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엄마 역을 해왔지만, 당신이 연기하는 엄마는 헌신적일 때나 세속적일 때나 특유의 고집스러운 인상이 있다. <경아의 딸>에서도 딸을 걱정하는 모습 한쪽에는 고집스러움에서 빚어지는 외롭고 고독한 얼굴이 있다. 배우 자신에게 그런 면이 있는 걸까.
=생각해보면 계속 같은 직업을 고수해온 것, 아이들을 대안학교에 보내고 중도 하차 없이 졸업시킨 것, 극단도 한번 연을 맺고 나서는 다른 데로 옮기지 않았던 것도 고집이라면 고집이겠다. 연기에서 그렇게 보였다면 그래도 내 것이 연기에 드러나는 모양이다. 아무리 과장되게 하라고 해도 내가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으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림에 딱딱 맞춰주는 TV 연기가 필요할 때도 있고 독특한 카리스마가 필요하기도 한데 그게 잘 안되더라.
-이야기한 ‘내 연기’를 할 때는 어떤 점을 중요시하나.
=극단 한강에서 연기를 많이 배웠다. 극단 대표님이 배우가 작품 분석도 하고 시나리오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워크숍을 많이 시켰다. 대사는 글이 아니니까 말하듯이 해야 한다는 걸 늘 강조했다. 소극장 공연을 많이 했고 노동자나 평범한 이웃을 연기하면서 일상적인 화법을 주로 익혔는데, 요즘은 대사에 개성이나 힘을 좀더 더해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말을 그렇게 하려면 삶의 태도도 바뀌어야 한다. 소리는 몸으로 만들어내는 거니까. 내 일상에서부터 힘과 중심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영화와 연극, 드라마를 넘나들며 연기했다. 가장 인상적인 데뷔의 순간이 언제였나.
=<풍문으로 들었소> 이전에 안판석 감독의 <아내의 자격>(2012)이 첫 드라마였다. 한회만 출연해달라고 했다. 드라마는 연극배우들을 소모시킨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거절했는데 두번이나 연락이 왔다. 남편까지 동원돼서 “이 감독님은 다르대. 작은 역이지만 제대로 담을 거래”라며 설득했다. 가정부 역이었고 대사는 한마디였다. “아는 아저씨야?” 촬영 중간에 안판석 감독님이 오셨다. 나에게 “배우예요?” 묻더니 “대사가 다른데”라고 했다. 을들의 세계에 관심이 많은 정성주 작가가 가정부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더하는 바람에 1회차가 9회차로 늘어났다. 그 방송 데뷔작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연기를 시작했을 때 꿈꾸거나 닮고 싶은 배우가 있었나.
=연극 할 때부터 송강호 선배를 굉장히 좋아했다. <비언소>(1992)라는 공연에서 처음 봤는데, 송강호 선배도 막 데뷔한 때였다. <비언소>에 꽤 유명한 배우가 많이 나왔는데 나는 송강호 배우의 연기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래전 극단 쫑파티 자리에 가다가 우연히 계단에서 마주쳤는데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이번 작품에 출연한 배우 김정영입니다. 이렇게 봬서 영광입니다” 하고 굽신굽신 인사드렸다. 이렇게 보더니 “들어가” 그 한마디가 끝이었다. (웃음) 여전히 제일 좋아하는 배우다.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빠져든다. 오래전 일인데도 표현까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야기를 정말 좋아한다. 내가 들은 좋은 말, 좋았던 상황은 다 기억한다.
-기억력도 집중력도 좋은 배우 같다. <경아의 딸>처럼 서사를 끌고 가는 주연의 자리도 무겁지만, 조연으로 단 시간에 필요한 감정을 전달하는 연기도 대단히 집중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시그널>의 김원석 감독님은 연기나 표정을 까다롭게 요구하는 분이다.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볼까 고민이 많아지고 며칠 전부터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럴 땐 현장에 오면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않고 감정만 붙잡고 있는 거다. 그런데 감독님이 계속 다가와서 “집에 우환 있으세요?” 하고 농담을 해서 도망 다닌 기억이 난다. (웃음) <경아의 딸>처럼 어제도 보고 내일도 볼 스탭들이 있는 환경에서는 놀다가도 딱 연기에 몰입할 수 있지만, 조연으로 참여하면 낯선 환경에 뚝 떨어져서 단시간 내에 필요한 연기를 해내야 한다. <시그널> 때는 장면이 잘 나와서 만족했지만, 잘 안될 때는 굉장히 괴롭다. 제일 힘든 연기가 잠깐 갔다 오는 연기다. (웃음) 선수들끼리는 잘 안다. 뻣뻣하고 어색한 채로 갑자기 친한 친구나 엄마가 돼야 하는 거다. 굉장히 집중해야 하고 그걸 해내야 프로다.
-그렇게 어려운 일인데도 20년 넘게,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비결은 뭔가.
=여전히 연기가 재미있고 동경하기 때문에. 말은 이렇게 하지만 새 배역을 맡으면 또 두렵다. 어떻게 하면 과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까, 늘 고민하고 도망가고 싶을 때도 많다. 방송될 때쯤이면 안 보고 싶다. (웃음) 아마 다른 배우들도 그럴 거다. ‘다시는 하나 봐라’ 하면서 긴장하고 떨고, 그게 또 재미있다고 반복한다.
<경아의 딸> 속 빛나는 순간
딸에게 벌어진 사건 앞에서 경아는 충격과 실망감, 두려움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어찌할 바를 몰라 화를 내고 근심에 싸여 문제의 자초지종을 좇는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경아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데, 미자의 식당 앞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내뱉는다. 두려움과 미안함, 애틋함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담은 김정영 배우의 연기는 관객에게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으로 전해지고 긴 탄식을 내뱉게 한다.
내 인생의 캐릭터는?
“배우로서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역할들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지만, 지금 이 순간 내 인생 캐릭터는 <경아의 딸>의 경아다. 20년 만에 다시 <씨네21>과 인터뷰를 하게 해준 이름이고, 나 역시 배우로서 경아처럼 새로운 출발선에 선 기분이라 지금의 나와 가장 닮아 있다.”
10년 전의 나, 현재의 나, 10년 후의 나
“10년 전에 나는 육아를 하다 막 다시 작품을 시작한 배우였다. 10년 후에는 여전히 연기를 하고 있지만 더 기품 있는 배우가 되어 있기를 바란다. 현재의 나는 철들어가는 중이다. 예전에는 나 잘난 맛에 살았다. 배우에게는 그 힘이 또 귀한데, 친한 박명신 언니는 그걸 ‘오만 메소드’라고 부른다. 하지만 요즘은 내가 하는 일이 상대방과 에너지를 주고받는 일이라는 걸 실감한다. 무대에서나 삶에서나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