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문근영은 바치 창작집단의 유튜브 채널을 열고 세 편의 영상을 작업했다. 7월경 촬영한 <심연>은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진 인간의 내면을 시각화한 단편으로, 100% 수중촬영 장면으로 이루어졌다. 연출을 맡은 문근영이 직접 유일한 등장인물인 ‘여자’를 대사 없이 연기한다. <현재진행형>은 무대를 떠나려 하지만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는 배우의 운명을 핀 조명과 무대 세트만을 이용해 감각적으로 표현했고, 무용수 이다겸과 협업한 <꿈에 와줘>는 떠나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움직임에 실어 담는다. 2017년 급성구획증후군 판정을 받고 긴 휴식기를 가졌던 문근영은 건강한 모습으로 복귀한 뒤에도 몇 편의 예능 프로그램과 2019년 드라마 <유령을 잡아라>를 제외하면 대중과 거의 만난 적이 없다. 가장 최근 활동은 지난해 KBS 단막극 <드라마 스페셜 2021 - 기억의 해각>에 출연한 것이다. 하지만 바치 창작집단의 세 연작물 ‘나의 이야기 X YOLK’를 연이어 감상하면, 그가 내재된 불안을 진솔히 드러내고 건강하게 회복해 간 과정을 감응할 수 있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이미지가 많은 것을 담아낸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첫 연출작을 상영한 후 관객과의 대화(GV)에 참석하기 직전, 문근영의 갈망과 치유와 재발돋움의 과정을 전해 들었다.
- 이번 작품을 통해 문근영의 ‘바치 창작집단’을 처음 알게 된 관객이 많지 않을까. 아직 드러난 정보가 많지는 않은데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 예전부터 얘기가 오가긴 했지만 제대로 만들어진 것은 <심연>을 제작하면서부터다. 정평 배우와 안승균 배우, 홍일섭 촬영감독 그리고 연출부 겸 배우 홍사빈이 주 멤버다. 가수는 자기 이야기를 담아 곡을 쓰고 댄서도 안무 창작을 할 수 있는 데 반해 배우는 창작활동을 하기 어렵다. 누군가가 써준 대본이 있어야 하고, 누군가가 연기를 찍어줘야 하고, 누군가에 의해 편집이 되어야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 있다 보니 해소되지 않는 예술적 열망이 있었다. 그리고 배우들끼리 얘기하다 보면 각자 풀리지 않는 갈증을 하나씩 갖고 있더라. 그래서 생각이 비슷하고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있는 배우들과 함께 우리를 표현할 수 있는 작업을 하자며 시작하게 됐다.
- 바치 창작집단의 다른 배우들과는 어떻게 처음 인연이 닿았나.
= 우선 안승균 배우는 <유령을 잡아라>라는 드라마를 하면서 ‘찐친’이 됐다. 원래 작품이 끝나면 배우들과 자주 보는 스타일이 아닌데 승균이와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또 승균이의 ‘찐친’이 정평 오빠다. “셋이서 한번 보자”고 승균이가 제안해서 만나게 됐는데, 서로 연기 얘기를 할 때 너무 잘 통하는 거다. 언젠가 우리가 뭐라도 함께 하기는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 제작사 크레딧에는 콘텐츠지음도 같이 있던데.= 콘텐츠지음의 한석원 대표님이 <심연>이라는 작품을 수면 위로 올라오게끔 도와줬고, 홍일섭 촬영감독님도 소개해주셨다. 사실 <심연>을 만들고 싶었지만 몇 번 거절을 당해 주저하고 있던 차에, 한석원 대표님이 호기심을 갖고 응원해주시고 많은 부분 도움을 줬다. 사실상 기획을 같이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 바치 창작집단의 작업물을 전부 유튜브에 올린 이유가 있나. 영화제에서 먼저 상영한 후 VOD 서비스 혹은 OTT를 통해 유통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 사실 영화제 상영은 생각도 못 했다. 바치 창작집단의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보여주는 공간을 만들려다 보니 적당히 가벼우면서 적당히 무거울 수 있는 유튜브 채널을 떠올렸다. 갑자기 내가 감독 데뷔를 한다고 하면 “문근영, 감독 데뷔하나?” 같은 기사가 나올 것 같기도 하고….
- 이미 그런 기사들이 나오긴 했다. (웃음)
= 그렇지, 이미 나가버렸지만…. (웃음) 그렇게 거창하게 보여주기보다는 그냥 우리끼리 소소하게 하는 작업으로 생각해서 “이제 ‘빼박’이야. 무조건 고(go)야~” 하는 마음으로 유튜브 계정부터 만들고 봤다.
- 바치 창작집단의 첫 작품 <심연>의 글, 연출, 주연을 맡았다. ‘문근영의 이야기’라는 부제, “너무 너무 벗어나고 싶었어”라는 한줄 시놉시스가 이야기의 출발점을 궁금하게 만든다.
