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아무것도 몰랐고, 모르는 게 좋았고, 모른다고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여행자의 필요> 이자벨 위페르
2024-05-09
글 : 김소미

한불 통역 하진화

- 한국에 온 프랑스 사람인 <여행자의 필요> <다른나라에서>뿐 아니라 자국에서 촬영한 <클레어의 카메라>에서조차 당신은 칸 방문이 처음인 파리 사람, 그러니까 여행자의 신분이었다. 홍상수 영화의 여행자가 된다는 것이 당신에겐 어떤 의미인가.

= <여행자의 필요>에서 이리스는 사람들의 감정을 옮기는 번역가라고 볼 수 있겠다. 프랑스어 과외를 하면서 그는 상대가 무언가를 스스로 말하게끔 한다. 언어를 배우는 동시에 그들 자신을 마주하는 법을 배우자는 것이다. 이번 영화에서는 언어 학습을 통해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드러내게 하는데, <클레어의 카메라>에서는 그 매개체가 사진이었다. 사진을 찍는 여행자는 상대방의 정신적인 무언가를 포착하곤 했다. 그러니까 나는 홍상수 감독과 작업했던 영화들 속에서, 영화마다 그 방식은 달랐지만, 늘 내 앞의 존재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여행자의 의미란… 여러 상황을 마주하고 감정을 드러내며 그 장소를 경험하는 사람. 남아 있을지, 언제 떠날지 모르는 사람. 그리고 같은 인간이지만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일 것이다.

- 이리스는 상대가 음악을 연주하면 자리를 피해버린다. 이때 그의 마음속에 어떤 충동이 일어나는 걸까.

= 이리스는 원래 외로운 사람인데, 또 그게 이 인물의 아름다움을 만들기도 하고…. 사실 나는 이리스의 머리 속에 뭐가 들어 있는지는 모른다. 확실히 아는 것은 이리스가 의외의 행동을 보여준다는 것, 계속해서 놀라움을 자아낸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시가 탄생하고, 그녀가 가진 수상함과 고독함은 배가된다. 홍상수 감독은 매우 특정한 방식으로 인간의 조건을 표현한다. 우리 모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이리스 또한 계속해서 타인과의 관계를 추구한다. 동시에 이리스는 스스로를 들여다보려고도 한다. 그래서 홍상수 영화 속 사람들은 그녀를 통해 자신의 비밀과 외로움을 드러내는 것 같다.

- 상체를 거의 움직이지 않으면서 묘연히 걸어가는 보행의 자세로도 각인되는 영화다. 걸음걸이와 제스처에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 홍상수 감독과 함께하는 영화에서는 내 걸음걸이가 조금 특별한 것 같다. 그와 함께한 세편의 영화에서 모두 신체적 언어를 사용했다. 느리게, 또는 빠르게 움직임으로써 몸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다. <여행자의 필요>에서는 홍 감독이 이리스가 마치 공중을 떠다니는 듯, 가끔은 주저하는 듯 걸어달라고 요청했다. 그 걸음걸이가 이리스가 처한 상황의 기묘함 같은 것을 말해준다. 내가 홍 감독과 작업하는 과정에 있어서 신체언어는 아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 걸어가는 배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자연히 신발에도 눈이 간다. <다른나라에서> 속 세 가지 정체성을 연기할 때도 제각기 구분되는 신발(샌들, 플랫 슈즈, 키튼 힐)을 신었다. <여행자의 필요> 속 신발과 의상은 어떻게 갖춰졌나.

= 홍 감독 영화의 의상을 고르는 과정에선 늘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 <여행자의 필요> 속 신발은 마드리드의 한 가게에서 촬영 며칠 전에 구매했다. 장 폴 살롬 감독과 함께 영화 시사회를 위해 스페인 마드리드에 방문했다가 살롬 감독이 한 가게를 소개해줬고 거기서 신발 한 켤레를 사서 파리로 가져왔다. 그리고 한국으로 출국하기 전날, <여행자의 필요>에 나오는 원피스와 초록색 카디건을 구매했다. 그러니까 나는 그때까지도 의상을 정하지 못해서, 비행기 출발 3~4시간 전에 집 근처 가게들을 돌아다닌 것이다. 그 끝에 영화 속 원피스를 발견하고는 바로 사진을 찍어 홍 감독에게 보냈는데, 그가 “이거예요, 완벽해요!”라고 하더라. 사실 처음에는 <다른나라에서>의 세 번째 파트에서 입고 나왔던 원피스를 다시 입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았었다. 아쉽게도 그 원피스는 더이상 내게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가 하늘하늘 가볍게 휘날리는 원피스를 원한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완전한 우연 속에서 신발, 옷, 그리고 가방까지 결정되었다. 그러고는? 한국에 도착했다.

클레어의 카메라

- 자꾸만 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이리스와 인국(하성국)이 침대에 앉은 채 맨발로 접지저항을 테스트하는 장면도 독특했다. 낯선 소품과 유머가 있는 순간이다.

