전해보고 싶었다. 요즘 다양한 OTT 시리즈가 제작되면서 여성 배우가 맡을 수 있는 롤이 다양해지긴 했지만 나이가 더 들면 <하얀 차를 탄 여자> 같은 작품을 만나지 못할 수 있다는 조바심이 생겼다. 원래 범죄 현장이 묘사되는 스릴러 장르를 좋아하기도 하고.

- 올해 부천영화제는 숏폼 콘텐츠의 극장판, OTT 오리지널 시리즈 등을 초청하며 영화를 다시 정의하겠다는 영화제의 방향성을 보여줬다. 원래 JTBC 2부작 단막극이었던 <하얀 차를 탄 여자>가 경쟁부문에서 상영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 있지 않을까. 그간 극장영화와 TV 드라마를 모두 오가며 작품을 찍어온 배우 입장에서는 둘의 차이가 느껴지던가.

= 예전에는 경계가 굉장히 뚜렷했던 것 같은데 다양한 채널이 생기면서 점점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다. 결국 스토리를 긴 시간을 들여 설득할 것이냐 혹은 짧은 시간 내에 설득할 것이냐에 따라 형식이 결정되는 게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호흡이 다를 뿐 영화와 드라마를 다른 톤으로 연기하지는 않는다. 그건 스탭들이나 감독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 극중 도경은 거의 단벌 신세다. 그만큼 어떤 스타일링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하다. 자칫 정려원 하면 떠오르는 패셔니스트의 보헤미안 스타일과 비슷해지지 않도록 유의한 점이 있다면. 또한 첫 등장부터 도경의 피폐한 정신 상태를 보여주는 분장을 세게 하는데 정려원의 새로운 얼굴을 본 것 같아 흥미로웠다.

= 도경은 집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본능적으로 옷을 껴입었을 것이다. 고혜진 감독님이 레이어드를 많이 한 의상이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줬는데 막상 옷을 준비해보니 <통증> 때랑 너무 비슷해 보였다. 낡은 집업 추리닝에 바람막이를 입어볼까 했지만 너무 색의 경계가 없어 보일 것 같아 치마와 얇은 가디건으로 자연스러운 컬러감을 줬다. 예전에는 메이크업을 하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면 이번 작품은 손이나 얼굴에 때가 잔뜩 묻어 있는 것처럼 분장하느라 시간을 많이 썼다. 이런 변화가 무척 재밌었다.

- 극이 전개될수록 누구의 말도 온전히 믿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진다. 의도적으로 관객이 진실을 헷갈리게끔 계산하며 연기했나.

= 오히려 계산을 배제했다. 왜냐하면 내가 연기를 한다는 것은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다. 우리도 일상에서 눈치를 다 챘는데 못 챈 척할 때가 있지 않나. 굳이 의식적으로 연기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다. 도경은 은연중에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법을 터득해서 코너에 몰려도 본능적으로 행동하고 반응했을 것이고, 나는 그렇게 연기하면 됐다.

- <하얀 차를 탄 여자>는 드물게 4명의 여성 배우들이 극을 이끄는 작품이다.

= 14회차 만에 촬영을 마쳤다. 촬영을 2월에 했는데 해가 빨리 떨어져서 언제나 시간에 쫓기며 숨 가쁘게 찍었다. 좀더 오래 찍었으면 소통도 훨씬 많이 하고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다들 아쉬워했다. 하지만 서로 나누지 못한 간절한 말들이 연기로 나오는 순간이 있었다. 덕분에 서로 모니터링도 해주고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현주 역의 이정은 선배님이 연기할 땐 그냥 옆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사를 치는지…. 너무 신기했다. 선배님이 고요한 바다처럼 이야기의 중심을 잡아주면 나는 갈매기처럼 날아다닐 수 있었다. 보통 대척점에 있는 캐릭터들은 실제 연기할 때 서로 힘들다. 실제 관계가 그렇다는 의미가 아니라 촬영할 때 텐션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미경 역의 장진희 씨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캐릭터로 맞서 연기했는데도 내가 에너지를 똑같이 받을 수 있다는 걸 알려줬다. 눈빛이 너무 좋아서 내가 연기를 할 때 뭔가를 만들어낼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은서 역의 (김)정민 씨는 정말 고민을 많이 하는 배우였다. 대본에 빼곡하게 감독님에게 물어볼 것을 적어둔 모습을 보고 역시 이 작품은 나만 잘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웃음) 또 연극을 오래 해서 발성이 굉장히 단단하고 무표정만으로도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내공이 있었다.

- 촬영 일정이 촉박한데도 결과물의 완성도가 높다. 한국 드라마 스탭들이 정말 일을 잘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 <나의 해방일지>를 포함해 JTBC 김석윤 감독님과 쭉 같이 일했던 스탭들이 <하얀 차를 탄 여자>에도 참여했다. 카메라 네 대를 놓고 촬영하는데 그 세팅을 굉장히 빨리 끝냈다. 촬영이 끝나면 화면 네 개를 띄워놓고 찍은 분량을 확인한다. 사실 정적인 캐릭터였다면 이런 환경이 잘 맞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혼란스러운 도경의 상황을 연기할 땐 현란한 카메라 워킹이 오히려 심정적으로 도움이 됐다. 고혜진 감독은 콘티를 다 만들어놓고 촬영에 들어가는 스타일이다. 자신이 원하는 그림은 다 찍기 때문에 컷이 비지 않는다. 덕분에 14회차 만에 2시간 분량을 완성했는데도 화면이 밀도 있게 꽉 차 있다. 단편영화나 독립영화 작업을 하고 나면 관계가 끈끈해진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어떤 의미인지 이번에 이해했다. <하얀 차를 탄 여자>는 제작비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다들 자기를 내어준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작품에 임하는 사람들의 열정이 내내 느껴져서 무척 감동적이었다.

-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대변인이 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가르쳤다고. <하얀 차를 탄 여자> 역시 소외된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이야기다. 점점 더 이런 작품에 끌리나.

= 극중 캐릭터들처럼 행동하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지만, 관객은 이들이 오죽하면 그랬을까 이해할 수 있다. 결핍이 곧 결핍을 끌어온다. 조금이라도 결핍이 있는 이들은 다른 사람의 결핍을 알아볼 수 있다. 현주가 도경의 상처를 알아봤기 때문에 사건에 더 빠져드는 것처럼 말이다. 구태여 모든 내막을 묻지 않고도 상대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다.

- 올해 부천영화제 배우특별전의 주인공은 설경구다. 언젠가 정려원 특별전이 열린다면 어떤 작품을 프로그램에 넣고 싶나. 드라마를 포함해도 좋겠다.

= 먼저 <통증>. 촬영하면서 너무 좋았다. <김씨 표류기>도 굉장히 사랑하는 작품이다. 드라마 <샐러리맨 초한지>와 <마녀의 법정>도 꼽고 싶다. <하얀 차를 탄 여자>도 들어갈 것 같다. 찍으면서 정말 힘들었던 작품들이다. 속상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던 작품이 흥행을 떠나서 내게 중요한 거름이 됐다.

- 생각보다 과작한 배우더라.

=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것이 빠를까, 아니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들이 좋아해 주는 게 빠를까 하는 고민을 계속 했다. 현실과 타협했던 작품도 기억에 남고 애착을 갖고 있지만, 결국은 너무 찍고 싶다는 마음이 발동해야 작품을 선택하게 된다. 그런데 최근 플랫폼이 다양해지면서 재미있는 대본이 전보다 빨리 눈에 띄기 시작했다. 예전엔 차기작, 차차기작, 차차차기작을 결정하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젠 그 마음이 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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