= 음악을 듣다가도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보다가도 어떤 냄새를 맡다가도 떠오르는 생각을 메모해둔다. <심연>은 개인적으로 너무 힘들었을 때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적은 일기에서 시작했다. 어느 날 전시회장에서 물이 계속 나오는 영상을 보게 됐는데, 갑자기 예전에 썼던 일기가 생각나면서 물, 심해, 심연, 사람의 마음, 인간의 한계 등으로 조금씩 생각이 확장됐다. 장면이 후두두둑 머리에서 떠오르면서 컷 넘버까지 떠올랐다. 그 자리에서 스쳐 지나간 장면들을 미친 듯이 기록하고, 집에 와서 다시 내용을 수정했다. 그렇게 써둔 글을 계속 간직하면서 언젠가 반드시 영상으로 찍고 말겠다, 그게 안 되면 화보로라도 남기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몇 번의 실패가 있었고 자유의 몸이 되다 보니 이제는 뭐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소소하게 수중 촬영이 가능한 촬영감독과 수중 세트장을 빌려 <심연>을 찍고 개인 소장용으로 간직하려고 했다. 감사하게도 홍일섭 촬영감독이 너무 재밌는 작업이 될 것 같다며 제안을 수락해주시면서 스케일이 좀더 커졌다. 내가 쓴 글을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다 보니 (쑥스러워하며) 내가 직접 연출도 연기도 하게 됐다.
- <심연>을 끝낸 이후 배우 정평의 이야기 <현재진행형>, 배우 안승균의 이야기 <꿈에 와줘>까지 바치 창작집단의 작업이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 승균이에게 <심연>을 찍게 됐다고 하니 “누나, 그럼 우리 ‘바치’도 시작하는 거야?” 라고 묻는 거다. 승균이 역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심연> 이후 <꿈에 와줘>도 만들게 됐다. <꿈에 와줘> 준비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지는 와중에 <현재진형형>은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촬영은 <심연> <현재진행형> <꿈에 와줘> 순서로 하게 됐다.
- 엔딩 크레딧에는 각본이 아닌 글로 파트가 명시되어 있다. 가령 <심연>의 글은 문근영, <현재진행형>의 글은 문근영과 정평, <꿈에 와줘>는 문근영과 안승균이 함께 썼다.
= 글은 내가 썼지만 그들의 감정에 대해 디테일한 설명을 듣고 정리한 내용이다 보니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크레딧에 함께 이름을 올린 거다. 한번은 승균이가 “처음에 하겠다고 했을 때는 몰랐는데, 작업을 시작하고 나니 내 일기장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 같아서 부끄럽다”는 말을 했다. 그만큼 남들에게 쉽게 얘기하지 못하는 내면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 자체가 창작이다. 내가 승균이와 정평 오빠에게서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끄집어낸 후 그 내용을 글로 정리한 후, 연습 과정에서 구체적인 감정선을 정리하고 서로 의견을 수용해나가며 글을 수정했다.
- 배우는 작품 속 캐릭터로 관객과 만나야 하기 때문에 진짜 자기 모습은 최대한 숨길 때가 많은 직업이다. 진짜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게 주저되지는 않았나.
= 연기가 너무 좋았고, 연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우선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내 감정과 맞닿아 있는 캐릭터를 맡는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더군다나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배우 입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만들어 직접 연기한다면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잘 해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다른 배우들도 관심을 가졌던 게 아닐까.
- <심연> <현재진행형> <꿈에 와줘> 세 편 모두 배우들의 대사가 없다.
= <심연>을 찍을 때만 해도 그 다음 작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수중 장면으로만 이루어진 <심연>은 애초에 배우가 대사를 할 수가 없다.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당시 도움 주시던 분께서 배경음악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어왔다. 그제야 음악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심연> 촬영 당시 감정 몰입을 위해 한창 듣고 있던 아티스트 요크(YOLK)에게 SNS로 연락을 드렸다.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답이 오면서 ‘나의 이야기 X YOLK’ 프로젝트를 협업하게 됐다. 배우는 온전히 눈빛과 표정과 몸짓으로만 감정을 표현하고, 음악이 언어를 대신한다.
- 참여한 배우들이 대사 없이 연기하는 데 부담을 느끼지는 않았나.
= 다들 잘하더라. (웃음) 그래서 현장에서 내가 딱히 뭘 할 게 없었다. 연극 무대를 준비할 때처럼 사전 연습을 많이 거쳤다. 머릿속에는 어떻게 찍을지 다 정리되어 있으니까 콘티도 미리 짤 수 있었고 그에 맞춰 배우들의 동선을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현장에 가니 배우들이 마치 날개 달린 듯 연기를 너무 잘했다. 그래서 “왜 이렇게 잘해요?” 라고 감탄하며 진지하게 물어봤다. 조명이 들어오는 순간,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 확 감정 몰입이 됐다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연출자인 나만 잘하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웃음)
- 기본적으로 바치 창작집단의 기조는 배우, 작가, 연출 등 모든 파트가 예술이라는 큰 카테고리 아래 서로 경계가 없어지는 데 있는 듯하다. 서로 의견은 어떻게 교류하나.
