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불황이다. 업계를 진단하는 키워드는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예년 대비 불황보다는 변화와 극복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더 커졌고, 매년 순위가 상승했던 AI는 2025년 트렌드 1위에 등극했다. 글로벌(글로컬라이제이션), 가성비, 숏폼, 플랫폼 전쟁 등의 키워드 역시 전년보다 언급 수가 올라갔다. 그리고 올해는 질문 하나를 더 추가했다. 너무 많은 플랫폼, 너무 많은 콘텐츠 속에서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유행을 점치는 것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제 사람들은 영화 대신 시리즈만 본다던, 혹은 숏폼이 소비의 중심이 될 것이라던 전망이 꼭 적용되지도 않았다. 그때그때 대중의 선택과 트렌드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하게 작동하는 요인이 무엇인지 물었다. 원론적인 답변부터 꽤 구체적인 인자를 짚는 이들까지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영상 콘텐츠 업계의 의사 결정권을 쥔 산업 리더 52인이 꼽은 2025년 업계의 핵심 이슈를 키워드별로 정리했다(설문 참여자들의 멘트를 직접 인용하여 재구성하되 멘트별로 당사자의 이름을 직접 기재하지는 않았다).
변화와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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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지형도에서 위기는 이미 주어진 기본값이다.” 지난해 한국 엔터테인먼트산업 전망에서 지적했듯, 업계 불황은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극장용 영화와 극장용이 아닌 영화의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고 일방적·수직적인 영화나 시리즈와 달리 짧고 빠른 반응이 오는 숏폼 등이 부상하고 있으며 이제는 과거와 달리 영화에 대한 선호도, 애정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그 결과 “어떤 방향으로 향후를 대비해야 할지 모두가 혼란”한 시기를 거쳤지만 2024년은 구체적인 전략을 모색하고 극복 가능성을 논한 해였다. “기존의 투자·제작 그리고 플랫폼 지형도가 붕괴”하면서 “파부침주”(破釜沈舟,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자세로 리빌딩에 들어간 플레이어들은 “관객의 취향에만 맞추는 안이한 기획을 대체할 돌파구”를 찾아나가고 있다. 올해는 “불황 이후 수요와 공급의 밸런스가 다시 맞춰지”고 “엔터테인먼트산업도 나름의 조정기를 거치면”서 전반적으로 위상을 재정립하게 될 것이다. 극장가는 “코로나19와 OTT의 영향으로 인한 극장가의 변화가 반영된 ‘포스트 코로나 영화’들이 본격적으로 개봉되기 시작하는 시기”이며 드라마 업계는 “수익 구조의 변화에 대응해 어떻게 생존할 것인지” 주목된다. 전체적으로는 “극장에서 OTT, 모바일 숏폼 콘텐츠로의 전환”, 더 나아가 “디바이스와 플랫폼, 장르, 소비 패턴. 해외 진출 다변화”가 이행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예측 가능성이 담보되는 원천 스토리 IP 확장”의 일환으로 스핀오프나 “후속 시리즈” 내지는 “쇼츠로의 트랜스미디어 가능성”을 점치는 콘텐츠들을 더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드라마 업계에서는 16부작에서 8부작, 10부작, 12부작 등 이야기의 소재와 특성에 맞춘 회차 다변화 흐름 역시 가속화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작품은 관객이나 시청자들보다 앞서나가야 한다”면서 “리메이크와 후속편에 질린 관객이 독창적이고 새로운 이야기를 기다리지 않을까”라고 점치는 목소리도 있었다.
세대교체
“기획자, 제작자, 감독, 프로듀서, 배우 등 업계 전반에 걸친 세대교체의 원년이 될 한해다.” 한국 엔터테인먼트산업 전망 설문 결과에서 알 수 있듯 세대교체의 경향은 이미 뚜렷하다. “기존의 생태계와 면역체계를 완전히 바꿔놓은 코로나19 팬데믹이 기폭제가 되어 유의미한 변곡점과 실적을 만든” 2024년을 지나 올해는 “새로운 스토리, 새로운 캐릭터, 새로운 연출, 새로운 얼굴, 새로운 마케팅 방식”이 본격적으로 등장할 것이다. 이를테면 “파격적인 설정으로 대중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웹툰, 웹소설 원작 작품들이 예상을 뒤엎고 큰 인기를 얻었”던 점을 떠올리면 “회귀, 판타지 등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대표 얼굴이 필요”하다.
개인화와 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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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수많은 대중이 열광하는 하나의 콘텐츠가 나오기 쉽지 않은 것 같다.” 콘텐츠 과포화 시대에 관객은 콘텐츠보다 더 빨리 변화하고 있다. “개인의 취향과 관심사에 맞춘 콘텐츠 소비가 대세”다. “나의 취향, 나만의 것, 나만의 세계를 중요시하고 드러내고 싶어 하는” 분위기 속에서 올해 “애니메이션이나 로맨틱코미디, 게임의 영상화나 스타에 집중하는 경향이 커질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렇게 “기존 산업을 뒤엎는 새로운 세대,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들의 기호를 강하게 드러내며 “주제, 소재, 하드웨어를 가리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방향성을 요구”한다. 학습효과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기술과 소비자의 다양성이 어떻게 결합”할지 살펴야 한다.
