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오디세이]
[이나라의 누구의 예술도 아닌 영화]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영화와 춤에 대한 몇 가지 생각
2024-12-18
글 : 이나라 (이미지문화 연구자(경희대학교 프랑스어학과 교수))
<블랙 스완>

때로 우리는 영화의 공간에서 춤을 발견한다. 우선 뮤지컬영화처럼 고양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춤을 빌리는 영화가 있다. 뮤지컬영화 속 배우의 신체는 ‘표현’하는 신체다. 이들은 전개되는 이야기의 몇몇 순간 일상적 몸짓을 멈추고, 솔로이든 그룹이든 리듬에 맞춰 ‘안무된’ 몸짓을 연기한다.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거나 혹은 양식화된 결투 장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뮤지컬영화 속 춤이란 사건과 심정을 표현하는 노래와 짝을 이루어 등장하는 무엇이다. 반면 노래를 빌리지 않고 춤, 곧 몸의 언어를 통해 직접 사건의 추이와 심정을 표현하는 춤의 영화도 있다. 스페인 감독 카를로스 사우라 감독이 만든 <피의 결혼식> <카르멘> <마법사를 사랑하라>와 같은 플라멩코 3부작 같은 영화를 예로 들 수 있다. 뮤지컬영화나 춤영화처럼 춤을 빌리고 인용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도 영화는 춤과 관계를 맺는다. 많은 장르영화가 극단, 무용단, 공연, 극장 등 춤과 관련된 소재를 다룬다. 장르영화는 춤이 가진 볼거리로서의 매력을 활용하고, 매력을 사고파는 엔터테인먼트나 예술계의 복잡한 욕망과 경쟁의 극단성을 서사적 자원으로 활용한다. 춤은 충분히 무의미한 채로도 화려할 수 있고, 폭발하는 환희와 영원히 결말을 지연시키는 경쟁의 드라마를 생산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영화는 춤의 이러한 가능성에 매혹당해왔다. 강박, 경쟁, 불안의 기색을 담은 심리드라마인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블랙 스완>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가스파 노에 감독이 무용단원을 배우로 기용해 외딴곳에서 공연을 준비하는 무용단이 공연을 준비하며 보내는 극단적 감각의 밤을 다룬 <클라이맥스>는 어떤가. 발레, 뮤직홀 댄스, 플라멩코, 탱고, 스트리트댄스처럼 이름을 가진 춤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훈련받지 않은 인물의 춤을 보여주며 몸의 언어가 지닌 다채로움을 강조한다. <마더>를 닫는 김혜자의 춤, 조화롭지 못한 사지의 움직임과 무표정한 얼굴은 어떤가. 마치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속에서 침묵이 말의 공백이 아니라 격렬한 말하기인 것처럼 김혜자의 춤은 춤을 어그러뜨리며 어떤 춤보다 격렬하게 웅변한다.