= 연극 무대를 할 때 허물없이 대화하며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모습이 참 좋았다. 물론 드라마도 영화도 소통을 하지만 깊게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작품을 만든다는 느낌은 덜하다. 그 기억이 너무 좋아서 동등하게 각자 위치에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서로 시너지를 주고받는 작업을 이상향으로 그리게 됐다. 실제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 배우, 촬영감독 그리고 음악감독을 맡아준 요크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궁금하게 만들고 묻고 답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게 바치 창작집단이 소통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함께 작품을 만들어나가는 건 앞으로도 쭉 바치 창작집단의 방향성으로 가져가고 싶다. 아직 바치 창작집단에 제대로 된 작가와 연출이 없는데, 이러한 영상 작업에 관심 있는 분들과 크루를 계속 만들어가고 싶다. 다양한 작업을 통해 함께 성장하고 다 같이 재미있게 일할 수 있는 판이 됐으면 좋겠다.
- 지금까지 경험한 현장에서 감독의 역할과 바치 창작집단의 그것은 다를 수밖에 없겠다.
= 많이 달랐다. 바치 창작집단의 대표인 내가 제작도 하고 미술도 하고 장소 섭외도 하고 정산도 한다. 이제껏 아무것도 모르고 연기만 생각하며 살다가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됐다.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앞으로 현장에 나가면 각 분야 스탭들을 보면서 “다들 고생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전보다 많이 하게 될 것 같다.
- -지난해 KBS 단막극을 제외하면 2019년 드라마 <유령을 잡아라> 이후 오랜만에 작품으로 관객과 만난다. 그동안 어떻게 시간을 보냈나.
=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아주 평안하고, 자유롭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여행도 많이 다녔다. 에너지를 많이 충전하면서 날 힘들게 했던 생각들도 많이 덜어냈다. 그렇게 쉴 만큼 쉬다 보니 바치 창작집단과 같은 창작 활동을 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 동료들과 영상 작업을 하면서 인간 문근영도 배우 문근영도 많이 치유된 것 같다.
= 항상 창작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 연기도 창작 활동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믿고 싶은 거지 실제 그럴 수는 없었다. 가상의 인물을 이해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창작이지만, 누군가의 글에 의해, 누군가의 손에 의해 다시 다듬어지는 2차 창작물에 더 가까웠다. 해소되지 않는 무언가를 풀어줄 수 있는 작업을 통해 감정을 토해내고 싶은데, 그게 가능한 캐릭터를 만나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바치 창작집단의 영상 작업을 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세상 신나고 재미있었다. (웃음) 물론 모든 파트를 신경 써야 하는 건 힘들었지만 현장에서는 모니터만 보고 있어도 행복했다. 감독님이 앵글을 기가 막히게 잡아줄 때,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줄 때, 편집실에서 컷들을 자르고 이어 붙이는 작업을 할 때, 색 보정 작업을 할 때, 음악 감독과 대화를 나누며 수정하는 모든 과정이 즐거웠다. 연기에 대한 생각도 조금 달라졌다. 여러모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 14살 때 출연한 <가을동화> 이후 전국민이 아는 유명인이 됐고, 문근영의 일거수일투족에 대중이 호기심을 가졌다. 과도한 세간의 관심은 배우를 그저 방어적이고 숨어버리게 만들기 쉽다. 그런데도 나를 보여주는 창작 활동에 갈망을 갖고 실천에 옮겼다.
= 예전엔 나도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숨어있기만 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 답답함을 느꼈다. 결국 여러 가지 요소가 합쳐져서 지금의 시간이 온 것 같다. 연기로 계속 해소되지 않는 것이 있었고, 대중 안의 문근영은 계속 갇혀서 몸을 감추고 있었고,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답답했고, 몸도 마음도 여러모로 지쳐 있었다. 그냥 다 버리고 마음껏 휴식을 즐기다 보니까 새로운 무언가가 다시 나를 채우게 됐다. 모든 것이 흥미롭고 감성적으로 다가왔다. 이제 무언가를 할 때가 됐구나, 그럼 뭘 하지? 그때 <심연>을 죽기 전에 꼭 찍어야겠다고 결심했다.
- 예정된 바치 창작집단의 작업이 있나. 배우로서 계획도 궁금하다.
= 바치 창작집단은 어쨌든 재밌자고 만든 것이기 때문에 기간에 대한 강박을 갖지 않고 꾸준히 하는 게 목표다. 머릿속엔 두 번째 프로젝트가 준비되어 있긴 하지만 시간을 갖고 천천히 작업하려고 한다. 차기작이 정해지진 않았지만 좋은 작품이 있다면 언제든지, 이제는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재미있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다. 독특하거나 내가 하지 않을 법한 캐릭터 혹은 그런 이야기를 연기해보고 싶다. 예전에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혹은 잘하고 싶은 것만 했는데 지금은 ‘잘’의 의미가 별로 없어졌다. 내가 재밌게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캐릭터, 그래서 보는 분들도 재미있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