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감독의 차기작 제목은 <스캔들-조선시대 남녀상열지사>다.여기서 ‘조선시대’와 ‘남녀상열지사’라는 말은 서로 모순이다. 인터넷 검색엔진에 두말을 함께 처넣으면 화면에 뜨는 사이트의 거의 전부가 이런 내용이다. 조선시대 학자들이 고려 속요들을 악보에 수록하면서 상당수의 노래를, 남녀상열지사를 다뤘다는 이유로 배제했다는 것이다. 마치 ‘음란폭력성매체 대책 시민협의회’(음대협)와 영화 <거짓말>을 한데 묶어놓은 것 같다. 조선시대 엄격한 유교윤리로 남녀상열지사가 금기시됐겠지만, 실제로도 그랬을까. ‘조선시대 남녀상열지사’라는 두 단어의 조합은 우리의 익숙한 관음증을 유발시킨다.
창작물에 관음증이 없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할까. 보이지 않는 것, 숨기려는 것 다 빼고 보이는 것, 말해주는 것만 가지고 만든 이야기가 재밌기 힘든 건 당연하다. <스캔들…>은 조선시대에 대한 이재용 감독의 관음증의 소산이다. 자기 시대뿐 아니라, 전 시대의 남녀상열지사까지 기록에서 배제할 정도로 덮으려는 게 많았던 조선사회였던 만큼 이 감독의 관음증은 더욱 정당해 보인다. 마침 그가 들추려는 건 조선시대 치부의 한가운데인 사대부 사회의 성문화다.
수백년의 시차를 넘어서는 관음증을 채워 담을 이야기 틀을, 이 감독은 독특하게도 18세기 말 프랑스 소설에서 끌어왔다. 1782년에 발표된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서간체 소설 <위험한 관계>가 이번 영화의 원작이다.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의 <위험한 관계>(1988), 밀로스 포먼의 <발몽>(1989), 로저 컴블의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1998), 더 거슬러올라가 로제 바댕의 59년작 <위험한 관계>까지 4편의 영화가 모두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200여년 전 발표 당시 초판 2천부가 매진돼 그해에 8쇄까지 찍은, 당시로서 초베스트셀러였던 이 소설은 시공간을 초월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큼 불순하고 위악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요부와 바람둥이는 사랑과 게임의 모호한 경계선을 드러내는 데 적격인 캐릭터다. 그래서 그들은 바보만큼이나 자주 동서고금에 이야기의 주인공이 돼왔다. 이 소설에서는 백작부인 메르테유라는 요부와 발몽 자작이라는 바람둥이가 함께 나온다. 그 둘이서 정숙한 유부녀 트루벨을 타락시키는 게임을 벌인다. 사랑보다 사랑에 내재한 권력관계에 몰두하고 그걸 이용하는 인간들의 불경한 이야기지만, 소설은 이들이 지닌 허약한 구석을 들추어낸다. 상처받기 싫어 사랑에 빠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그 모습에 연민을 보낸다.
소설의 배경은, 발표 당시와 동시대인 혁명 직전의 프랑스다. 그때 조선사회는 정조 재위기간이었다. 이 감독은 시간 배경은 그대로 두고 공간만 이동시켰다. 그러면 엄격한 유교 질서 아래, 프랑스 귀족들의 사교모임은커녕 남녀가 말도 못하고 유별하게 지내야 했던 조선 땅에서 이런 호사스럽고 불경한 게임이 가능했다는 걸까. 이 감독은 자신있게 말했다. “사교계가 없었고, 남녀의 유별이 있다는 게 이야기를 옮겨오는 데에 단점이 되지 않는다. 되레 그런 금기의 벽이 이야기 전달에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그 벽이 무너질 때도 더 세게 느껴질 것이고.”
이 감독에 따르면 당시 남녀가 소통하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조씨부인과 조원은 사촌지간이어서 대화가 자유롭다. 그러나 조원이 숙부인을 포함해 다른 여자와 말을 할 때는 발을 치고 하든가 아니면 하인을 전언자로 삼는다. 이 감독 말대로 이런 게 더 긴장감이 있을지도 모른다. 천주교 모임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숙부인은 아직 독실한 신자는 아니지만 불쌍한 사람들을 돕겠다는 마음에서, 또 외로움을 달래는 한 방편으로 천주교 모임에 나간다. 숙부인을 노리는 조원은 그 사실을 알고 같은 모임에 나가 독지가 행세를 한다.
춘화나 가채 등은 조선시대 부르주아였던 사대부 사회의 문화를 훔쳐보는 데 열쇠 같은 구실을 한다. 사대부들 사이에 중국이나 일본에서 들어온 최신판 춘화가 돌고, 부인들도 “그것”이라는 대명사로 춘화에 대해 잡담을 나눈다. “요즘은 조선에서도 이런 걸 만든다더라” 하면서 호기심을 갖기도 한다. 가채는 부잣집 마님들에게 인기가 치솟아, 집값만큼 뛰어서 영조 때 사용을 금하기도 했다. 한 부인이 다른 부인에게 이걸 선물하면서 “시골 처녀들 머리카락으로만 만든 최상품”이라고 소개한다. “나라에서 금하는 걸 사대부집 여인이 어떻게 받겠느냐”고 되물으니까 “유행과 제도는 돌고 도는 건데 보관하셨다가 나중에 긴요하게 쓰시라”고 말한다.
이런 디테일들의 역사적 사실성에 대해서도 이 감독은 자신있다는 표정이다. 고증의 정확함을 위한 자료조사에 상당한 정성을 쏟은 탓이다. 그는 의상부터 가구, 주택까지 당시 사회의 시각적 재현에도 큰 의미를 두고 있다. 그 때문에 컴퓨터그래픽이나 군중신 같은 게 없음에도 제작비를 최소한 40억원으로 잡고 있다. “당시 춘화에 나오는 여성들의 의상을 보면, 품이 크게 늘어지기보다 팔과 어깨에 꽉 달라붙는 ‘쫄티’에 가까웠다. 그때 여자들도 자신의 몸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겠는가. 주택도 한옥은 다 비슷한 형태인 것으로 알지만, 이언적의 ‘독락당’ 같은 곳에 가보면 대문 바로 안에 벽이 나온다. 그 벽을 돌아가면 마당이 나오고 집채가 사선으로 들어서 있다. 관직에서 밀려난 뒤 애첩을 두고 나 혼자 즐기겠다는 주인의 뜻이 그대로 담겨 지어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각색될 디테일의 개연성 못지않게 관심이 가는 건, 시대 배경이 정조 때라는 점이다. 실학과 예술이 꽃피고, 봉건적 신분구조를 깨려는 정조의 의지가 드높았던 그때를 두고 어떤 사가들은 조선이 자생적으로 근대화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 도사린 보수반동의 벽은 쉽게 무너질 것이 아니었다. 조선 땅에 여자로 태어나 애도 못 낳는 조씨부인의 자신과 사회에 대한 염증이나, 관직에서 출세하기를 일찍 포기한 조원의 냉소적 세계관은, 희망적인 조짐에도 불구하고 봉건체제의 불감증이 쉽게 치료되지 않을 것임을 생리적으로 감지한 결과일 수도 있다. 이 감독도 이 점을 중요하게 보고 있었다. “그들의 냉소적, 퇴폐적인 세계관이 정조 때라는 시대 배경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말대로 200년 전의 남녀상열지사에서 동시대적인 느낌이 전해지기를 기대해도 무리가 아닐 듯하다. <스캔들-조선시대 남녀상열지사>는 7월 말까지 캐스팅 완료하고 9월 중 촬영에 들어가 내년 봄 개봉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