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극단 한강의 배우로 무대 연기를 시작한 김정영은 김기덕 감독의 <실제상황>(2000)으로 스크린에 데뷔했고, 이듬해 <나쁜 남자>(2001)의 포주 은혜로 관객에게 조명됐다. 스포트라이트를 누리기도 잠시, 육아로 인한 공백기가 이어졌다. 마흔 무렵 그녀에게 볕이 드는 무대를 내준 건 TV드라마였다. <풍문으로 들었소>(2015), <시그널>(2016), <브람스를 좋아하세요?>(2020) 등 두고두고 회자되는 수명 긴 드라마 속에서 그는 과장되지 않은 현실감을 부여한 연기로 자신의 존재감을 쌓았다.
누군가의 엄마나 아내로 자주 호명되면서도 매번 다른 낯빛으로 친밀감을 드러내온 그는 <경아의 딸> 홍보로 바쁜 요즘에도 <안나> <피타는 연애> <더 글로리> 등 곧 공개될 드라마 속에서 쉼 없이 새 식구를 꾸리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도 좋은 시나리오라면 ‘시간이 비는 한 가리지 않고’ 학생들의 졸업 작품이나 독립영화에 출연하며 쌍삼, 문희, 경화 그리고 경아처럼 고유한 이름을 얻어 배우 자신의 서사도 탄탄하게 다져가고 있다. 그는 자신이 들은 좋은 말을 토시 하나 잊지 않고 되새기고 충만하게 연기했던 순간을 기억 속에 영구 보존한다. 아름다운 시퀀스로 구성된 기억 속에서 김정영 배우는 데뷔 초 치기 어린 열정과 애타던 마음, 요즘에 누리는 단단한 기쁨까지 눈앞에 꺼내 보여주었다.
-<경아의 딸> 시나리오의 첫인상은 어땠나.
=디지털 성범죄를 다룬 영화라고 소개받았는데, 읽어보니 시나리오 느낌은 예상과 달랐다. 사건이나 소재를 부각하기보다 모녀에게 집중한 이야기라 관심이 더 생겼다. 김정은 감독이 누구일까 싶어 인터넷으로 그의 단편영화 <야간근무>(2017)를 찾아서 봤는데 참 좋았다. 이렇게 찍는 분이면 괜찮겠다 싶었다.
-경아는 생활력이 강하지만 억척스럽지 않고, 자신의 자랑인 딸에게 헌신하지만 통제하려는 모습도 강하다. 경아 캐릭터가 어떻게 다가왔나.
=경아는 딸과 자신을 분리하지 못한다. 내가 연기를 통해 여러 번 경험한 모성과 닮아 있다. 경아가 내뱉는 말들은 딸을 걱정하기 때문에 할 법한 보통 엄마의 말이지만, 그게 딸에게 2차 가해가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실수기도 하다. 그렇지만 경아가 마음에 들었던 건 반성하는 엄마라는 점이다. 잘못을 인정하고 변화하는 엄마는 흔치 않다.
-김정은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나.
=낯선 경험이었다. 이렇게 디테일하게 작업한 적이 없었다. 한 장면을 찍을 때마다 감정을 더하기도 덜하기도 하면서 여러 컷을 나누어 찍었는데, 나중에 편집본을 보니 감독님 나름의 결이 있었다. 걷는 모습, 손을 쓰는 모양 하나까지 여러 번 시도하면서 감독님이 원하는 경아를 찾아나갔다. 체력적으로는 힘들었다. (웃음)
-경아는 누구나 자신의 엄마의 일면을 이입할 만한 캐릭터인데, 배우의 연기가 더해져 훨씬 ‘우리 엄마’처럼 다가온다. ‘우리 엄마’ 같다는 평은 어떤가.
=김해숙 선생님이 그랬다. “엄마를 제일 잘하면 되지, 엄마도 장르야.” 요즘엔 그걸 실감한다. 정말 다양한 엄마 역이 들어온다. 지금 촬영 중인 <더 글로리>에서는 이제까지 안 해봤던 멋진 엄마 역을 연기한다. 요즘은 대본도 좋고, 엄마라고 해도 옛날처럼 천편일률로 다루지 않는다. 물론 조금 더 내 서사를 가진 인물을 연기하고 싶긴 하다.
-여성 캐릭터의 변화를 누구보다 실감할 것 같다. 필모그래피를 보면 2000년대 초반에는 배역 이름도 없이 ‘담임, 마담, 부인, 맏언니, 처, 엄마, 모’였는데 점차 배역 이름을 갖는다.
