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특집] 시의적절하게 섹시한, 제러미 앨런 화이트
2024-05-10
글 : 정재현

“올여름 가장 핫한 쇼엔 섹스가 없다.” 2022년 7월, 미국 뉴욕의 격주간지 <더 컷>에 실린 대니엘 코언의 칼럼이 화제를 모았다. 코언이 언급한 ‘가장 핫한 쇼’는 <FX>의 <더 베어>고, 한탄 중인 부재의 주체는 연애 경험이 없던 셰프 카미(제러미 앨런 화이트)다. “음란한 상상을 자극하는 대부분의 TV 캐릭터들과 달리, 카미는 섹스를 하지 않는다. 카미는 섹스리스로 살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베어>를 보는 동안 그와 섹스하는 상상을 단념하기 쉽지 않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의 셰프였던 카미는 친형의 사망 이후 가족이 운영하던 샌드위치 가게 ‘더 비프’에 투입된다. 카미는 어떻게든 식당을 살려보려 고투한다. 의외로 카미는 미디어에서 흔히 접한 셰프처럼 쉽게 분노하거나 윽박지르지 않는다. 다만 카미는 나직하게, 자신의 지시를 어떻게든 관철한다. 그가 주방 구성원들에게 바라는 유일한 대답 “예스 셰프”는 때론 상명하복의 요구로, 때론 애정과 감사의 표현으로 변해 동료들의 사기를 진작한다. 불안과 신경쇠약에 시달리지만 절대 고함치지 않는 셰프를 연기하기 위해 화이트가 참고한 배우는 의외로 고함 연기의 대가 알 파치노다. 화이트는 <백색 공포>(1971) 속 마약중독자로 등장하는 알 파치노의 불안을 카미에게 다져넣었다. 한편 카미가 느끼는 공포는 화이트 자신으로부터 가져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직업 배우의 길을 걸었던 화이트는 <더 베어>를 만나기 전까지 미국 <쇼타임>에서 시즌11을 방영한 드라마 <셰임리스>에 출연했다. 10대 후반부터 10여년간 한 작품에 몰두한 화이트는 어느 순간 스스로를 “배우가 아니라 <셰임리스>용으로 태어난 사람”으로 느꼈다고 한다.

위 칼럼이 언급하듯, 제러미 앨런 화이트는 지금 할리우드에서 섹시한 남자배우 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그를 ‘섹시한 남자’로 만든 데엔 캘빈 클라인 화이트 드로즈 팬티 광고 영상이 큰 공헌을 했다. 이 영상을 두고 수많은 리액션 릴스가 만들어졌고 광고를 촬영한 뉴욕의 시가지에서 인증숏을 찍는 문화는 힙스터의 관문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더 뉴요커>는 광고 공개 후 48시간 만에 캘빈 클라인에 1270만달러에 달하는 MIV(미디어 영향 가치)를 창출한 현상을 “페로몬 조각 그 자체인 제러미 앨런 화이트를 향한 대중의 반응은 호르몬 그 자체였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 광고는 ‘시의적으로 섹시한’ 남성상을 도출했다는 점에서 보다 정밀히 논할 필요가 있다. 유사한 반응을 끌어냈던 1992년 마크 월버그의 캘빈 클라인 광고와 비교해보자. 1992년 캘빈 클라인 광고는 <바스켓볼 다이어리> <부기나이트> 이전의 마크 월버그에게 섹시한 남성배우의 타이틀을 가져다줬다. 당시 마크 월버그는 득의양양한 미소로 함께 촬영한 케이트 모스를 ‘취하는’ 포즈를 취하며 섹시한 남성의 자리를 꿰찼다. (케이트 모스는 훗날 이 촬영 현장에서 겪었던 성착취에 대해 폭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화이트는 이 광고에서 여성을 전리품으로 갖지 않는다. 그는 오직 단독자로서 자신의 매력을 뽐낸다. 화이트가 표현하는 섹시함의 요체는 그의 신체 운용 능력에 있다. 그는 광고 속에서 자신이 탭댄스와 재즈발레에 능한 훈련된 댄서라는 점을 한껏 살린다. 그는 오로지 스스의 육신과 연기력만으로 관능을 표현한다.

정작 제러미 앨런 화이트는 섹시한 스타가 될 생각이 없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연기가 아닌 언더웨어 화보로 주목받는 사태에 대해 여러 차례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파파라치에게 주로 포착되는 제러미 앨런 화이트의 근래 모습은 할리우드 스타에게 기대하는 사생활과 거리가 멀다. 담배를 연거푸 피우거나, 하의만 입은 채 LA에서 러닝을 하거나, 댈러웨이 부인처럼 좌판에서 꽃을 한 아름 사들고 집에 들어가는 모습뿐이다. <더 베어>의 카미 역으로 에미상, 미국배우조합상, 골든글로브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화이트는 스스로 지금이 커리어의 정점임을 확신한다. 그래서 그는 스타 배우에게 요구되는 길을 의도적으로 우회한다. <더 베어> 이후 (아마도 마블 스튜디오로 추정되는) 슈퍼히어로영화의 빌런 역을 제안받았을 때 그는 제작자 앞에서 “내가 이 영화를 왜 해야 하는지 설명해달라”고 말한 뒤 원하던 답을 듣지 못하자 테이블을 박차고 나갔다. 화이트는 히어로영화 대신 A24의 중간 규모의 예술영화인 <디 아이언 클로>를 택했다. 현재 그는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뉴욕 브로드웨이로 향할 예정이다. 그가 의도한 바든 그렇지 않든 세간의 성공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길을 한결같이 독파하는 태도에 또 한번 섹시함을 느끼는 대중도 있을 것이다.

“이 조합에 속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앞으로의 인생도 이 조합에 속해 있다면 좋을 것같습니다. 제가 이 일을 너무 어린 나이에 시작해 지금까지 와서 대안이 없거든요.”

미국배우조합 회원들의 투표로 결정되는 미국배우조합상에서 <더 베어>로 코미디 부문 남우주연상을 받은 제러미 앨런 화이트의 수상 소감. 어느새 배우들의 배우가 된 화이트는 평생 배우로 살 작정이다. 화이트는 <더 베어>의 카미 역을 제안받고 한동한 고민했다. 카미가 <셰임리스>의 필립 갤러거처럼 노동자계급에 속한 역기능 가족에서 태어난 수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이트는 유사한 설정의 배역을 연이어 맡는 두려움을 이내 접어둔다. 카미를 놓치면 이 배역을 거머쥘 다른 배우를 배우로서 영원히 저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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