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중년 여성 배우② ‘윤시내가 사라졌다’ 오민애, “힘들 때에도 배우의 눈으로”
2022-10-17
글 : 김소미
사진 : 백종헌

미쟝센단편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연기부문에 호명된 단편영화 <나의 새라씨>(2019) 이후 전주국제영화제 배우상을 수상한 <윤시내가 사라졌다>(2022)까지, 배우 오민애는 28편의 작품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고 대부분이 주연이었다. 공개된 작품만 계산한 기자의 서투른 셈법에 오민애는 “다 합하면 50편도 훨씬 넘을걸요. 지난해에만 24편을 찍어서…”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1965년생 배우 오민애는 언제부턴가 영화제 단편 섹션을 찾으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배우였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만 보아도 <윤시내가 사라졌다>와 단편 <그렇고 그런 사이> <심장의 벌레> <오 즐거운 나의 집> <현수막>까지 5편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그중 6월8일 개봉한 <윤시내가 사라졌다>는 23년 만에 처음 주연한 장편영화다. 도대체 무엇이 이 낯선 배우를 마지막 배수진을 치고 일하는 사람처럼 절박하고 열렬하게 만든 것일까. 배우 오민애가 들려준 삶은 원고지 30매에 맞추어 축약하기에는 너무도 굴곡진 역사였다. 분명한 것은 그가 자기 고통과 슬픔에 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오민애는 발명가의 자세로 불행을 마주하며 그 속에서 배우 되기의 동력을 끊임없이 추출해냈다. 이른 나이에 가장의 삶을 살았고, 죽음의 문턱 앞에서 고민했으며, 잠시 속세를 등지기도 하고, 연극계 미투 운동의 한가운데를 경험하는 모든 과정을 아울러 그는 “그게 어디든 가는 곳마다 배우에겐 깨달음의 성지였다”고 말한다. 50대 후반, 전성기를 맞이한 배우 오민애가 거쳐온 담금질의 생애는 이제 웬만해선 끄떡없는 내공으로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더 많은 영화를, 그 속에서 더 많은 삶을 배우길 소망한다. 그리고 그렇게 배운 사랑을 동료들에게 나눠줄 날들을 기다린다.

-23년 만에 <윤시내가 사라졌다>로 첫 장편영화 주연을 맡았고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배우상까지 수상했다.

=인생이 바뀔 수 있구나, 그런 느낌을 받는다. 그동안 지난하게 밭을 갈고 거름을 뿌리면서 토양을 만들었다면 이제야 작은 싹들이 돋는 것 같다. 동료들, 관객과 함께여서 그저 감사하다.

-윤시내 이미테이션 가수 순이를 연기했다. 평생 윤시내를 좇다가 자신을 잃어버렸고, 딸 하다(이주영)와의 해묵은 갈등까지 터져버리고 만 애석한 인물이다.

=그랬던 여자가 영화 속 여정을 거쳐 결국은 자기를 리모델링하게 된다. ‘이제는 벗어나고 싶어’라는 윤시내의 노래 가사가 결과적으로는 마치 주문처럼 작동하는 영화다. 순이가 영화에서 담금주를 다 마셔버리지 않나. 묵혀둔 것을 싹 비워버리고 새로운 것이 담길 자리를 다시 마련하는 영화라는 점이 내 삶도 돌아보게 했다. ‘나는 그동안 살아온 인생과, 만났던 영화들과, 사랑들을 다 잘 접목해서 나를 또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갈 수 있지?’ 순이는 내게 그런 질문을 남겼다.

-처음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언제였을까.

=27살 때 인도 배낭여행을 가려고 여행사에 갔다. 그때도 참 힘든 시기였는데 여행사 직원이 서류를 작성하면서 직업이 뭐냐고 물어보더라고. 그러면서 자기가 알아맞혀보겠다고 하더니 “연극배우 아니세요?” 했다. 그게 방아쇠가 된 것 같다. 연극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였는데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을 보고 엄청난 자유로움을 느끼고 매료되기도 했다. 나도 자유롭고 싶다는 갈증이 솟았다. 돌이켜보면 30대까지는 내 안으로만 파고 들어가는 폐쇄적인 삶을 살아온 셈이다. 학교 다니던 10대 시절에는 ‘넌 너무 슬퍼 보인다’라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실제로 슬픔이 많은 청소년기였나.

=미혼모의 딸로 태어났고 자라는 동안 가정 폭력을 겪었다. 내가 가장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라 고등학교 2학년 때 중퇴를 하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 어려움이 많았다. 죽음을 생각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결국 죽지 못하고 계속 살고 싶은 마음이 내 안에 있더라.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2000년 1월1일, 뉴 밀레니엄에 맞춰 절에 들어가서 1년 반 정도 행자로 살다가 나왔다. 그때 내 질문은 이거였다. ‘성실하게 내 책임을 다하면서 죄 짓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는데 왜 자꾸만 불행한 일이 생기는 걸까, 나한테 뭔가 씻어내야 할 업보가 있는 걸까?’ 그렇게 통장에 딱 16만원만 남겨두고 청운사로 들어가서 내내 바닥만 쓸었다. 이렇게 살아와서 나는 지금도 아이들, 청소년들에게 관심이 많다. 젊은 친구들을 보면 항상 도와주고 싶고 마음이 고달픈 데는 없는지 물어봐주고 싶다.