=<오목소녀>(2018)에서 오목 고수 쌍삼과 <식물생활>(2020)의 화원 주인이 생각난다. 내가 이런 역도 해보는구나 싶어 감격했고 정말 재미있게 촬영했다. <내가 죽던 날>(2020)에서 현수(김혜수)의 직장 선배처럼 엄마가 아닌 역도 조금씩 늘고 있다. 단편 <자유로>(2017)도 영화 <델마와 루이스>처럼 두 중년 여성이 드라이브를 떠나는 이야긴데, 짧지만 감사한 경험이었다. 메릴 스트립이 한 인터뷰에서 “20년 전만 해도 나는 못생긴 노처녀나 마녀 역만 맡았겠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고 나는 그때는 못했을 연기를 하고 있다”고 했는데 굉장히 공감했다. 나이가 많든 적든 유명하든 아니든 우리는 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세상이 변하고 이야기가 변화하고 있다. 열심히 하면 기회가 오는구나 싶어 좀 행복하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가 그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자리였다. 한국경쟁부문에서 중년 배우들의 약진이 눈에 띄었다.
=전주에서 김금순 배우와 오민애 선배님을 만났다. 우리 왜 이제야 만났을까, 하면서 반가워했는데 스케줄 때문에 오래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금순 배우랑 ‘애들 몇살이야? 다 키웠네. 고생했어. 우리가 가장이다’ 이런 얘기를 했다. (웃음) 쉽지 않게 여기까지 온 걸 너무 잘 아니까 진심으로 반가웠다. 다시 만나면 지금까지 그만두지 않고 어떻게 버텼는지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떻게 버텼나.
=내가 31살에 <씨네21>과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아이 낳고 키우느라 30대에는 지인들끼리 공연 몇편 한 것 외에 거의 작업을 못했다. 남편 김학선 배우도 둘째 낳고는 3년 동안 직장 생활을 했다. 하나는 애 키우고, 하나는 직장 다니는 동안 연기하던 사람들과 연락이 서서히 끊어진 거다. 30대 후반쯤 아이가 유치원에 가면서 국립극단에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그땐 30대 여성이 맡을 역이 없었던 탓도 있을 거다.
-한창 일할 나이에 경력이 단절됐다.
=애를 보면서도 ‘나는 배우야. 애 키우고 나서 다시 배우 할 거야’라는 생각은 놓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정말 많이 했다. 나나 금순 배우나 알바 얘기 하면 끝이 없을 거다. 한식집, 일식집, 스파게티집, 다방, 호프집 서빙까지. 나중에 연극할 때 내가 이런 대사를 넣기도 했다. “중식은 안 해봤어. 중국집은 가족으로 운영되니까.” (웃음) 그렇게 알바를 하면서도 다른 직업을 가져볼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국립극장에서 연기를 시작했을 때, 어린이집에서 알게 된 엄마가 “연습 두달 해서 보름 공연하면 얼마 받아?”라고 묻길래 15만원이랬더니 “자기야, 자기는 진짜 예술가구나” 하더라. (웃음) 그때는 진로나 생계를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는 연기가 그저 재미있었다.
-연기의 어떤 매력이 진로도 생계도 제쳐두고 당신을 빠져들게 했나.
=현장에서 만들어가는 과정도 재미있고, 오디션 보러 가서 되면 재밌고, 안되면 왜 안됐을까 되짚어보는 과정마저 재밌었다. 그냥 젊어서 다 재미있게 느낀 것 같다. (웃음) 감독이랑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그땐 내 말이 다 옳잖나. 어떻게 이 장면을 그렇게 분석할 수 있어! 진짜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겁이 없었다.
-31살에 <씨네21>과 나눈 인터뷰에서도 그때의 패기가 느껴진다. “아무런 역사도 없이 누구누구 이모나 고모 같은 역을 하게 될까봐 두렵다”고 했다.
=거의 첫 영화라고 할 수 있는 <나쁜 남자>로 대종상 조연상 후보에 오르고 영화제에도 초대받고, <씨네21>과 인터뷰도 한 거다. 배우면 다 그 정도 하는 줄 알았다. 근데 그 뒤로 한번도…. (웃음) 지금도 자다가 일어나서 ‘이불킥’ 하고. 그때 더 성의 있게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할걸, 한다. 그땐 당연히 내가 원하면 그런 역이 오겠지 생각했는데 이렇게 긴 터널을 지나게 될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