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기획] 중년 여성 배우⑥ ‘정순’ 김금순, “나를 정신 차리게 해준 영화”
2022-10-17
글 : 조현나
사진 : 백종헌

“감정 전달이 잘 됐을 때 희열을 느낀다. 감독님이 모니터를 보고 ‘오케이, 너무 좋아요!’ 하실 때, 연극 무대에서 나를 따라오는 관객의 시선과 호흡이 느껴질 때 가장 즐겁다.” 중학생 때 참여한 연극 <작은 아씨들>을 계기로 김금순 배우는 고향 경남 진주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수많은 연극을 올렸다. 가정을 꾸리고 잠시 공백기를 가진 뒤엔 매체로 자리를 옮겨 연기 생활을 이어갔다. 10년이란 경력 단절의 시간이 무색하게 그는 현재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카트> <변호인> <달이 지는 밤> 등을 거쳐 만난 첫 장편 주연작 <정순>은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김금순 배우가 연기한 정순은 남자 친구 영수(조현우)가 유출한 동영상이 직장에 퍼지면서 삶이 완전히 어그러지는 인물이다. 김금순 배우는 정순이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럴 수 있다”는 김금순 배우의 너른 태도는 그의 필모그래피가 ‘엄마’란 단편적인 서사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인물로 포용하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영화 <브로커>와 <잠>, 드라마 <안나> <강계장> <카지노> <진검승부> 등 김금순 배우를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은 이미 여러 편 예정되어 있다. 누군가는 쾌재를 부를 삶의 상승 곡선 위에서도 김금순 배우는 쉽게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지금껏 그래왔듯 그가 만날 또 다른 캐릭터를 상상하며 가볍게 다음 발걸음을 내딛을 뿐이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정순>이 한국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축하한다.

=감사하다. 대상을 받으니 그간 고생한 게 전부 보상받은 기분이었다. <정순>이 호명됐을 때 모두 괴성을 지르다시피 했다. 감독님은 내게 쓰러져서 우시고 배우들도 다 울었다. 단상에서 감독님이 수상 소감을 말씀하시는데 같이 출연한 조현우 배우는 우느라 손이 흔들려서 엉뚱한 곳을 촬영하고, 김최용준 배우는 엉엉 울면서 올라가는 버스표를 취소했다. 우리가 하도 우니까 주변 배우들도 다 울고, 그 광경을 이준동 집행위원장과 관계자 분들이 웃으면서 쳐다봤다. 지금 생각해도 참 웃기고 감사한 기억이다.

-<정순>은 정지혜 감독이 먼저 캐스팅 연락을 줬다고 들었다.

=메일로 시나리오를 먼저 보내주셨다. 아프고 힘든 이야기이긴 한데 따뜻함이 느껴지는 좋은 글이었다. 무엇보다 첫 독립장편 주연작이라 가슴이 뛰었다. 당연히 하겠다고 했다. 50대 여성이 주인공이어서, 감독님이 적어도 30대 중후반 이상일 줄 알았는데 만나뵈니 훨씬 젊으셨다. 놀라서 어떻게 5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할 생각을 했냐고 물으니, 과거에 공장에서 일한 경험, 그리고 디지털 성폭력에 관한 선배의 논문을 본 경험 등이 토대가 됐다고 하시더라.

-정순이란 이름은 ‘마음이 곧고 정성스럽다’는 의미를 지녔다. 보면서 유순한 정순의 성격과도 무척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했다. 연기한 배우로선 정순을 어떤 인물로 받아들였나.

=일단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우리 세대의 특징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충분히 화낼 만한 상황인데도 그냥 웃어버리는 거다. 나도 기분 나쁠 때 화를 내는 대신 웃을 때가 많거든. 닮은 면이 많아서 뭘 꾸며서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정순과의 교집합을 잘 찾아내서 연기하려 했다. 그야말로 ‘금순의 정순이고 정순의 금순’이었던 거지.

-그렇게 밝던 정순이 자신의 영상이 유포된 것을 안 뒤로는 웃음을 잃은 채 집 밖으로 나서지 않는다. 그의 침묵이 더없이 안쓰러웠다.

=나라도 그랬을 것 같았다. 엄마들이 대부분 그렇지 않나. 남의 이야기는 잘 들어주고 하다못해 남편 욕도 스스럼없이 하는데, 정작 자기가 힘든 일은 쉽게 털어놓지 못한다. 나 역시 혼자 삭여온 순간들이 더러 있었고. 정순도 순간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을 거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딸이 곧 결혼을 앞뒀고 혼삿길을 막을 순 없으니 쉽게 죽을 수도 없었겠지. 그런 정순의 고민에 관해 생각했고 감독님과도 대화를 많이 나눴다.

-주로 어떤 대화를 나눴나.

=가장 많이 이야기한 건 정순의 연애에 관해서다. 결혼도 했었고 자식도 있지만, 또 새로운 사랑을 하고 그러다 배신도 당한 과정에 관해 말이다. <정순>이 워낙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 영화라서 감독님한테 “카메라 보고 소리 한번 지르면 안되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정순의 성품과 처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감정을 절제하는 지금의 방식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다시 공장에 돌아간 뒤로 정순은 유포된 영상에 나오는 같은 춤을 추고 같은 노래를 부른다. 물건을 집어던지며 화내는 것보다 훨씬 상징적이고 강렬한 신이었다.

=‘니네가 영상으로 봤던 것들, 내가 보여줄게’ 하는 마음으로 춤추고 노래했다. 정순은 살면서 한번도 그렇게 감정을 터트려본 적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디까지 감정을 드러내도 될지 감독님과 여러 차례 상의를 했다.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많은 관객이 정순이 기분 좋을 때 춤추고 노래한 장면과, 공장에서 악에 받쳐 춤추고 노래한 장면이 번갈아가며 연상이 됐다고,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고 말씀해주시더라.

-반면 집에 찾아온 영수(조현우)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화할 때는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정순이 복수와 용서의 중간 단계에 있다고 느낀 신이다. 법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건 딸이 다 해둔 상태고, 여전히 분노는 남아 있지만 생계를 빌미로 용서를 비는 영수를 보니 마음이 혼란스러운 거다. 영수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헛웃음을 터트리는 순간을 연기하는 것도 그리 녹록지 않았다. 딸의 이야기를 듣고 싱크대 앞에 주저앉아 우는 신도 그랬다. 엄마 소리가 절로 나오더라. 정순도 너무 힘들 땐 엄마가 필요한데 엄마는 없고, 딸은 본인이 엄마인 양 모든 걸 해결하려 한다.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도 내가 나이가 있어서인지 그런 상황들이 이해가 안되진 않았다. 살면서 그렇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꼭 생기기 마련이니까.

-첫 장편 주연작이고, 영화제에서 큰 상도 받아서 <정순>이 여러모로 의미 있는 작품으로 남겠다.

=나를 정신 차리게 해준 영화다. 그전까지는 단편영화를 하거나 한번 치고 빠지는 단역들 위주로 출연했다. 대본도 쪽대본식으로 나와서 짧으면 하루, 길어야 며칠 촬영하는 식으로 일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생계형 배우라고 생각하면서 지내왔던 것 같다. 그런데 <정순>을 기점으로 내가 연기자임을 자각했다. 긴 호흡으로 연기하니 나의 연기와 감정선에 관해 깊이 생각하게 되더라. 정말 애정도 많고 추억도 많은 뜻깊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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