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랫폼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영화를 드라마보다 우위에 놓는 구시대적인 편견도 자취를 감췄지만, 올해는 특히나 무의미해진 해였다. 대체로 기성 드라마 업계에 근간을 둔 제작사와 방송국, 감독과 작가의 오랜 구력이 힘을 발휘했던 작품들이 평자들의 선택을 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를테면 기존 드라마 스튜디오가 신인 작가를 발굴하거나 영화 스탭과 협업을 시도하는 등 전통적인 드라마 제작진이 미개척 영역의 재능을 흡수할 때 그 시너지가 더욱 빛났다는 점이다. 올해 시리즈 1위를 차지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2004년부터 TV드라마를 제작한 에이스토리가 <증인>의 문지원 작가의 가능성을 눈여겨본 사례다. 첫 16부작 드라마 대본을 집필한 작가와 <낭만닥터 김사부> 시리즈의 유인식 감독을 매칭시킴으로써 신인의 재능이 가장 잘 빛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다. 2위 <작은 아씨들>은 영화계의 정서경 작가와 류성희 미술감독이 2006년 MBC 입사 후 드라마 PD로 경력을 쌓아온 김희원 감독과 스튜디오 드래곤을 만난 작품이다. 3위 <나의 해방일지>는 현장과 데스크를 모두 오가는 에너지를 보여주는 김석윤 JTBC콘텐트허브 제작부문장이 연출했고, 4위 <옷소매 붉은 끝동>은 MBC 사극의 오랜 역사를 함께한 미술팀과 연출부, 편집기사 등이 참여했다. 5위권 내 영화감독 출신이 연출한 OTT 오리지널 시리즈는 <안나> 감독판이 유일하다.
6위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김은숙 작가의 보조작가 출신으로 커리어를 쌓은 권도은 작가가 두 번째 TV드라마를 선택한 김태리와 만난 작품이다. 젊은 배우들을 중심으로 “힘차고 건강한 기운을 지닌 캐릭터들과 그들의 성장 서사가 조화를 잘 이룬 청춘 드라마” (김현수)였다. “장르적 한계, 주조연 배우들의 인지도 등 넘어야 할 장벽이 많았음에도 <슬램덩크> <마지막 승부> 등의 레퍼런스를 포함한 매력적인 작품 컨셉 디자인이 대중의 마음을 움직”(김현수)이며 “1020세대 사이의 레트로 열풍을 한층 더 높였다”(이자연)는 반응이다. 한편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대부분 에피소드는 주인공의 10대 시절을 담고 있다. “올해 가장 활기차고 열광적인 청소년 드라마”(피어스 콘란)로서 “10대를 자기만의 욕구와 의지가 있는 주체적 인간”(이자연)으로 그려냈다는 평을 받았다.
7위와 8위는 티빙과 넷플릭스 시리즈, <유미의 세포들> 시즌2와 <소년심판>이 차지했다. “조금도 힘이 빠지지 않는 시즌제 드라마”(진명현)의 가능성을 보여준 <유미의 세포들> 시즌2는 “앙상블과 디테일이 만들어낸 훌륭하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한상 차림”(진명현)이다. “세포들을 구현한 애니메이션이 극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활력을 주는”(김송희) 연출력이 “동명의 웹툰을 드라마로 가져오면서 원작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영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영리하게”(김송희) 보여줬다. 또한 “인물의 성장 서사와 로맨스를 현실감 있게 잘 엮어낸”(조현나) 작품의 미덕은 “이전 시즌과 달리 OTT에서만 공개되고 현실 연애를 미화하지 않는 로맨스”(김송희)의 장벽을 극복해냈다.