인공지능
이번 설문에서 가장 압도적인 언급량을 자랑하는 키워드는 ‘AI’였다. “다소 멀게 느껴졌던 인공지능을 활용한 콘텐츠 제작이 가속화됨에 따라 관객의 생활에 가깝게 들어오는 한해”가 될 것이다. AI는 이미 “자료조사, 로케이션 헌팅, 컨셉 이미지와 콘티 제작, VFX, 시나리오 작성, 영상 편집, 사운드 믹싱 등 다방면에서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플레이브를 위시한 버추얼 아이돌도 AI 기술의 발전 덕분에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앞으로도 “생성형 AI 기술의 발전은 창작과 시청 경험 전반을 변화”시키고 “영상 제작 방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며 “새로운 서사적 지평을 열기 시작”할 것으로 예측된다. 기본적으로 산업 종사자들은 AI를 인간의 대체자나 경쟁자가 아닌 미래의 “크리에이티브 파트너”로 기대하고 있었다.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며 “영상 완성도를 높이”고 “제작 효율 및 크리에이티브에서 어떻게 혁신”을 이룰지 “게임 체인저”로서의 귀추가 주목된다. 물론 여기엔 “수익화 모델에 대한 고민”도 결부되어야 한다. 한편 “젊은 작가들의 신선한 시각을 AI 파일럿 콘텐츠로 쉽게 선보이고 그로 인해 완성도 높은 영상들이 대량 생산”될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미래를 점치는 응답자도 일부 있었다. “자본의 발탁을 통해 데뷔하는 절차보다는 자신의 콘텐츠를 먼저 소개해 주목받으면서 협업을 이끌어내는 1인 창작 시스템의 선택지”가 가능하다는 의미다.
글로벌과 글로컬라이제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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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콘텐츠 시장이 크게 축소된 상황에서 해외 세일즈, 나아가 제작 인프라 활용과 공동제작 등 글로벌 시장으로 저변을 확대”하는 것은 이제 당연한 일이 됐다. “아시아권에서 결과를 낼 수 있는 콘텐츠 제작”은 물론 “풍부한 K드라마 IP를 활용해 미국 등 현지 크리에이터들과 함께 드라마를 만드는 일이 새로운 기회”라는 시각이다. 이젠 글로컬라이제이션(세계화를 의미하는 ‘글로벌라이제이션’과 지역화를 의미하는 ‘로컬라이제이션’의 합성어)의 시대다. 플레이어들은 “단순히 한국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것을 넘어 각 지역의 문화적 코드와 정서를 적극적으로 반영한 콘텐츠를 제작하고 동시에 한국 고유의 창의성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런어웨이 프로덕션을 통한 비용 절감, 현지화 아이돌 그룹, 각 나라의 문화와 취향에 맞는 콘텐츠 제작” 등 보다 밀접한 전략이 필요하다.
레트로와 무해력
“자극적이고 유해한 것들로 가득한 현대사회”에서 “무해하고 평온한 일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시장은 늘 틈새시장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2024년부터 이어진 정치 상황이나 세계정세”는 더더욱 “선인주의나 착한 캐릭터, 따뜻한 유머, 순수한 사랑과 정의로운 스토리”를 트렌드로 이끌 가능성이 있다. “힐링을 넘어서 무해함을 주거나 내가 동참할 수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경향은 “프로야구, 각종 밈, 아기자기한 소품의 인기, 저속 노화에 대한 관심”과도 맞닿아 있다. 단순하게는 “별 고민 없이 유쾌하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로 접근할 수도 있겠다. 정반대로 “공동체를 통한 해결을 기대하지 않는 사회구성원들이 각자도생에 몰두”하며 “내면 지향적 도피성 자아 찾기”를 지향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한편 노년층이 늘어나면서 과거를 향한 노스탤지어를 담은 콘텐츠 역시 각광받고 있다. “신선한 이야기보다 검증된 이야기를 재창조”하는 레트로 유행이 계속 이어진다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플랫폼과 무경계
