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중년 여성 배우⑦ '정순' 김금순 배우가 생각하는 10년 전의 나, 현재의 나, 10년 후의 나
2022-10-17
글 : 조현나
사진 : 백종헌

-김금순이라는 이름은 본명인가.

=그렇다. ‘이제 금’에 ‘순할 순’을 쓴다. 옛날 어른들이 오래 살라고 이름을 막 짓지 않나. 우리 아버지도 그런 맥락에서 내 이름을 지으셨다. 10~20대에는 진짜 장난 아니었다. 학교에서 김금순이 대체 누구냐며, 우리 장모님 이름이다부터 시작해서 고모, 이모 다 나왔다. 병원에서 간호사가 ‘김금순씨’ 하고 호명하면 할머니들이랑 같이 일어나고. 예전엔 삐삐가 오면 커피숍에서 전화를 연결해주는 시스템이었는데 “김금순씨, 전화받으세요~” 하면 옆에서 다 웃었다. 그때마다 ‘이것들이 미쳤나. 전화하지 말라니까’ 하면서 속으로 화를 냈다.

-그런 정도면 배우로 활동할 땐 가명을 쓰고 싶었을 법도 한데.

=<집으로 가는 길>과 <변호인> <카트>를 촬영할 때 잠시 김선주라는 가명을 썼다. <카트>를 촬영할 당시 극중 계산원들의 이름표에 전부 배우 본명을 적었다. 그때 감독님이 물어보시더라. 선주라는 이름의 배우가 두명이라서 혹시 선배님 명찰에 김금순이라는 본명을 써도 되겠냐고. 괜찮다고 하고 ‘김금순’이란 명찰을 달았는데 생각보다 좋았다. 배우 중에 금순이라는 이름이 나밖에 없었으니까. 그 뒤로는 그냥 본명을 쓰기로 했다. 전에 김추월 선배가 해주신 말씀이 있다. 본인이 젊었을 땐 자기 이름이 너무 싫었는데 나이 먹을수록 좋아졌다고. 나도 그렇다. 지금의 내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든다.

-배우라는 직업은 언제부터 꿈꿨나.

=중학교 2학년 때 시작했다. 고향이 진주인데 당시 국어 선생님이 영화를 하시고, 극단에서 연출가로도 활동하셨던 분이라 학교에서도 연극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국어 시간에 <작은 아씨들>로 극을 올렸는데 어쩌다보니 내가 메기를 맡았다. 그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너무 재밌어서 고등학생 때까지 연극부에서 활동했다. 졸업한 뒤로는 진주 극단에서 활동하다 상경해서 현대 극단과 마임 극단에서도 일했다. 배우라는 정체성을 오롯이 세웠다기보다는 모든 게 자연스럽게 이어졌던 것 같다. 그러다 결혼하고 10년 정도 연기를 쉬었다. 아이들이 크고 나서 무슨 일을 할까 찾아보는데 다른 일은 잘 못하겠더라. 그래서 오랜만에 프로필을 정리해 필름 메이커스에 올렸고 여기저기서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단편영화부터 다시 차근차근 시작하게 됐다.

-공백기가 있었다고 해도 배우로서 활동한 기간도 길고 경험도 많다. 다양한 현장에 대처하는 본인만의 노하우도 생겼을 것 같은데.

=노하우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니터링을 잘 하지 않는다. 가서 보고 오면 정신을 차리게 되는 느낌이 든다. 내가 가져가야 할 감정 외의 것들, 이를테면 머리카락이나 옷, 얼굴 이런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너무 계산적으로 연기하는 느낌이 들어서 최대한 모니터링은 자제한다. 정말 문제가 있다면 감독님이 정확하게 지적해주실 테니까. 나는 나의 것에, 나의 감정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작품이나 캐릭터에 필요 이상으로 몰두하거나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접근하진 않을 거란 인상을 준다. 인물에 몰입했다가 잘 빠져나오는 배우로 보인달까.

=그런 편이다. 과거에 연극을 한 경험이 좋은 자양분이 됐다. 가령 1년 장기 공연을 한다고 할 때는, 그 인물로 한해를 살아야 했기 때문에 캐릭터를 몸에서 떼내기 정말 어려웠다. 그땐 지금보다 어리기도 했고. 그렇지만 그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하면서 인물에 빠져들고 나오는 나만의 방법을 익혔다. 가족과 함께하는 집도 내가 환기할 수 있는 귀한 공간이 되어준다. 일터에선 배우로서 일하고, 집에선 엄마로서 가족을 챙기고. 그런 요소들이 적절하게 잘 순환한다.

-최근 <정순>을 포함해 중년 여성들의 삶을 다각도로 조명한 작품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배우로서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너무 좋다. 연극배우들이 매체 배우들에 비해 색깔이 강하다보니, 몇년 전까지만 해도 ‘역할이 없다,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독립영화 진영에서는 활발히 활동했지만, 돌이켜보면 대부분 엄마 역할이었다. 물론 지금도 엄마 역을 많이 맡는다. 하지만 직업이나 캐릭터 성격 측면에서 점점 다양해지고 세분화되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런 변화가 무척 만족스럽고 앞으로가 훨씬 더 기대된다.