<소년심판>은 “연출 수위가 자유로운 넷플릭스라는 플랫폼 특성상 주제를 자극적으로 다룰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곳을 향해 명확하게 분노할 줄 아는 미덕과 용기”(남지우)를 보여줬다. “단순히 아이들의 비행을 전시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점을 짚어내면서 이를 제재할 어른들의 역할과 양심에 제대로 초점을 맞춘”(배동미) 작품으로 “촉법소년이라는 예민한 사회적 이슈를 섬세하게 다룰 필요성을 대중에 피력하는 데 성공”(김현수)했다. 더불어 “불친절한 여성 영웅 피규어를 건조하고도 매력적으로 묘사”(김소미)한 여성 판사 캐릭터들, 특히 심은석 판사를 연기한 김혜수는 “캐릭터를 소화하다 못해 메시지까지 장악해내는 배우의 힘이 무엇인지”(남선우) 보여주었다. “실제 사회에서 불가능한 일을 재현함으로써 이루고 싶은 열망을 투영하는”(오진우) 최근 콘텐츠의 경향 속에서, “문제를 해결할 영웅을 외딴곳에서 찾는 게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 찾는”(오진우) 작품으로 <소년심판>을 읽는 의견도 있었다.
9위는 “작품의 완성도에 비해 대중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덜 조망”(박현주)됐지만 눈 밝은 평론가들의 선택을 받은 MBC 4부작 단막극 <멧돼지사냥>이다. “보통 사람들의 사소한 악의가 모여 잔혹한 거악이 되어가는 과정을 치밀하게 그린” (김선영) 시골 스릴러로서 “한번 무너진 윤리적 선이 어떻게 끊임없이 후퇴하는지에 대한 탁월한 고찰”(위근우)이 담겨 있다. 10위는 웨이브 오리지널 시리즈 <약한영웅 Class 1>이 차지했다. 학교 폭력은 이전에도 많이 다뤄졌지만, “인류가 과오를 되풀이하듯 같은 이야기도 재현할 수밖에 없다면 이 작품이 폭력의 순환과 고리라는 문제의식을 명징하게 그려낸”(김성찬) 미덕은 주목받아야 마땅하다.
과소평가 시리즈로는 “처절한 애정 관계의 파토스를 그려온”(김소미) 정지우 감독의 <썸바디>가 언급됐다. 대담한 노출이 자극적으로 소비되거나 선정성의 당위를 의심받는 과정에서 “폴 버호벤의 문제적 관능, 구로사와 기요시의 불온한 죽음들과 엮어 볼만한 뒤틀린 매혹” (김소미)을 품고 있는 작품의 진가가 가려졌다는 평가다. 올해의 시리즈 2위에 오르고 올해의 감독·스탭 부문에 꼽힌 <작은 아씨들>을 두고 “수작이지만 그 이상의 평가는 과장”(박현주)됐다며 과대평가 시리즈로 언급한 필자도 있었다. 특히 “‘돈’을 반복 호명하며 날 세우는 기세가 좋았으나 도무지 문제의식을 종잡을 수 없게 하는 전개와 결말이 아쉽다”(남선우)거나 “드라마 내내 밀고 나갔던 가난에 대한 담론은 협소하고 그에 대한 돌파구를 개인적인 레벨에서만 마무리하고 끝난 것이 전체적으로 일관성을 무너뜨렸다”(박현주)는 등 후반부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뤘다.
선정 대상 기간 내 케이블, IPTV,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최초 공개된 작품(한국 플랫폼 공개일 기준, 한국 프리미어) 중 최고의 해외 시리즈를 묻는 질문에 Apple TV+ <파친코>가 압도적인 득표를 얻었다. <파친코>는 “평범한 이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지우려 했던 야만의 역사 속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필부들의 대하드라마”(김선영)이자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운명”(오수경)을 가진 “여성 중심의 디아스포라 서사”(김소미)다. “지금까지 본 가장 감각적인 대하드라마다. 역사를 통감하게 하는 동시에 개인을 발견하게 하는 입체적 시간감각이 아름답다. 이 시리즈의 플로팅(ploting)에 천의무봉이라는 찬사를 보내고 싶다.”(남선우) “시네마틱한 화면, 개인적이지만 국제적인 이야기, 김민하라는 슈퍼 신인의 탄생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한 시리즈다.”(배동미) 이처럼 올 타임 베스트의 자리에 과감히 <파친코>를 포함시키는 의견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