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에우리디케를 찾아 명부로 내려간 오르페우스가 그를 실어다준 뱃사공과 거역할 수 없는 사랑에 빠졌다면? 페넬로페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상처투성이 몸을 이끌던 오디세우스가 어느 섬의 공주에게 돌연 마음을 빼앗겼다면? LJ필름(이승재 대표)에서 제작을 준비하고 있는 민규동 감독의 새 영화 <솔롱고스>는 신화 속 연인의 또 다른 딜레마를 상상한다.
무지개라는 뜻을 지닌 제목 ‘솔롱고스’는 몽골인들이 동경을 담아 한국을 일컫는 말. 그러나 <솔롱고스>의 주인공 민식에게 무지개의 땅은 몽골이다. 오케스트라의 화음에 몰입하지 못하는 청각 때문에 바이올린 주자의 일자리를 잃고 인생 중턱의 벼랑에 봉착한 민식의 말라붙은 마음은 몽골의 초원을 무턱대고 열망한다. 이제 무심한 침묵을 친밀하게 공유할 수 있는 누이 같은 아내와 떠난 오랜만의 여행. 푸른 초원에서 아련한 희열을 맛보고 있는데, 무엇 하나 숨길 수 없어 보이는 벌판에서 아내 만옥이 홀연히 사라진다. 그가 멀리서 흔들리는 어느 유목민 소녀를 바라보고 있던 짧은 순간에. 어쩌면 그의 무의식이, 아내를 포함해 그가 알아온 세계의 완전한 무화를 은밀히 꿈꾸던 그 순간에. 필사적인 노력에도 만옥의 종적은 묘연하고 민식의 죄책감은 강박이 된다. 끊긴 현을 잇기 전에는 어떤 연주도 할 수 없는 음악가처럼 민식은 모든 삶을 유예하고 행방불명된 아내의 자취를 더듬는다. 그러나 애타게 아내를 찾는 남자와 그의 여정에 길잡이가 되는 유목민 소녀 침게는 아주 이상한 사랑의 포로가 된다. 그들은 서로의 곁에 머무를 이유를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남자의 아내를 찾아 초원을 헤맨다.
민규동 감독은 2001년 여름과 가을, 두 차례 몽골 여행을 통해 <솔롱고스>의 트리트먼트와 이야기를 완성했다. 7월의 첫 번째 여행에서 알게 된 몽골 소녀와 7월에 스쳐갔다가 10월에 다시 만나 그가 유목민 생활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준 아가씨의 기억은 주인공 침게의 초상 속에 하나로 녹아들어 있다. 장르영화로서 <솔롱고스>는 말할 나위도 없이 광야의 바람 냄새가 물씬 나는 스케일 큰 로맨스지만, 속내로 들어가면 거침없는 판타지다. “<솔롱고스>는 아마도 두개의 판타지와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저 푸른 초원 위에’라는 표현으로 요약되는 환상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카피의 호소력에서 보듯이 좁은 땅에 갇히고 일에 눌려서 사는 우리에게는 막연하지만 뿌리 깊은 탈출욕구가 있다. 또 하나는 새로운 사랑에 대한 판타지다. 여행이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낯선 세상, 멋진 풍경에 대한 기대보다 예상 못한 사랑을 선물받을지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판타지는 결혼한 남자들의 마음에 그림자처럼 서려 있는 죄의식과도 고리를 맺는다. 배우자의 대안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새로 찾아오는 감정, 설득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는 감정에 관한 이야기다. 한편 실종된 이후 민식의 아내는 영화에 긴 시간 동안 등장하지 않지만, 그녀의 존재감은 점점 짙어진다.”
단편들과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통해 민규동 감독이 애착했던 사춘기는 그렇다면 이제 추억이 된 것일까? 아니, <솔롱고스>에서도 삶의 통과의례는 계속된다. <여고괴담2>의 소녀가 다른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죽음의 문턱을 넘었다면, 조금 더 지친 <솔롱고스>의 30대 남자는 초원으로 떠난다. “예민함과 정열을 상실한 민식은 열아홉살의 침게와 함께 두 번째 사춘기를 나는 것이다.” 그리고 민 감독은 아내를 향한 진심이 새로운 사랑에 대한 진심으로 남고 마침내 거짓의 힘을 빌리지 않고 욕구를 실현시키는 <솔롱고스>의 판타지가 사춘기의 고통을 정면으로 극복한 용감한 자가 받아 마땅한 선물일 거라고, 아주 공명정대한 주석을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