= 소품 자체에 얽힌 별다른 느낌은 없었고 이 장면이 보여주는 이리스의 행동 양식이 재미있었다. 인국에게 발을 꾹 붙이라고 갑자기 거칠게 대하는데, 약간 강압적이고 권위적인 그 행동이 관계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듯했다. 다정한 한편 거칠기도 한 이리스의 모습을 알 수 있달까. 사실 그 접지 매트가 어떤 물건이었는지는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이리스는 여러 가지 경험, 혹은 초자연적인 실험을 하는 인물이기도 하니 소품이 곧 그런 면을 설명해주는 걸 수도 있겠다. 나는 이리스가 마녀나 요정같이 느껴진다. 인국은 물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어떤 실험을 하도록 이끄는 존재니까. 그건 마치 일종의 실존적 탐색과도 같다.

- 관객도, 극 중 인물들도 이리스에 관해 거의 알지 못한다. 배우인 당신은 이리스에 관해 얼마나 알 수 있었나. 캐릭터를 완전히 이해하지 않고 연기할 때 발생하는 자유로움은 어떤 것일까.

= 홍상수 감독과 일을 할 때는 늘 그렇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방식이다. 집을 떠날 때까지 앞으로 어떤 연기를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고, 촬영지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며 대사도 당일 아침에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이 하고자 하는 것들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건 매번 기적을 보는 것과 같다. 영화 속 시적인 요소들은 전부 그의 선택이었고, 조금 이상하면서도 신비로우며 과거조차 알 수 없는 여자인 이리스의 캐릭터 역시 그의 것이다. 영화의 모든 것들이 이리스만의 어떤 기묘함과 고독함을 느끼게 하는 영화적 장치인 셈이다. 이리스가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상대가 스스로를 드러내게 만든 것처럼 나 또한 영화를 촬영하면서 서서히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아무것도 몰랐고, 모르는 게 좋았고, 모른다고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 영어와 프랑스어로 대사를 하는 당신에게도 한국 배우들과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대본이 주어지는지.

= 똑같다. 다만 내가 이번에 조금 더 어려웠던 것은, <다른나라에서>와 <클레어의 카메라> 촬영 땐 보통 전날 저녁이나 밤에 대본을 받곤 했는데 이번에는 정말 촬영날 아침에 받았다. 대사도 양이 굉장히 많았다. 홍감독은 그렇게 촬영을 함으로써 일어나는 배우들간의 어떤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좋아하는 것 같다.

어행자의 필요

- 실내의 대화, 야외의 산책이 교차하며 이루어진다. 완성된 영화와 비교해볼 때 대부분 순서대로 촬영했다고 보나.

= 대체로 그렇다. 영화도 우리가 촬영한 순서대로 흘러갔던 것 같다. 첫 촬영이 젊은 여자 이송(김승윤)의 집에서 대화하는 장면이었고 영화도 그렇게 시작된다. 그런데 사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찍을 때는 촬영 순서가 영화의 순서와 일치하든 반대이든 상관이 없다. 전체 각본이 배우의 머릿속에는 없고 오직 감독의 머릿속에만 있기 때문에 어차피 알 수가 없다. 물론 감독은 편집점까지 이미 생각하고 있다.

- 실내 로케이션 촬영은 권해효, 이혜영, 하성국 배우의 실제 집에서 이루어졌다. 촬영 전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나.

= 아! 정말 즐거운 경험이었지. 그들의 집을 직접 방문해 촬영한다니 일반적인 프로덕션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일이다. 홍상수 감독이 준비해둔 기분 좋은 서프라이즈였다. 누군가의 ‘진짜’ 집에 가서 촬영을 한다는 것은 정말 ‘진짜’라는 느낌을 준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다 드러난다는 게 장면과 상황에 진실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 이리스는 길가의 돌 위에 앉아 있거나(포스터 이미지), 막걸리를 마시고 공원에서 잠들기도 한다. 특히 초점이 흐려진 익스트림 클로즈업숏으로 잠든 당신의 얼굴을 잡은 순간이 대단히 아름다웠는데.

= 잠들어 있는 장면에서도 특별한 디렉션을 받지는 않았다. 평소와 같았다. 그 장소, 그 바위 위에 누워 있을 때 나 ‘이자벨’로서는 완전히 낯선 곳, 알 수 없는 도시에 놓여졌음을 실감했다. 서울에 이번처럼 오래 있어본 적은 처음인데 정말 큰 도시라는 것도 알게 됐다. 촬영 장소는 주로 호텔과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서울의 북쪽인지 남쪽인지도 쉽게 감이 오질 않았다. 큰 도시 안에서 길을 잃은 것만 같았고, 도로를 달리면서 언제나 오래 이동했던 것과 이곳저곳에 공원과 산이 펼쳐진 자연적인 도시의 모습을 보는 것이 다 좋았다. 그리고 한 가지 고백하자면, 나는 막걸리를 엄청 좋아한다. 술을 잘 마시지 않는 편인데 막걸리는 정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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