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애플이 혼합현실 헤드셋 ‘비전프로’를 발표하자 삼성전자의 한 내부 관계자는 동료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정도 기술은 우리에게도 있어요. 아직 제품 출시를 안 했을 뿐이죠.” 애플의 신제품이 그다지 혁신적인 물건은 못 된다는 투였다. 그렇다면 애플과 삼성의 차이는 뭘까. 간단하다. 애플은 했고 삼성은 못했다는 거다. 비전프로는 애플이 개인 컴퓨팅 환경의 미래를 보여주겠다는 야심을 담은 제품이다. 머리에 쓰면 최대 30m 크기의 가상 화면에 입체영상과 증강현실, 상호 반응 콘텐츠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고글을 쓴 채로 주변 사람이나 사물을 볼 수 있고 우주 한복판이든 숲속 호숫가든 가상의 이용자 환경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있다. 기존의 헤드셋 기기들과는 몰입감에서 다른 단계로 나아갔다는 게 체험자들의 전언이다. 내가 주목한 이 기기의 특징은 보다 사소한(?) 데 있다. 비전프로는 사용자의 시선을 추적해 앱을 선택하고 이를 맨손으로 제어할 수 있도록 제작됐다. 향후 고글 형태의 번거로움을 개선하고 가격을 현실화한다면 포스트 스마트폰 시대를 열 새로운 방향이 될 수도 있어 보였다. 그러면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본 것 이상의 컴퓨터 사용 환경으로 우리 일상이 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극 중 톰 크루즈처럼 센서 달린 장갑 따위는 착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물론이다.
창조와 짜깁기의 차이
2007년 아이폰이 나오기 전에도 그랬다. 삼성과 LG는 관련 기술을 꽤 확보하고 있었다. 스티브 잡스가 이 세상에 없던 것을 뚝 떨어뜨린 게 아니다. 터치패널 밑에 기존의 휴대폰과 모바일 인터넷 기기, 콘텐츠 재생 기기를 모아놓았을 뿐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관건은 어떻게 연결짓느냐다. 대다수 한국 기업들은 시장 타당성이 확인돼야 의사 결정을 내리고 뒤쫓아간다. 이용자 경험 기반의 기술 개선은 그 이후에야 이뤄지기 때문에, 갤럭시는 한동안 아이폰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앞서 삼성 관계자의 말투로 미뤄볼 때 삼성은 앞으로도 미국의 선도 기업이 새 시장을 형성해놓으면 재빨리 뛰어들어 유사품을 내놓을 것이다. 한국 기업들은 지난 50년간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전략으로 선진 기술을 뒤쫓아 우리 경제를 성장시켜왔다. 그 공을 무시할 수 없다. 한국 국적 기업의 토대가 되는 시장 규모나 테스트베드의 크기 등 여러 환경 차이도 분명하므로 애플과 삼성을 단순 비교하긴 어렵다. 창의와 혁신만 내세우다 막대한 비용을 손해보기라도 하면 이를 적절한 경영이라 할 수도 없다(애플이 얼마나 탐욕적으로 이윤을 추구하고 스마트폰 중독을 방치하는 방식으로 돈을 벌어왔는지는 이 글과 별개로 논의할 문제다). 이건 산업·경영의 영역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이 누군가는 방향을 제시하고 새 영토를 개척한다. 이건 문화·문명의 영역이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은 그래서 신간 <창조적 시선>을 펴내며 이렇게 말했다. “애플은 창조, 삼성은 짜깁기.”
영화로 들어와 다음의 장면들을 보자.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대원들이 발사체를 수리하고 있다. 대장 격인 선임 대원은 농담을 일삼는 낙천적인 성격이다. 로프 한 가닥에 매달린 우주인이 외력에 떠밀리다 줄 길이가 다하면 퉁 하고 몸이 퉁겨진다. 아하, 사람이 우주에 나가면 저렇게 움직이겠군. 절체절명의 순간, 살 수 있는 대원만큼은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한 대장은 주인공에게 귀환을 당부한다. 그런 다음 우주 한가운데 점이 되어 사라진다. 카메라는 정면에서 헬멧 속 그의 눈빛을 지켜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우주선 조종법을 잘 알지 못하는 주인공은 홀로 선실에 남아 추위에 떤다. 중력이 희박하므로 흘러내린 눈물이 표류하듯 떠다닌다(이상 <그래비티> 얘기였다).
