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미국영화를 말할 때 제일 앞자리는 당연히 폴 토머스 앤더슨의 몫이다. 생각해보면 5년 전에도, 아니 10년 전에도 그랬다. 2017년 <팬텀 스레드> 이후 5년 만에 돌아온 앤더슨 감독은 <데어 윌 비 블러드>(2008), <마스터>(2012)에서 시도했던 역사의 뿌리를 더듬어가는 거대한 서사 작업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초창기의 활달함과 가벼움으로 돌아갔다.
1970년대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청춘의 설렘과 떨림을 따라가는 듯한 영화는 “무모한 꿈과 천진한 사랑으로 싱그럽게 요동친다”(박정원). 하지만 <리코리쉬 피자>는 어디까지나 앤더슨의 영화이고 “앤더슨은 무엇을 찍든 앤더슨”(홍수정)이다. <리코리쉬 피자>는 펑키한 러브 스토리를 풀어놓을 때도 시대의 초상을 반영한다. 1970년대, 미국의 자유가 폭발했던 시기의 낭만적 에너지는 마치 최후의 불꽃을 태우듯 치열하고 촘촘하게 스크린을 장식한다. 앤더슨 감독이 끝내 장면 위에 남기는 건 그 출렁이는 기억과 감정들이 끝난, 그다음에 다가올 미래다. 아니 지금 우리에겐 과거라고 하는 편이 적절할까.
<리코리쉬 피자>는 이제는 다시 오지 못할 미국의 아름다운 시절과 청춘의 싱그러움을 병치하여 역설적으로 오늘날 미국의 현실을 환기시킨다. 미국 신화의 기원을 좇았던 <데어 윌 비 블러드> <마스터>와는 다른 방식의 통찰인 셈이다. “자기 영화에 대한 가장 발랄한 도전이자 미국에 대한 가장 예리한 시각”(홍수정)은 그때도, 지금도 미국영화의 제일 앞자리가 앤더슨의 것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