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문제적 감독 4인의 차기작 맛보기 [4] - 임상수 ①
2002-07-12
글 : 문석
즐거운 간통, 행복한 파국, <마지막 연애의 상상>

걸ː다- ①(흙이나 거름이) 기름지고 양분이 많다… ④(말솜씨가 험하여) 거리낌이 없고 푸지다.

임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 단어가 떠오른다. 미혼녀 세명이 나누는 거침없는 성과 사랑의 이야기 <처녀들의 저녁식사>와 아웃사이더 청춘들의 적나라하지만 서글픈 방황기 <눈물>, 이 두편의 영화의 느낌은 정말 걸다, 그 자체였다. 비단 주인공들의 ‘발랑 까진’ 대사뿐 아니라, 끊임없이 출렁이는 핸드헬드 카메라 또는 디지털 카메라로 포착된 이미지까지 미화되거나 포장되지 않은, ‘거리낌이 없고 푸진’ 그것이었다. 그의 신작 <마지막 연애의 상상>(가제) 또한 그렇게 ‘건’ 영화가 될까.

<버스, 정류장>의 이미연 감독 말마따나 <처녀들의…>의 처녀 중 하나인 순(김여진)의 결혼생활을 그리는 듯한 이 영화는 엉뚱하게도 정지우 감독의 <해피엔드>로부터 시작됐다. “극장에서 그 영화를 보고 있는데, 옆의 아줌마들이 너무 흥미진진하게 보더라. 아, 사람들이 간통을 꿈꾸거나 즐겁게 받아들이는구나. 그래? 그렇다면 내 버전으로 ‘간통영화’를 찍어봐, 하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자신만의 스타일과 주제를 녹여내는 ‘간통영화’를 생각하던 임 감독은 “겉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실은 지리멸렬한 주변 사람들의 결혼생활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호정은 나름대로 반듯한 변호사를 남편으로 뒀고, 입양했지만 너무나 사랑스런 아들을 두고 있는 주부. 한때 무용가를 꿈꿨으나 포기한 뒤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는 점만 빼놓으면 별 특별한 것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호정을 둘러싸고 있는 관계들의 이면을 바라보면, 그녀의 속이 편할 수만은 없다. 남편 영작은 젊은 여인과 바람을 피우고 있고, 시아버지는 허구한 날 술을 마시다 간 기능이 정지됐으며, 시어머니는 초등학교 동창생과의 정사를 나누고 있는데다 아이는 입양아라는 사실 때문에 혼란을 겪고, 옆집 열일곱 소년은 그녀를 뜨거운 눈길로 스토킹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영화를 ‘임상수만의 간통영화’로 만드는 점은 코믹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의 뒤얽힌 관계설정만이 아니다. 호정을 포함한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이 사건의 전개에 따라 각기 극한적인 상황을 맞게 된다는 점, 그리고 그 울림이 사회적 맥락에까지 가닿는다는 점이야말로 이 영화를 다른 ‘간통영화’와 구별짓게 한다. 일종의 파국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영화의 결말은 외부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물들의 개인사와 상호관계 속에서 배태된 결과물이다. 우리 대다수의 그것과 비슷하게도 사랑과 미움, 용서와 분노, 갈망과 무관심 등이 뒤얽힌 호정네의 일상이 훗날 엄청난 비극을 배태하는 강고한 고리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때문에 현재 최종적인 마무리 작업만 남겨놓고 있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는 심경은 묘하다. 아찔한 현기증과 지극한 평온함이 뒤섞여 심사가 복잡해진다. 사실, 임상수 감독에게 일상과 파국이라는 대조적인 상황은, 최소한 한국사회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어느 조용한 아침 한강에선 다리가 동강나고, 바닷가로 캠핑을 떠난 유치원생들은 끔찍한 화재사고를 만나는 등 ‘충격적이고 치명적인 일’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그에게 이곳은 “끔찍하면서도 매력적인 사회”다. 이 영화 속의 관계들도 클로즈업으로 당겨 볼 때는 평범한 일상에 불과했지만, 렌즈를 줌 아웃함해 바라봄에 따라 점차 치명적인 파국으로 치닫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하지만 임상수 감독은 이같은 일상과 파국의 교차를 표현하기 위해 유쾌한 우회로를 설계하고 있다. “그런 슬프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어깨에 힘주고 그리는 대신, 겉으로는 태연한 척 유머러스하고 경쾌하며 섹시하게” 그려낼 계획이란다. ‘치명적’ 느낌의 결말조차 일상의 연장선상에 놓인 듯 보이게 말이다. 이는 영화 안에서 스며나오는 슬픔이 관객의 가슴에 더 절실하게 와닿을 수 있도록 하려는 그의 미학적인 방법론이 반영된 탓이기도 하다. 알코올중독자 치료소에서 나오는 도중, 며느리에게 술 한잔 사달라고 조르는 시아버지의 모습이나 입양됐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왜 가르쳐줬냐고 엄마에게 투정부리듯 묻는 아들의 표정 등은 분명 관객의 입가에 살가운 웃음을 머금게 할 듯하다.

<처녀들의…>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를 여성주의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도 가능할 듯싶다. <…상상>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상당히 쿨하며 훌륭하기까지 하다. 호정은 남편의 외도 사실을 뻔히 눈치챘으면서도 친구에게 “뭐 유부남도 연애할 자유는 있는 거 아냐?”라 말하며, 병한은 며느리와 아들 앞에서 “나, 요새 생전 처음 오르가슴이란 걸 느껴… 얘야, 인생 솔직하게 살아야 되는 거더라”라고 외도 사실을 툭 털어놓는다. 임상수 감독은 “시나리오를 읽은 한 여성이 ‘당신이 그린 여자들은 당신의 환상이다. 실제로 여자들은 그렇게 훌륭하지 못하다’라고 말하더라. 그럴 수 있다. 사실 시나리오상의 남자들을 현실적으로 그리려고 노력했다면, 여자들에게는 그들에 대한 내 바람 따위를 많이 불어넣었다. 난 그게 더 멋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이번 영화에서 임상수 감독이 가장 신경쓰는 점은 배우와의 호흡이다. 데뷔작 <처녀들의…>를 만들 때는 신인 감독이었던 탓에 배우들과의 관계 속에서 놓치고 지나친 것이 상당히 많았고, <눈물> 때는 신인 배우들을 기용했기 때문에 배우의 피드백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풀겠다는 이야기다. “이번 영화는 카메라고 조명이고 편집이고 다 잊어버리고 배우들과 씨름하면서 연기로 승부할 거다.” 임 감독은 캐스팅이 마무리되면 배우들과 충분한 사전토론을 통해 함께 캐릭터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런저런 정황으로 미뤄볼 때, <…상상>은 전작들보다도 더 ‘걸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가 될지 모른다. ‘거리낌이 없고 푸질’ 뿐 아니라 ‘기름지고 양분이 많은’ 영화 말이다. <…상상>은 초가을부터 촬영에 들어가 올해 안에 촬영을 마치고 2003년 초 개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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