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중년 여성 배우③ 오민애 배우가 꼽은 '윤시내가 사라졌다' 속 빛나는 순간
2022-10-17
글 : 김소미
사진 : 백종헌

-단편영화 작업은 대체로 갓 대학을 졸업한 감독들이 하는 경우가 많고 감독, 스탭, 배우 대다수가 20대다. 그들과 어울려 수십편을 쉬지 않고 작업하는 마음이 어떤 것일지 궁금했다.

=세상에는 의외로 어른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 나는 그들을 존중하고, 함께하고 싶다.

-중년이 되어서야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권리를 스스로 재건하는 과정이 있었겠다.

=중졸로 살아왔으니 배움에 대한 갈증이 심했는데 결혼해서 아이 키우고 연극을 하면서 공부까지 하는 게 참 쉽지는 않더라. 검정고시를 패스한 것이 30대 중반 즈음이었다. 이후 곧장 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에 들어가서 역사, 세계사, 철학, 예술사, 인류학 등을 닥치는 대로 공부했다. 그전까지 내 안의 우물만 파다가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중년이 되어 눈을 뜬 거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서 집 근처 학교를 알아보다가 2010년에 숭실대학교 사회복지대학원에도 들어갔다.

-전주국제영화제 배우상 수상자로 호명되어 전주돔 무대에 올라갔을 때 지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겠다. 어떤 기분이었나.

=절에서 지낼 때 어느 순간 ‘내가 이제 조금은 비워냈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세상에 다시 내려가서 내가 태어난 이유를 풀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이후로는 알게 모르게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품고 살았다고 할까. ‘넌 언젠가 제대로 된 배우가 될 거야’ 하고 메아리쳤던 내 안의 소리가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감격과 감사함이 컸다.

-중년에 전성기를 맞이하는 여성배우들의 모습은 동세대는 물론 청년들에게도 용기를 준다. 이를테면 윤여정 배우를 향한 세간의 지지 중에는 그런 감사함도 있지 않을까.

=독립영화가 중요한 매개라고 느낀다. <미나리> 이전에 윤여정 선생님께는 <죽여주는 여자>도 있었다. 인생의 고된 시기를 버텨냈기 때문에 낯설고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고, 그 도전 의식으로 독립영화의 정신과 동행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도 늙었다는 말에 연연하지 않고 계속 용기내보고 싶다.

-도대체 누가 늙었다고 하나. (웃음)

=내가! 사회적 관습에 젖어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 스스로를 늙은이 취급하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사회적인 숫자에 속지 말자고 자꾸만 나를 다독이고 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단편 <심장의 벌레>는 설렘과 떨림의 감정으로 그려낸 중년의 멜로드라마라는 점에서 아름다웠다.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색깔의 작품이 있나.

=어떤 작품을 할지보다 그게 무엇이든 ‘어떻게’ 할지를 욕심내는 편이다. 작품이 어떻든 그 과정에서 내가 치열하길 바란다. 멜로드라마 얘기가 나와서 덧붙이자면 그동안 살아온 궤적이 애정 결핍의 나날들이었으니 작품에서나마 충분히 사랑받으면 좋을 것도 같다. 사랑에 목말라 있는 관객까지 적셔줄 수 있는, 성숙한 사랑의 모양을 가진 영화 속 인물이 되어보고 싶다.

-지난 만 3년간 공개된 작품만 장·단편을 통틀어 28편이다. 앞으로도 이 스태미나를 유지할 생각인가.

=당근이지! 공개되지 않은 작품까지 합하면 50편이 넘는다. 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건, 스스로 일정을 관리하고 생활과 업무를 억척스럽게 조율하는 행정가의 이력과 멘털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자부한다. (웃음) 기능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내 삶의 1인다역에 익숙하다. 작품이 없을 땐 엄마의 역할이 있었으니 온전히 쉬어본 적이 없는데 고등학생 아이가 지난해부터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되었고, 그에 맞추어 ‘졸혼’했다 내 두 발로 오롯이 선 올해는 조금 다른 국면이 펼쳐지지 않을까 싶다. 요즘은 더 확장된 세계를 꿈꾼다. 방송 드라마 작업도 열심히 하고 있다.

-유튜브에서 개인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실력이 수준급이더라.

=워낙 음악을 좋아한다. 타고난 흥이 많은 편이었다. 어릴 땐 도피처가 노래여서 눈만 뜨면 하루 종일 길을 걸으며 흥얼거리고 다녔다. 그런데 살다보니 어느 순간 노래를 잃어버리게 되더라. 욕심이 있다면 내 이야기를 소박하게 전하는 앨범을 하나 만들어보고 싶다. 혹시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피하지 않고 마주해볼 생각이다. 아, 유튜브는 호기심 때문에 해 본건데 지금은 노안 때문에 편집을 할 수 없어서 쉬고 있다. (웃음)

-차기작은 어떤 작품인가.

=아토ATO에서 제작하는 영화 <딸에 대하여>를 6월 말부터 한달 반 정도 촬영할 예정이다. 기존의 가족 개념을 탈피하는 재밌는 독립영화가 나올 것 같다.

<윤시내가 사라졌다> 속 빛나는 순간

너무 애쓰는 사람은 초라해 보일 때가 있다. <윤시내가 사라졌다>에서 윤시내를 너무 사랑하는 이미테이션 가수 연시내, 본명 순이(오민애)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애잔한 마음이 드는 건 그래서다. 현실과 괴리가 있는 이상적인 자아상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사람의 위태로움은 화려한 의상과 메이크업 위로도 뾰족하게 솟아난다. 배우 오민애는 성숙하다기보다 차라리 미운 구석이 많은 중년의 여자를 너무나 현실적으로 제시하면서 제각기 결점투성이인 우리의 익숙한 본모습을 긍정하게 만든다.

내 인생의 캐릭터는?

“<나의 새라씨>의 새라는 사업과 결혼에 모두 실패한 51살의 중년 여자로 서울을 등지고 고향에 내려와 새라라는 가명을 쓴다. 새라가 영화 말미에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이정자입니다’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있다. 시나리오에는 눈물을 흘리는 묘사가 없었고 나도 큰 부담 없이 촬영에 들어갔는데, 막상 대사를 입에 담는 순간 제어가 안될 정도로 눈물이 줄줄줄 터져나왔다. 그때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동안 자신을 숨겨왔던 사람의 자기 고백이 그 짧은 대사 안에 들어 있었구나 싶더라. <나의 새라씨> 이후 내 행보도 어쩌면 이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10년 전의 나, 현재의 나, 10년 후의 나

“받아들이기 힘든 내 삶에 대해, 인간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무진장 애쓰던 시절이 있었다. 2010년에 사회복지대학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면서 노인·가출청소년·장애인·다문화인 등등 사회적 약자들을 많이 만났다. 이론과 경험이 사이좋게 만난 이 시기가 배우로서 캐릭터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에도 큰 자양분이 되었다. 지금의 나는 나만의 인생을 버틸 수 있는 팔다리의 힘이 생겼고, 뇌도 점점 더 커가고 있다. 이제 어지간한 비바람이 쳐도 부러지지는 않을 나무 같다. 10년 뒤에는, 열매를 더 많이 맺어야겠지? 그 열매를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잘 나눌 수 있을지가 앞으로의 고민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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