-<정순> 때와 달리 머리를 짧게 자르고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현재 촬영하는 작품 때문인가.

=지난해 12월에 촬영한 <울산의 별>(가제) 때문에 스포츠머리로 짧게 깎았다. 원래 남자가 주인공이었고 나는 주인공의 아내 역할을 제안받았는데, 시나리오가 바뀌면서 여성인 내가 주인공이 됐다. 극중 역할은 조선소 용접공이다. (핸드폰에서 사진을 찾아 보여주며) 이렇게 짧게 자른 건 처음이다. 감독님이 미용실에 같이 가서 엄청 우셨다. (웃음)

-정작 배우 본인은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짧게 자른 머리가 이후의 캐스팅에 영향을 미치진 않았나.

=나도 그럴 줄 알았다. 얼마 전 촬영한 영화 <잠>에 무속인으로 출연했는데, 처음에 감독님에게 여쭤봤다. “제가 머리가 짧은데 무속인 연기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감독님이 미팅하고 너무 멋있다며 좋아하시더라. 그 뒤로 드라마 <강계장>에서 한 주무라는 독특한 성격의 공무원도 연기하고, 지금은 디즈니+의 <카지노>를 촬영하고 있다. 필리핀 사탕수수밭 살인사건 관련 실존 인물인 손 대표를 맡았는데 한국에서 300억원가량을 사기 치고 필리핀으로 떠나 카지노에 투자하는 인물이다. 드라마 <진검승부>에선 도경수씨의 엄마로 캐스팅됐다. 마찬가지로 짧은 머리에 거친 성격을 지닌 엄마다.

-그동안 평범한 소시민을 주로 연기했는데 최근엔 전부 캐릭터성이 강한 역할을 맡았다. 머리를 자른 게 오히려 좋은 계기가 된 걸까.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머리 짧을 때 액션영화 하나 하면 좋은데. <정순> 감독님과도 이야기했는데 언젠가 아줌마 누아르를 한편 찍어보고 싶다. 탄탄하게 근육 잡힌 그런 거 말고 뱃살도 있고, 엉덩이도 처진 아줌마가 주인공인 거다. 싸울 때도 멋있는 액션을 펼치는 게 아니라 머리채 잡아뜯으며 싸우는 거지. <정순> 감독님한테 한번씩 전화해서 여쭤본다. “감독님, 시나리오 쓰고 계시는 거죠?” “아뇨, 선배님 지난주에 이사했어요~.” 인생 뭐 있나 생각하며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다.

<정순> 속 빛나는 순간

자신의 일터인 공장에서 정순은 수많은 얼굴을 드러낸다. 직원들 사이에서 웃음을 잃지 않다가도, 애인 영수가 정순의 영상을 유출한 뒤로는 핏기 가신 창백한 모습으로 유령처럼 공장을 나선다. 그리고 보란 듯이 공장에 돌아온 그의 얼굴에는 분노 섞인 옅은 웃음이 걸려 있다. 정순의 감정을 세필로 그려낸 듯한 김금순 배우의 연기에 깊이 매료되는 순간이다.

내 인생의 캐릭터는?

<브로커>의 박 여사. “언젠가 오디션을 볼 때 조감독이 내게 물은 적이 있다. ‘선배님, 악역은 안 해보셨죠?’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으니 티가 난다더라. (웃음) 강하고 세며 거친 이미지는 있는데 악한 면이 없다고. 그 때문인지 그때까지 악역을 맡아본 적이 없었는데 <브로커>의 박 여사로 처음 악역을 하게 됐다. 미혼모들을 성매매 시키고 이들이 낳은 아이를 거래하는 그야말로 절대 악인을. 대본 읽을 땐 내가 할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서는 재밌게 했다. 송강호 선배도 잘했다고 칭찬해주셨다.”

10년 전의 나, 현재의 나, 10년 후의 나

“10년 전은 경력 단절기를 지나 배우로 복귀한 시점이었다. 여러 단편영화에 엄마 역할로 출연하던 때였는데, 그 시절에는 말 그대로 생계를 위해 일한다는 감각으로 접근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좀더 배우라고 자각하며 작품에 임하는 단계다. 10년 후의 나를 그려본다면, 지금처럼 여전히 연기를 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 다만 내가 동경하고 좋아하는 배우들과 함께 작품을 하고 있으면 좋겠다. <카트> 이후로 좀처럼 마주칠 일이 없던 이정은 선배와 자매 지간을 연기해보고 싶고, <집으로 가는 길>에서 함께 연기한 전도연 배우도 다시 만나고 싶다. 사실 둘이 동갑이다. 전도연 배우가 커리어 우먼을 연기하고, 내가 일상에 찌든 아줌마 역을 맡아 친구 관계를 그려보면 재미있지 않을까.”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