<클라이맥스>

영화와 춤은 때로 더욱 내밀하다. 시간과 공간의 예술로서 영화는 춤 없이 춤이 될 수 있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춤이 되면서 공간의 예술이라는 숙명, 운동과 신체성이라는 존재의 양식을 경험하고, 실험하고, 사유한다.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예술이 영화 같은 춤, 회화의 음악성을 보여주려고 애썼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1969년 무용수, 안무가이자 아방가르드 영화 작가였던 에이미 그린필드는 <필름 메이커스 뉴스레터>에 “영화와 춤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동시에 전개되는 유일한 형식이다. 이 점으로 인해 공통 언어를 형성할 수 있는 단단한 바탕이 마련된다”고 적었다. 이렇게 적으면서 그린필드가 기대한 것은 사실 영화를 통한 무용 언어의 확장이었다. 무용수는 인위적으로 제한된 공간에 익숙한 탓에 공연장으로 자신의 공간을 제한하는 반면 영화는 극장과 무대의 공간적 한계를 제거하는 예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춤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동하면서 인간 신체의 형식을 취하는” 에너지라면 “영화 같은 춤”은 “오직 유화제 위에서 포착되고, 몽타주에 의해 조직되며, 영사를 통해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면서만 존재하는 신체의 운동에서 비롯되는 에너지다”. “영화와 같은 춤”은 그린필드처럼 영화에 열광했던 아방가르드 무용가의 구호이기도 했다. 이들은 영화적 편집을 통해 무용수가 존재하고 있는 시공간의 통일성을 깨트리는 마야 데렌의 <카메라를 위한 안무연구>에서 “영화와 같은 춤”의 사례를 발견했다. 이들은 무용수 텔리 비티가 동일한 시간 동안 공간 속의 여러 상이한 장소를 점유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편집한 데렌 영화의 불연속적인 공간성에 열광했다. 그런데 자크 랑시에르가 <영화 우화>에서 아방가르드 영화감독이자 이론가인 장 엡스탱의 논지를 인용하며 언급하듯, 영화의 역량에 대한 이러한 기대는 우리를 갸우뚱하게 한다. 마야 데렌의 영화처럼 춤추는 몸과 공간의 관계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영화는 극히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영화산업의 논리에 포획된 영화는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시공간을 효율적으로 배치하는 문법을 추종한다. 크리스티앙 보르헤스는 영화와 춤의 공통 언어를 연구한 글에서 “영화 같은 춤”이라는 개념과 함께 “춤과 같은 영화”라는 개념을 제안한 바 있다. 가령 장 엡스탱의 다음 구절 속에서 영화적 공간은 춤의 공간이다. 코드화된 움직임이자 단련된 신체의 조율로서의 춤이 아니라 ‘흐름’으로서의 춤의 공간이다. “영화적 공간은 유클리드적 조직의 엄밀한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 구성되고, 배타적으로 인간의 비율을 따를 것을 거부할 뿐 아니라 원근법의 단일 중심이나 어떠한 단일 척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 영화적 공간이 만일 동질성과 대칭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면 이는 영화적 공간은 운동 중인 공간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혹은 더 잘 말해보자면, 영화적 공간은 유클리드적 공간처럼 안정된 형식의 잘 정해진 위치가 조성한 공간이 아니라 형식에서도 유동적이고 유체적인 것으로 행동하는 유령의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이동이 조성한 공간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장 엡스탱, <알코올과 영화>) 춤과 같은 영화란 스크린을 단순히 탱고, 플라멩코, 민속무용, 발레의 익히 알려진 장면을 펼치는 새로운 무대로 간주하는 대신 우연을 허용하는 이동 속에서 신체의 공간을 연출하고, 신체의 홀연한 출현과 사라짐을 가능하게 하는 영화이고, 스크린을 “춤출 수 있는 표면”(크리스티앙 보르헤스)으로 만드는 영화다.

<마더>

하지만 “춤 같은 영화”는 정말 시공간과 신체성의 표현 가능성을 실험하는 영화이기만 한 것일까? 사유를 촉발하는 감각의 실험이란 말은 이제 공허한 구호로 존재하게 되지 않았을까? 컴퓨터 생성 이미지 시대의 관객, 맥락을 거세하고, 갑작스럽게 삭제하고 삭제되는 데이터의 출현 방식이 무겁고 단단한 물성의 존재 방식을 대체하는 시대의 관객에게 모든 표면은 춤출 수 있는 표면, 놀이할 수 있는 표면, 무의미의 표면이지 않은가? 실험영화 감독 스탠 브래키지는 <필름:댄스>라는 글에서 카메라로 신체의 운동을 다루는 것을 이미지를 얻는 일로 다루는 대신 감각을 깨우고, 카메라의 무게를 위해 근육, 관절을 준비하며, 촬영하는 동안 자신의 생리적 반응(reaction)을 거쳐 자세의 균형을 유지하는 실행(exercise)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일로 다룬 바 있다. 그는 이때에야 의미심장한 편집 과정의 액션(action)을 기다릴 수 있다고 적었다. 아이돌 무대를 찍는 카메라의 현란한 무빙을 모방하려는 이들이 손에 쥔 가벼운 스마트폰을 이리저리 움직인다. 춤과 몸은 이제 우리에게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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