역시 임무를 수행하는 우주 대원들이 서로 놀리고 떠들며 농담을 나눈다. 갑작스런 사고로 주인공만 홀로 남는다. 관제센터에선 그가 죽은 줄 알고 추모사까지 발표한다. 가까스로 교신에 성공한 주인공과 우주센터 전문가들은 귀환 방법을 연구하며 원격 구조 작전을 펼친다.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폭발 참사를 빼닮은 한 차례의 발사 실패는 긴장감을 더한다. 의료용 스테이플러와 회색 덕트 테이프는 더없이 중요한 우주 장비다. 인근에 떠 있던 타국 위성은 주인공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도심의 대형 스크린을 올려다보는 시민들은 한마음으로 그의 귀환을 기원한다. 끝내 주인공은 최후의 일념으로 조그만 착륙선을 발사시키고, 마지막 순간 우주복만 입은 채 혈혈단신 허공으로 몸을 날린다(이상 <마션> 얘기였다).
달 표면에서 펼쳐지는 로버의 고속 주행 장면은 눈길 끄는 볼거리 중 하나다. 주인공이 달 분화구 아래로 추락할 때의 표면 질감은 실제 달에 와 있는 듯 현장감을 안긴다(이상 <애드 아스트라>). 정교한 조정으로 착륙선과 사령선 본체가 도킹에 성공할 때 우리는 안도한다(이상 <인터스텔라>)…. 그리고 이 모든 장면들이, <더 문>에 있다.
간절하게 2등이 되고 싶다
할리우드 팔로워를 대놓고 자처하는 한국영화들이 있다. 사실은 이 글도 <그래비티>나 <마션>의 장면들과 <더 문>의 그것들을 화면 2분할 영상으로 나란히 보여주는 편이 한결 효과적이지 않나 싶다. 말할 것 없이 영화란 산업 측면에서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필요도 상당한 분야다. 지난해 여름 대작 <외계+인> 1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맨 인 블랙>의 기초 설정, <어벤져스> 시리즈의 시가지 전투와 빌런 로봇 컨셉, <닥터 스트레인지>의 차원 이동 게이트와 <백 투 더 퓨처>의 시간 여행이 주는 이질적인 재미, <베놈>과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빌런을 섞어놓은 듯한 외계 괴물, <미션 임파서블>의 안무와 <스타워즈>에서 가져온 시대 설정…. 배경만 바뀌었을 뿐 이 모든 장면들이 <외계+인>에 있다.
제작비 약 350억원에 손익분기점 관객 700만명 선으로 알려진 이 영화의 최종 누적관객은 154만명에 머물렀다. 최동훈 감독은 이전 작품 두편(<암살> <도둑들>)의 관객수만 2570만명으로 한국영화 투자 1순위 감독이었다. 김용화 감독은 어떤가. 이전 작품 두편(<신과 함께> 시리즈)의 관객 합계가 2670만명이다. 홍보비 포함 300억원 이상으로 최소 600만명이 들어야 손익분기점에 이를 수 있다는 <더 문>의 누적관객은 개봉 일주일이 지난 현재 40만명 선에 그치고 있다. 이 추세라면 100만명도 어려워 보인다. 이것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2년간 선보인 당해 한국영화 최대 제작비 작품의 성적이다. 두 영화의 태도는 ‘미국 좀 따라하면 어때’라고 말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노골적이다. 한국 산업계에 잠재한 패스트 팔로워 유전자 같은 것이 들어 있는 듯한 인상이다. <더 문>의 도입부, 한국의 달 탐사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홍보 다큐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달에 발을 디딜 준비를 마쳤습니다.”
