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문제적 감독 4인의 차기작 맛보기 [2] - 김지운 ①
2002-07-12
글 : 김혜리
음산한 증오, 창백한 죽음, <장화, 홍련>

예언이건 약속이건, 아직 세상에 없는 것에 대한 말이란 꺼내기가 천근처럼 무겁게 마련이다. 시나리오 마무리를 앞둔 새 영화 <장화, 홍련>의 스케치를 듣겠다고 김지운 감독을 청한 자리. “광물성입니까?” “음, 식물성이기도 하고 광물성이기도 합니다” 식의 ‘스무고개형’ 문답이 나른한 여름 오후의 테니스 경기처럼 오가던 중, 김지운 감독이 캐스터 송재익 아저씨처럼 논평한다. “음, 이건 마치 동태를 왼쪽에 고춧가루를 오른쪽에 놓고 동태찌개의 맛을 논하고 있는 것 같네요.”

아직 명확한 상이 맺히지 않은 부분을 남겨두고 있는 김지운 감독의 차기작 <장화, 홍련>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고, 아무도 가늠할 수 없는 영화다. 일단 우리는 누명이 원한을 낳고 마침내 진혼곡의 3막으로 끝난 장화, 홍련 자매의 사연을 웬만큼 알고 있다. 평안도 철산에서 유래한 이 설화 속에서 친어머니를 여읜 자매의 언니 장화는 용모와 심성이 흉악한 계모에 의해 낙태했다고 모략당해 배다른 동생에게 물에 빠져 죽기를 강요당하고, 동생 홍련은 언니에 대한 그리움에 애가 닳아 역시 물에 쓸려 죽는다. 배창호 감독의 <정>에서 팔자 처연한 여주인공 순이가 틈만 나면 곡조를 붙여 가슴 쓸어내리듯 읽어내리던 책이 바로 <장화홍련전>이었고, 백과사전은 학대와 살생, 능지처참과 효수의 비릿한 내음이 갈피갈피 서린 장화홍련 설화를 ‘계모형 가정 비극’이라고 깔끔하게 분류한다.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은 이 세종시대의 가정 비극을 현대로 옮겨오는 호러영화다. 감독은 <장화, 홍련>이 발산하는 공포가 순간순간 심장을 내려앉히는 쇼크가 아니라 시종일관 음침한 기운이 사방을 뒤덮고 내리누르는 공포라고 설명한다. 태아로 위장된 죽은 쥐의 배를 가르고, 귀와 팔다리를 호랑이에게 뜯어먹히는 원작의 살벌한 하드고어 요소들은 발라냈지만 원혼은 지붕 밑 방이 있는 장화와 홍련의 3층집 복도를 소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모든 공포의 진앙은 어디인가? 설화 첫 대목에는 눈길이 끌리는 구절이 있다.“… 장화홍련 자매가 성장하여 얼굴이 화려하고 기질이 기묘하니 (배좌수) 내외가 형제를 사랑함이 비할 데가 없었다. 다만 너무 숙성함을 염려하였다.”

영화 <장화, 홍련>의 팔뚝에 돋는 소름은, ‘알’ 속에 손을 마주 잡고 몸을 포개고 살던 자매가 어느 날 껍질이 깨어지며 느끼는 끔찍한 한기(寒氣)에서 비롯된다. “고립된 환경의 평안한 가정이 깨져나가기 시작하면서 자매는 인생의 잔혹함을 처음 맛보게 된다”고 김지운 감독은 소개한다. 요기 어린 유럽의 메르헨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주말연속극 같기도 한 <장화, 홍련>은 사방 어디로든 범람할 수 있는 복잡한 소용돌이다. 예사롭지 않은 자매애의 밑바닥에 잠복한 동성애 코드, 계모와 전처 자식 사이에서 이를 드러내는 엽기적 증오, 가족의 개념, 여성의 성장에 대한 테마까지. 김지운 감독은 이제 <장화, 홍련>이 품고 있는 숱한 요소들을 한쪽으로 몰아서 하나로 다른 하나를 덮고 전경과 후경을 정리해야 하는 단계라고 말한다. 그리고 줄거리에 대해서는 “그저 열심히 원전을 훼손하고 있는 중”이라고만 답한다.

드라큘라에 관한 짧은 영화 <커밍아웃>에서 상하체가 뒤바뀐 인어를 그린 르네 마그리트의 <공동 발명>을 카메라 정면에 걸어두었던 그는 <장화, 홍련>을 함축할 수 있는 이미지로, 우윳빛 피부에 풍성한 머리채, 텅 빈 눈동자를 지닌 소녀들을 사랑해 마지않았던 라파엘 전파 화가들이 그린 <햄릿>의 오필리아를 지목한다. 자살의 형식으로 강요된 살인, 순수의 죽음을 상징하는 햄릿의 연인은 장화와 홍련의 다른 누이다. “한 작품을 고른다면 존 에버릿 밀레의 <오필리아>다. J.W.워터하우스의 그림도 참고했다. 밀레의 그림이 <텔미썸딩>에 인용되기 오래 전 꽃이 만발한 들판의 늪과 같은 연못에 창백한 여자가 시체로 떠오르는 꿈을 꾼 적이 있다. 꿈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보여준 밀레의 그림이 마치 꿈을 전사한 것 같았다.”

동백꽃처럼 붉은 소녀의 영혼을 집어삼킨 수면을 응시하게 될 <장화, 홍련>. 이 영화에서 지금까지 코미디의 마스크 뒤에 웅크리고 있던 김지운 영화의 근원적인 슬픔과 두려움은 드디어 주렴을 걷고 앞쪽으로 나서게 될까? 연출자로서 쿨하고 건조한 체질을 타고난 김지운 감독은 이 미움과 정념의 이야기를 어떻게 끌어안을까? “외기에 오래 노출된 진흙은 비록 표면이 말라붙어 갈라져 있더라도 헤집으면 끈기가 묻어나온다. 그것은 어쩌면 표피와 표층의 차이에 불과할 수도 있다. 나의 전작도 들려주는 이야기의 본성을 따지면 점액질에 속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장화, 홍련>은 마른 껍질의 균열 아래로 손을 쑤셔넣는 그를 보여줄 것이다. “언제나 내 영화는 삶을 밝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 어두운 면을 다루는 형식으로 유머를 택하면서 마땅한 이름이 없어 블랙코미디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어둠. 그것은 이번에도 제자리에 있다. 단지 공포와 열정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마술피리가 제작을 영화사 봄이 마케팅을 분담하는 <장화, 홍련>은 오는 9월 초 촬영에 들어가 겨울이 오기 전에 촬영을 마친다는 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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