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La Strada, 1954
영화의 기념일을 챙기는 일은 지극히 시네필스러운 행동일 것이다. 올해로 70주년을 맞은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을 보며 이 영화의 탄생을 축하해주자. 어느 날 가난한 집의 딸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의 인생이 바뀐다. 돈 때문에 곡예사 잠파노(앤서니 퀸)에게 팔려간 것이다. 젤소미나는 북 치는 법을 익히고 세상의 진풍경을 목격하며 새 삶에 적응해나가지만 생각이란 걸 할 줄 모르는 남자와의 유랑 생활이 버거워 결국 도망친다. 그러다 다시 잠파노에게 붙잡히고 둘은 어느 서커스단의 일원이 된다. 잠파노가 일터에서 사고를 친 뒤에도 젤소미나는 서커스단측으로부터 여기 남아도 좋다는 제안을 받지만 거절한다. 대신 그를 따라나선다. <길>의 젤소미나는 전후 이탈리아 시대의 비운의 여성으로 해석되나 다시금 들여다보니 그의 주체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사람, 물건, 공연 할 것 없이 처음 본 것들에 진심으로 놀라워하고 매인 몸일지언정 자기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하는 그는 목적지 없는 길 위에서 종종 개척자의 얼굴을 한다. 무엇보다 <길>은 줄리에타 마시나의 영화다. 호기심 가득한 어린이처럼 표정과 육체를 자유자재로 쓰는 그는 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즐거움을 안긴다.
어디서? 네이버 시리즈온, 왓챠, 웨이브에서 볼 수 있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Leningrad Cowboys Go America, 1989
<사랑은 낙엽을 타고>를 본 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필모그래피를 파고 싶어졌거나 ‘아키 영화’가 그리워진 시네필에게 권한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의 이야기는 제목 그대로다. 춥고 황량한 핀란드 북부 툰드라 지대에서 활동하는 밴드 ‘레닌그라드 카우보이’는 갑작스레 미국으로 떠난다. ‘그렇게 형편없는 음악은 온갖 쓰레기들이 모인 미국에서나 통할 거’라는 얘기를 업계 관계자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낯선 미국 땅에서 기대에 부푼 채로 무대를 선보이지만 ‘당신네 음악은 멕시코에나 어울리니 그곳에 가서 내 사촌의 결혼식 연주나 해달라’는 의뢰를 바 주인에게 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멕시코로 향한다.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는 진지한 시네필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는 영화다. 그림자로 보아도 황당무계한 저돌적인 헤어스타일과 실용성 제로의 뾰족한 요정 구두를 보고 있노라면 카우리스마키 특유의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인물들과 달리 피식댈 수밖에 없다. 누가 뭐래도 쉼 없이 이어지는 그들만의 좋아서 하는 월드 투어는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어디서? 왓챠, 웨이브, 네이버 시리즈온에서 볼 수 있다(해당 플랫폼에서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다른 세 작품 <과거가 없는 남자> <성냥공장 소녀> <황혼의 빛>도 관람 가능).
<조용한 열정> A Quiet Passion, 2016
2023년 10월7일, 영국의 ‘영화 시인’ 테런스 데이비스 감독이 77살을 일기로 별세했다. 2016년작 <조용한 열정>은 현재 국내 OTT 플랫폼에서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그의 영화이자 뒤늦게 그를 기리고자 하는 시네필에게 기꺼이 권할 만한 작품이다. 19세기 미국의 대표 시인인 에밀리 디킨슨의 삶을 담은 전기영화다. 은둔자적인 생활을 해온 디킨슨의 유년 시절부터 죽음까지를 그가 남긴 아름답고도 고통스러운 시처럼 그려낸다. 디킨슨(신시아 닉슨)이 집단주의적인 기숙학교에서 자기 발언을 해 퇴출당하는 시퀀스로 시작하는 영화는 그가 56년 평생, 어떻게 ‘혼자만의 저항’을 수행해나갔는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여성을 억압하고 종교가 모든 걸 통제하는 시대에서도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남고자 새벽마다 펜을 들었던 예술가의 결연한 뒷모습을 카메라는 놓치지 않는다. 또한 시에 대한 갈급과 허기로, 가족의 죽음과 친구와의 작별로 격랑이 일었던 디킨슨의 내면을 시를 읊조리는 내레이션으로나마 가늠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하여 한 인간의 목소리와 영혼을 봉인하는 데 성공한 <조용한 열정>은 틈나는 대로 꺼내보고 싶다가도 쉬이 손댈 수 없는 영화로서 데이비스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자리한다.
어디서? 넷플릭스, 네이버 시리즈온, 왓챠, 웨이브, 티빙에서 볼 수 있다.
<태> 1986
올해 설이 하명중 감독의 <태>를 볼 적기인 까닭은 그의 둘째 아들인 하준원 감독이 설 연휴를 앞둔 2월7일 <데드맨>이란 영화로 데뷔하기 때문이다. 부자 감독의 작품을 엮어 생각하는 일은 시네필이 연휴를 즐거이 보내는 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태>의 배경은 1921년 일제강점기, 고립된 섬 낙월도다. 최 부자를 비롯한 악덕 지주들이 바다에서 잡은 고기를 빼돌리고는 흉어가 들었다고 헛소문을 낸다. 더욱 가난해진 주민들이 최 부자로부터 이잣돈을 꾸고 이 과정에서 최 부자는 섬의 우머리를 차지한다. 빚진 이들이 섬을 떠나거나 변을 당하자 섬사람 귀덕(이혜숙)과 종천(마흥식)은 터전을 되살리고자 분투한다. <태>는 척박한 땅에서 반복되는 탄생과 죽음으로 생동하는 영화다. 새 생명의 뿌리를 내리고 터전을 지키고자 몸부림치는 여성들이 낙월도를 뒤덮은 붉은 야생꽃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정일성 촬영감독의 야심으로 담아낸 섬의 아름답고도 두려운 풍광과 그곳만의 현실적인 풍속은 그 자체로 진기한 볼거리다.
어디서?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4K 복원판, 성인 인증 필, 무료)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