-1999년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단역으로 영화에 첫 출연하고 몇년 뒤 이름을 오주희라는 예명으로 바꾸었다. 그사이 지역에서 연극협회를 창립해 행정 활동도 했는데, 제자리를 찾으며 뿌리내리기 위해 부단히 애쓴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청운사 행자 생활을 마치고 나왔을 때 예명을 지었다. 평범해지고 싶어서 두루 주에 계집 희라는 한자를 썼다.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못 마쳤던 공부도 하면서 검정고시를 패스했다. 연극계에선 온갖 행정적인 일들을 했다. 원체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도 한몫 했을 것이다. 협회 회장도 하고 교육도 하고 봉사도 다니고, 집에서는 아이 키우고 살림하는 그런 시기였다. 한번은 세어보니 나 혼자서 9가지 역할을 하고 있더라. 그러다 결국 우울과 무기력에 빠져 허우적댔고 자연스레 생활고도 찾아왔다. 그 때 뛰어든 일이 카드 영업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이라곤 다 연극하는 후배들이니까 사정이 뻔하잖나. 그런데도 내가 절박해 보였는지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하는 친구들의 얼굴이 기억난다. 그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그러다 협회 신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산불>이라는 공연을 다시 하게 되었다. 카드 영업을 뛰다가 오랜만에 연극 대본을 읽는 순간 딱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아, 이제 다시는 영업하러 못 돌아가겠구나. 영업하는 사람의 화법을 버리고 배우의 호흡을 품게 되었을 때의 희열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물론 카드 영업하던 시절에도 배움은 있었다. 다들 생계를 위해 목숨 건 카드 영업의 세계는 엄청나게 치열했거든. 그들을 가까이서 보면서 내 고통에 겸허해지기도 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배우의 눈으로 바라보면 가는 곳마다 깨달음의 성지였다.

-연극이 아닌 영화에 몰두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

=연극계에서 내 정체성 중 하나가 행정가였던 셈인데 2018년에 미투가 터졌다. 연극계가 예술계 내 성폭력 고발의 진원지였다. 그때 공연예술인노동조합에 들어가서 미투 사건들을 접수받는 동안 그저 너무 부끄러웠다. 소나기가 지나갈 때만을 기다릴 수는 없다, 우리도 양심 선언이 필요하다는 자성을 갖고 궐기 대회를 준비했다. 그때 행정 총괄을 맡아 진행을 하면서 인간관계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다. 뒤통수를 한 네대는 얻어맞은 것 같다.(웃음) 명예훼손으로 법적 소송에도 휘말렸지만 변호사 없이 혼자 해결했다. 당시에는 마치 이 모든 일들이 연극판을 벗어나라는 계시 같았고 환멸이 너무 커서 우선 떠나기로 마음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연극은 배우 오민애를 키운 곳이기도 하다. 성숙의 시기를 거쳤으니 무대에도 다시 돌아가고 싶다.

-김덕근 감독의 단편영화 <나의 새라씨>로 제18회 미쟝센단편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연기부문을 수상했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어느 영화제든 단편 섹션에 들어가면 무조건 오민애 배우의 영화를 만나게 되는 신드롬이 생겨났다.

=절묘한 타이밍에 만난 영화였다. 아이는 커가고 결혼 생활도 쉽지 않던 시절에 시댁에서 직장을 구해주겠다고 했다. 연극계에서 일하면서 그전까진 아르바이트 삼아 영화에 출연한 게 대부분이었지만, 갑자기 이렇게 물러날 수는 없다는 마음이 들더라. 마지막 배수진을 치는 심정으로 “어머니, 딱 3년만 저한테 열심히 할 기회를 주세요. 자리를 잡지 못하면 김밥집에 가서 김밥이라도 말겠습니다”라고 선언을 했는데, 그때 <나의 새라씨> 대본이 들어왔다. 운명 같았다.

-그 이후 어떤 변화를 겪었나.

=그야말로 선순환이었다. 그해 하반기에만 7편의 단편을 찍었다. 무엇보다도 미쟝센단편영화제 수상 직후 젊은 감독들, 배우들이 내게 와서 진심 어린 눈빛으로 축하하고 안아주는데… 그동안 살면서 쌓인 설움이 마술처럼 사라지더라. 정말로 그동안 맺힌 응어리가 한순간에 풀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씻어내고 본격적으로 영화 활동에 들어갔다.

-연극 <산불>, 단편영화 <나의 새라씨> 등 위기의 순간마다 다시 배우의 길로 인도해준 운명적인 작품들이 있었던 셈이다.

=고통도 하나의 공부니까. 하지만 거기 너무 오래 머무르지 말고 다시 제자리인 배우의 길로 돌아오라는 어떤 인도가 있었다고 느낀다.

*이어지는 기사에 오민애 배우의 인터뷰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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