기술과 예술을 포함한 인류 문명은 앞선 성취를 딛고 나아간다. 할리우드의 성과를 차용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우리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앨프리드 히치콕도 보고 마틴 스코세이지도 보지만, 이를 짜깁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피카소는 “좋은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고 했다. 괜찮은 예술도 어디선가 빌려오고 따라한 결과인 경우는 허다하다. 문제는 맥락이고 필요다. 필요치 않은 것들끼리 맥락 없이 연결된 걸 볼 때 우리는 짜깁기라고 말한다. 더 큰 문제는 수용자의 눈높이 역시 앞선 성취를 딛고 올라선다는 점이다. 당신이 류승완 감독의 <짝패>를 봤을 때 특별하다는 인상을 받은 17년 뒤 유사한 구조의 <밀수>를 보고 평범함을 느꼈다면, <짝패>는 이전에 못 봤던 맛을 보여줬고 <밀수>는 아는 맛이었기 때문일 소지가 크다. 당신이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눈먼 자들의 도시>나 <미스트>가 엿보였더라도 이 영화에서 낯선 자극을 받았다면, 같은 재료라도 다른 방식으로 배합해 시의 적절한 맛을 낸 덕일 것이다.
그간 고품질의 우주 배경 SF를 적잖이 봐왔을 관객들은, 할리우드가 보여준 기술력을 한국영화도 구현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극장에 가지 않는다. <더 문>은 스스로 제시한 이미지와 설정의 필요를 설득하지 못한 채 조급한 호흡으로 이들을 나열한다. 그런 탓에 영화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전임 센터장(설경구)과 황선우(도경수) 사이에 흐르는 정서, 선우 아버지(이성민)의 비밀이 주는 비장미, 한국을 돕는 미국 항공우주국 간부를 굳이 한국계 여성(김희애)으로 내세워 감정 연결을 꾀한 기능적 설정 같은 것들이 뜻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이혼한 아저씨가 역경을 딛고 새로운 부자·형제 관계를 맺으며 해피 엔딩하는’ 서사를 우리가 얼마나 많이 봐왔는지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선진국이 됐는데요 선진국이 아니에요
<더 문>의 패스트 팔로워 유전자는 영화가 차용한 이미지에만 스며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 속 대한민국은 진리 탐구를 위한 우주 탐사도 산업 가치로 말하는 나라다. 극 초반 한국의 첫 유인 달 탐사선이 폭발하는 사고 이후 ‘그럼에도 달에 가야 하는 이유’에 대한 정부측 답변은 이렇다. “달에는 막대한 지하자원이 매장돼 있고 그중에서도 헬륨3는 인류가 1만년 동안 에너지원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세계는 달을 두고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죠.” 숭고한 음악과 함께 흐르는 과학기술부 차관의 이 한마디는, <더 문>의 국민들을 우주대원 3명의 희생은 물론 천문학적 세금을 치르고서라도 우주 광물을 채취하는 일에 동의하는 사람들로 만든다. 이미 펄펄 끓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류가 지난 수세기 동안 저지른 정복, 점령, 경쟁, 개발이라는 이름의 착취, 승자독식, 대량생산, 대량소비로 인한 생태계 파괴를 “1만년 동안 활용할 에너지원”을 기어코 가져와 계속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더 문>은 시작하는 것이다. 굳이 <아바타>의 생태주의적 세계관까지는 꺼내들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 영화에는 우주 탐사국들의 연합체에서 회원국 자격을 잃은 한국이 개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하는 각자도생의 논리가 있다. 빠른 속도로 내달려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 <더 문>이 할리우드의 뒤를 쫓는 이유와 겹쳐 보이지 않을 도리도 없다.
여기서 최근 한국영화에 이어지는 ‘구출 서사’의 맥을 짚을 필요가 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일종의 선진국형 서사라는 점에서다. <모가디슈> <교섭> <비공식작전>은 공히 개발도상국 시절의 한국 정부가 저개발·분쟁 지역에 납치·고립된 한국인을 구출하는 이야기다. 경제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에 올라선 시대에 나오기 쉬운 시나리오다. 개발국 국민들은 객석에 앉아 저개발 사회에서 고초를 겪는 내 나라 국민을 꺼내오는 이야기에 한층 가슴 졸인다. 이와 동시에 멀지 않은 과거 한국 사회의 비민주·비합리를 낭만적으로 회고한다. 근미래 구출 서사인 <더 문>은 유인 우주선을 내보낼 만큼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한국이 불모지에 고립된 한국인을 구하는 이야기다.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의 도시 문명을 누리는 관객은 불도 물도 공기도 없는 곳에서 표류하는 주인공의 처지에 이입할 준비가 돼 있다. 역시 부자 나라 국민이 아니라면 떠올리기 어려운 시놉시스다. 올여름 한국영화 대작 네편 중 두편이 전형적인 구출 서사를 쓰고 있다는 점은, 그래서 한층 통사적인 관점에서 기록해둘 만하다.
