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대마경> 天国大魔境, 2023
설 연휴에도 방 침대에 포근히 누워 애니메이션에 자아를 의탁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천국대마경>을 시작으로 몇개의 애니메이션을 소개한다. <천국대마경>은 문명이 무너진 디스토피아풍의 일본을 배경으로 삼는다. 히토쿠이라 불리는 괴물이 사람을 잡아먹고 인간들은 서로를 잡아 죽인다. 히토쿠이를 사냥하는 보디가드 소녀 키루코는 소년 마루를 ‘천국’이란 미지의 공간으로 데려다주려는 중이다. 동글동글 귀여운 그림체, 두 소년 소녀의 산뜻한 애정 전선, 발랄한 모험극이 대번 첫눈에 띄나 속내는 기괴하다. 인간의 뇌를 타인의 신체에 이식하고 몸 절반이 잘리는 등 심심찮게 등장하는 신체 절단·합성의 모티프, 아이들을 실험에 사용하는 어른들의 행태, 적잖은 팬들에게 충격과 논쟁을 안긴 12화의 ‘그 장면’까지…. 감정의 완벽한 완급 조절과 신선한 플롯 구조 및 세계관을 고려하면 감히 2023년의 최고 애니메이션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어디서? 디즈니+에서 시청할 수 있다.
<도로로> どろろ, 2019
애니메이션으로 하염없이 시간을 휘발시키는 것만 아니라 진지한 철학적 고찰까지 얻길 원한다면 <도로로>가 좋겠다. 일본 만화의 아버지 데즈카 오사무의 고전만화를 원작으로 삼은 만큼 서로 죽고 죽이는 인간들의 야욕, 자식마저 희생시키는 국수주의의 폐해를 진지하게 드러내며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 사무라이의 전쟁과 약탈이 끊이지 않았던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영주의 아들인 햣키마루는 아버지의 욕심으로 인해 태어날 때부터 대부분의 신체와 감각을 잃고 버려진다. 의수와 의족의 검으로 중무장한 그는 요괴를 사냥해 원래의 몸을 되찾으려 하고, 부모를 잃은 아이 도로로와 만나 여행을 이어간다. 검에 절단되는 신체 이미지와 요괴에 무참히 잡아 먹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시시때때로 제시되긴 하나 <무사 쥬베이>만큼의 극심한 수위를 보이진 않는다.
어디서? 왓챠, 라프텔 등에서 시청할 수 있다.
<데빌맨 크라이베이비> デビルマン Crybaby, 2018
연휴에 날밤 새우며 뇌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싶지 않을 때 보기에 아주 적절한 작품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주요 레퍼런스로도 알려진 나가이 고의 만화 <데빌맨>을 리메이크한 애니메이션이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새벽을 알리는 루의 노래> 등으로 국내에도 인지도를 쌓은 유아사 마사아키가 감독했다. 그러나 그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같은 말랑말랑 감성을 기대했다간 큰코다친다. 작품에 사지 멀쩡한 신체보단 찢겨나간 살점이 더 많을 정도의 파격적인 폭력성과 선정성을 자랑한다. 정신적 폭력성도 상당하다. 악마들이 대대적으로 인간을 공습하는 와중 주인공 후도 아키라는 몸속에 악마를 품어 극강의 ‘데빌맨’으로 거듭난다. 한 고교생의 일상과 마음이 곧 세계의 명운을 쥐게 된다는 점에선 세카이계 작품의 원조라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아키라는 그의 삶에 있던 (상상 이상의) 모든 것을 잃게 되는데….
어디서? 넷플릭스에서 시청할 수 있다.
<소니 보이> サニーボーイ, 2021
연휴 중간쯤 애니메이션으로 조금은 고급스럽게 뇌를 자극하고 싶다면 <소니 보이>를 틀어보자.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 초현실적 서사의 흐름과 걸출한 사이키델릭풍의 O.S.T(한국의 인디 뮤지션 공중도둑이 참여해 화제를 끌기도 했다)가 어우러져 고도의 정신적 혼란을 초래한다. 어느 날 갑자기 중학교 건물이 이세계로 이동한다. 중학생들은 차원을 넘거나 마음대로 물건을 만드는 등의 초능력을 가지게 된다. 생존이나 복귀를 위한 고군분투가 진행될 법도 한데 작품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를 연신 발산하며 지연과 혼란의 미학을 발휘한다. 주인공들은 멋대로 해변, 사막, 심해, 우주 등의 공간을 옮겨다니며 부유한다. 공감각적 이미지와 사운드를 멍하니 즐겨도 좋지만 상징 하나하나를 맞추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봐도 재밌을 작품이다. 데즈카 오사무, 곤 사토시, 호소다 마모루가 거쳐갔던 제작사 매드하우스의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으로 원작은 없다.
어디서? 왓챠, 라프텔 등에서 시청할 수 있다.
<도로헤도로> ドロヘドロ, 2020
명절엔 가족들과의 행복도 만끽하지만 갖가지 스트레스도 받기 마련이다. 이 스트레스를 외부로 분출하고 싶다면 <도로헤도로>의 세계에 깊숙이 빠지길 추천한다. 신체 일부가 파괴되거나 변해버린 면모, 사람을 벌레만도 못하게 짓이기거나 부려먹는 윤리적 무감각이 작품 전반에 팽배한 다크 판타지물이다. <간츠>의 그로테스크함이 세배 정도로 구현되는데 사이사이에 이상한 코미디까지 가미하며 정신을 대놓고 홀린다. 세계관이 워낙 방대하고 단단하며 세계관의 비밀을 좇는 서스펜스의 작법도 탁월하다. 말초적 쾌감뿐 아니라 인간과 마법사가 각자의 능력으로 싸우는 능력 배틀물로서의 재미도 무척 즐겁다. 버섯을 맘 대로 부리는 마법이 세계 최강급의 능력이 될 수 있음을 의심하는 자라면 꼭 원작까지 확인하길 바란다. 원작 만화의 인기에 힘입어 1기가 만들어진 후 한참 동안 소식이 없다가 얼마 전 2기 제작이 공표됐으니 지금쯤 복습해봐도 좋겠다.
어디서? 넷플릭스에서 시청할 수 있다.
<아인> 亜人, 2016
민족 대명절의 온화함보단 빽빽한 거리 위 사람들의 싸움과 반목에 집중하는, 살짝 비뚤어진 시각을 갖고 있다면 <아인>이 어울린다. ‘인간의 끝도 없는 악의’ (<헌터x헌터>)를 극한으로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고교생 나가이 케이는 우연히 불사신으로 태어난 신인류 ‘아인’이다. 범정부 세력은 아인들을 잡아서 생체실험에 쓰려 하고 케이는 도망친다. <아인>의 생체실험 방식은 예측 밖에 있다. 끝없이 되살아날 수 있으니 끝없이 가해지는 물리적 고통을 보고 있노라면 오금이 저릿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충격적인 것은 아인들의 싸움이다. 세상 어느 때보다 자주 자신의 팔, 다리를 자르는 인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내 팔이 내 팔인지 네 팔인지 모를 정도로 반복되는 신체 절단, 그것을 자의나 타의로 이용하는 인간의 악의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원작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서사 분기점이 있으니 둘 다 확인해보는 것도 팁이다.
어디서? 넷플릭스에서 시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