“영화, 시리즈, 도서, 음악, 팟캐스트, 쇼츠 등의 플랫폼은 한정된 시간을 두고 더욱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다. 플랫폼 선택을 받기 위한 경쟁 속에서 “웨이브와 티빙의 합병, 넷플릭스와 SBS의 협업 등 플랫폼간 합종연횡도 가속”되고 있다. 어느덧 “극장 산업에서 공연·콘서트 실황 영화는 중요한 축”이 됐다. 그 결과 국경과 미디어의 경계도 무너진다. “유튜브와 라이브 방송을 통해 개인도 무엇이든 가능”한 데다 “OTT 플랫폼 중심으로 언어와 문화를 초월한 경계 없는 스토리텔링이 필수적인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숏폼과 가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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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업계에서 제작비 절감이 화두로 떠올랐다. “적정 제작비와 그에 맞는 시나리오 분량, 주연배우 개런티 조율 등 사업적으로 질적으로 뛰어난 작품을 기획해서 투자자들의 니즈에 맞춰 손해보지 않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 관건이 된 가운데, <선재 업고 튀어>는 그 성공 사례다. “<선재 업고 튀어>는 제작비와 예산이 반드시 화제성과 대중성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앞서 언급한 AI의 상용화 역시 “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고퀄리티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맥락 위에 서 있다. 소비자들 역시 “고물가, 장기불황”이 지속되고 “거의 모든 부분에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다양해진” 시장에서 “시간과 돈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만족도를 따지며 소비를 결정한다. 때문에 “블록버스터영화 옆에 쇼츠 드라마가 나란히 놓이는 상황”도 벌어진다. 이같은 맥락에서 업계인들은 아직 눈에 띄는 대표작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올해는 지난해보다 업그레이드된 작품이 많이 나올 전망”이라며 숏폼 드라마의 향방을 주시하고 있다. 숏폼 드라마는 “기존 영화, 드라마 산업이 매체의 한계로 양적성장을 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저예산, 고효율을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유튜브 쇼츠나 틱톡이 많은 유의 콘텐츠들을 집어삼킨 가운데 과연 숏폼 드라마가 고전적인 드라마투르기에 있어서도 유효”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헤게모니를 바꿀 만한 킬러 콘텐츠, 이를테면 웹드라마 시장의 <에이틴>과 같은 킬러 콘텐츠가 등장해야 할 것”이다.
바이럴마케팅과 알고리즘
물론 “기획과 시나리오의 재미와 완성도”가 가장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 “모바일과 숏폼 콘텐츠 소비가 증가”하고 “비스토리 콘텐츠가 시장을 장악”하면서 “전보다 속도감을 주는 구성”이 선호되고 “경계 없는 공생 비즈니스가 확산”되는 경향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스토리 산업은 신선한 콘텐츠를 정기적으로 공급”하며 굴러가야 한다. 때문에 “영화, 드라마 업계 모두 ‘물량 경쟁’에서 ‘웰메이드 경쟁’으로 넘어가고” 있다. “숏폼의 소비적 만족감을 넘어서는 충만감”을 주기 위해서는 “독창적인 컨셉을 구사해낸 시나리오와 극본 그리고 이를 구현할 연출력”이 필요하다. “익숙하면서 다른 것”을 추구하는 대중의 심리를 고려해 “보편성을 기반으로 하되 참신한 아이디어”를 고안해야 한다. 여기에 “시대정신과 맞닿은 이슈를 선점”하고 “다변적이고 공감의 저변이 넓은 가치”를 통해 “대중의 공감”을 받을 수 있다면 아주 파급력 있는 콘텐츠가 탄생할 수 있다. 매체별로는 “영화는 극장에서 몰입해서 보는 매체인 만큼 작품성, 완성도를 중요시하고 시리즈는 영화보다 가볍고 친숙한 캐릭터를 선호하고 인물 서사를 중요하게 본다”는 차이를 짚어낸 응답자도 있었다.
그렇다면 잘 만든 콘텐츠가 이를 알아볼 수 있는 소비자를 만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지금은 “대중의 취향이 다양해진 초개성화, 탈집단화 시대”다. “비주류가 주류로 떠오르”고 “마이너로 평가받던 것들도 의미 있는 평가를 받을 수” 있기에 “타깃에 집중한 기획이 불가피”하다. 마케팅 면에서는 “AI 기반의 추천 알고리즘”을 고려한 “고도화된 개인화 전략”을 추구하는 것이 추세다. 지금 대중은 “레거시 미디어의 ‘빅 스피커’가 아닌 지역 커뮤니티, 유튜브, 인플루언서, SNS 등 나와 비슷한 연령대 혹은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는 집단의 검증”을 중요시한다. 아무리 잘 만들어도 “첫인상과 초반 반응의 임팩트가 약하면 트렌드를 형성하기 어렵”다. 그래서 “소위 요즘 흥행 중인 콘텐츠에 대한 인지를 SNS 바이럴로 빠르게 확산시켜 젊은 대중을 사로잡고 콘텐츠 선택으로까지 이어지게 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지금 산업에서 “주요 기획에서 마케팅까지 주도하는 인력이 20~40대 여성”이며 그들은 “20~30대를 대상으로 한 SNS 및 커뮤니티 마케팅을 통해 <선재 업고 튀어>와 <소방관>을 성공”시켰다. 그렇게 “타깃층에서 발화된 인기와 SNS 마케팅이 일정한 발화점 이상의 온도를 만들어내며 확산되면 극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