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터뷰] 여성들이 서로 도와가는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다, <파문>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2024-09-05
글 : 조현나
사진 : 오계옥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는 여성영화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새로물 물결’ 섹션을 통해 세계 각국 여성감독들의 신작, 여성 주제의 화제작을 소개한다. <강변의 무코리타>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 <카모메 식당> <안경> 등으로 국내 관객들에게도 잘 알려진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이 신작 <파문>으로 한국을 찾았다. 쓰쓰이 마리코 배우가 연기한 요리코는 방사능 유출 사고로 인해 남편이 도망간 후, 녹색의 생명수를 숭배하는 사이비종교에 빠져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찾아온 남편은 자신이 암이라며 마지막을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다고 말한다. 요리코와 가족들의 행동을 통해 영화는 일본 사회가 마주한 문제를 다각도로 지적한다. 개막식에도 참석한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은 “한국 여성들의 에너지가 정말 강하다고 느꼈다”며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대한 인상을 전했다.

- <파문>은 전작들과 분위기나 주제 면에서 많이 다르다. 작품을 구상하게 된 계기는.

= 작품의 분위기가 달라진 데에는 내가 나이를 먹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파문>을 구상하게 된 건 집 근처의 종교 단체 시설을 보게 되면서부터다. 처음엔 어떤 장소인지 잘 몰랐고, 잘 차려입은 여성들이 많이 오가는 걸 보고 궁금해 찾아봤는데 종교 시설이었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의지할 곳을 찾아다니는구나 하는 생각에서 영화가 시작됐다.

- 남성 중심적인 일본 사회의 모습 또한 영화를 만드는 데 영향을 준 것으로 안다.

= 그렇다. 일본에는 여전히 남성 중심적인 제도와 성차별이 존재하고 이러한 상황을 영화에 메시지로 넣었다. 그런데 영화에서 성차별을 세게 드러내는 것은 너무 직접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수위를 조절했다. 한편으론 여성이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도 자립해 잘 살아가는 모습을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 동일본대지진과 방사능 유출 사고를 영화에 직접적으로 끌어들여왔다. 요리코와 주변 인물들이 재난에 대처하는 방식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난 지 10년이 넘었다. 그래서 아주 옛날얘기로 여기거나 더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아이가 있기 때문에 아직도 수돗물을 쓰지 않고 생수를 사용한다. 아베 총리 시절에 도쿄올림픽이 열렸는데 그때 방사능을 잘 통제하고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걸 들으면서 ‘웃기지 마’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재난 지역에는 아이를 잃고, 찾지 못해 힘들어하는 부모들이 있는데 그런 아픔에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면서 우리가 잘 통제하고 있다는 경솔한 발언을 하는 건 말이 안된다. 1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선 과거를 망각하지 않도록 다시 한번 이야기해보고자 했다.

- 주인공 요리코는 사이비종교에 의존하면서도 독립적인 모습을 보이는 독특한 캐릭터다.

= 지금까지는 영화를 만들 때 대체로 주인공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작업을 해왔는데 이번만큼은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느낌으로 진행했다. 내 윗세대에는 전업주부가 굉장히 많고 여성들이 전업주부가 되는 것이 당연한 사회였다. 하지만 나는 내 일이 있던 사람이라 당시의 전업주부들에게 좋은 인상을 갖지 못했다. 그런 시선이 요리코에게도 녹아들긴 했다. 그럼에도 요리코라는 인물의 다면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랑스러우면서도 심술궂고, 또 상냥한 모습들을 넣었다. 영화에서 요리코가 장애인을 차별하는 장면이 그 예시 중 하나다.

- 연대를 중요시하는 편인가. 전작에서도 인물간의 연대를 자주 보여줬고 <파문>에서는 요리코와 미즈키(기노 하나)가 서로 번갈아가며 도움을 주는 순간이 인상 깊었다.

= 확실히 내 영화에는 혈연이 아님에도 가족처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했다. 요리코는 항상 혼자 집에 있는 편이라 후반부에서 미즈키에게 우정을 보여주고, 여성들이 서로 도와가는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한두명의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 인물들이 말다툼하는 장면과 이들이 CG로 구현된 물의 파장 위에서 말다툼을 하는 장면이 교차편집된다. 감정을 더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방법이었나.

= 유년 시절 부모님이 싸우는 걸 볼 때 분노의 힘이 물결을 이루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이번에 그런 표현을 해보고 싶었고, 각본을 쓸 때는 인물들로 하여금 실제 물 위에서 싸우는 이미지를 생각했다. 그런데 편집 단계에서 교차편집으로 물 파장의 CG를 집어넣는 것이 더 드라마틱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듣고 그렇게 진행했다. <파문>이라는 제목이 보여주듯이 영화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가 물이다. 그래서 수영장도 나오고, 요리코의 정원도 고산수(일본 무로마치 시대의 정원의 한 형식.-편집자)식으로 꾸며져 있다. 인물들도 물의 파장 위에서 감정을 펼칠 수 있도록 했다.

-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등장하는 블랙코미디가 극을 환기시킨다.

= 사실 유머를 항상 노린다. 관객들이 내 영화를 보고 웃어주면 그게 무척 반갑다. (웃음) 요리코와 미즈키가 사우나에서 “남자는 봐주면 기어올라”, “되갚아줘야 해”라며 대화를 나눌 때 옆에 있던 남자들이 하나둘 떠나는 장면, 요리코가 남편의 칫솔로 세면대를 닦는 장면에서 관객들의 웃음이 크게 터져 나왔다. 그럴 때 굉장히 기쁘다.

- 후반부에 나오는 요리코의 춤은 <파문>에서 가장 통쾌한 장면이다. 비가 오는 와중에 춤추는 신을 롱테이크로 찍는 촬영이 쉽지 않았겠다.

= 영화를 통쾌하게 끝내고 싶었기 때문에 춤으로 마무리 짓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춤이 격렬하길 바랐다. 쓰쓰이 마리코 배우가 한달 전부터 플라멩코춤을 배웠다. 나도 촬영 준비하면서 따로 레슨을 받았는데, 플라멩코춤에선 발을 구르는 때가 있다. ‘내가 여기에 있어요’를 뜻한다는 그 의미가 <파문>과 완벽히 들어맞았다. 뭔가를 의도하고 플라멩코춤을 고른 건 아니었는데 그 말을 듣고 ‘대단한데, 나 천재인가봐’ 하고 생각했다. (웃음)

- <파문> 이후의 차기작이 벌써 완성된 상태라고.

= <마루>(‘마루’는 일본어로 ‘동그라미’를 의미한다. -편집자)라는 제목의 영화인데 일본에는 10월에 개봉하고 한국에선 그 이후에 공개가 될 듯하다. 무명의 예술가가 자전거를 타다 오른손을 부상당해 왼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는데, 그 그림이 미술계에서 엄청난 호평을 받고 세계적으로도 널리 이름을 알린다. 그런 이상한 작품을 하나 찍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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