안타까운 점은 <비공식작전>의 김성훈 감독이 7년 전 내놓은 구출 서사 <터널>과는 여러 지점에서 대조되는 이유로, 최근의 한국 구출 서사들이 평평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터널>의 소재는 국내에서 벌어진 후진국형 참사다. 즉 우리의 모순을 성찰하는 이야기로서 풍성했다. <비공식작전>의 배경은 후진국으로 묘사되는 분쟁 지역이다. 즉 다른 사회를 대상화하는 이야기로서 부박했다. 이는 최근 한국의 범죄 액션작들이 자꾸만 동남아로 향하는 맥락과 무관치 않다. 개발국 시민들이 극장에서 즐기는, 저개발·비문명 사회에서의 위기와 역경. 그곳에서 한국인을 구해내라는 명령. 우주를 개발과 착취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더 문>과 함께, 선진국에서 나올 만한 시나리오들이 이처럼 밋밋해지는 흐름은 한국영화의 스튜디오 산업화 문제와 함께 한층 심각하게 다룰 사안이다.
20세기 개발도상국 방식
한국 경제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기까지 적지 않은 공을 세운 패스트 팔로워 전략은 20세기 산업자본주의에 기댄 측면이 강하다. 소니와 샤프가 고성능 제품을 만들어내면 한국 기업은 이를 열심히 뜯어보고 배운 다음 가성비 높은 제품을 내놨다. 후발 주자의 가격 경쟁력을 활용한 한국은 그렇게 수출로 먹고살았다. 이제 중국과 인도,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에 고도성장국의 자리를 내준 한국은 원하든 그렇지 않든 저성장 선진국형 경제 구조에 들어와 있다. 동시에 디지털 자본주의 체제로 급속히 재편하는 세계경제는 더이상 남이 해놓은 것을 빨리 배워 따라잡는 방식을 허용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글로벌 무대에서 시장 선점자의 승자독식 구조는 한층 공고해지고 있다. 국경 없는 자본주의의 국가간 시차는 사라지고 있다.
여기서 생각해보자. 만일 스마트폰 시대가 저물고 새로운 디바이스 시대가 열린다면 먼저 제품을 내놓지 못한 삼성은 망하게 될까? 삼성에는 빠르게 대처할 능력이 있을 것이다. 도산 위기는 삼성에 스마트폰 전용 부품을 납품하던 중소 협력업체에 닥칠 것이다. 한국 대기업들이 주도하는 패스트 팔로워 전략의 함정은 여기에 있다. 영화는 어떨까. 할리우드 대작들의 글로벌 동시개봉 흐름 속에서 세계 최초 개봉으로 영화를 접해온 한국 관객들은, 이제 어지간한 작품은 글로벌 OTT를 통해 시차 없이 보겠다는 태세다. 시간 격차가 불가피한 할리우드 팔로워 작품의 매력은 이 흐름 속에 잠겨버릴 것이다. 이런 와중에 더더욱 관객과 만날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는 소규모 영화들은 패스트 팔로워 전략의 함정 속에서 빛이라도 볼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재 한국 영화시장의 위기가 이미 그 결과로 드러난 것은 아닐까. 최근 한국을 대표하는 중견 흥행 감독들의 작품 가운데 기술적으로는 매끈해진 대신 내면적으로는 더 심심해진 사례를 자주 보게 되는 이유가 이 맥락과 무관할까. 지난해에 이어 한국영화 투자 1순위 감독들의 작품이 할리우드 팔로워임을 드러내놓고 자처한 끝에 흥행 참패로 이어진 풍경 앞에서, 영화 팬의 걱정은 커져만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