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지구를 지켜라!> & 백윤식 [6]
2003-04-04
글 : 문석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Mission 5. 세대를 넘어 부산을 넘어 - 행운과 불운의 쌍곡선

따지고 보면 운이 좋은 거였다. 천재인지는 몰라도 특별한 것만큼은 확실한 장준환 감독이나 개성이 진한 홍경표 촬영감독, 집요할 정도로 자기 세계를 추구하는 장근영 미술감독을 굳이 거명하지 않더라도 그의 영화작업에 함께한 스탭들은 모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일벌레들이었으니까. 백윤식에게 2002년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은 단지 만족스런 영화 한편에 출연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대부분 20년 이상 어리지만 마음만은 어울릴 수 있는 ‘동료’들과 함께 보냈다고 추억하기 때문이다. 이건 스탭들이 그를 배려했던 만큼, 그 또한 그들의 젊음 안으로 들어가려 무던히 노력한결과이기도 하다. 장준환 감독에 따르면 백윤식은 촬영장의 활력소였다. 그는 김 형사 역의 이주현을 보면서 “쟤는 칙칙이(백윤식은 땀을 표현하기 위해 물을 분사하는 기구를 그렇게 불렀다)만 뿌려주면 좋아하더라” 식으로 엉뚱한 말을 툭툭 던져 촬영장의 긴장감을 덜어줬다.

많은 후배와 동료 중 특히 함께 연기한 신하균에 대한 감정은 남달랐다. 항상 공손하고 선한 인상이지만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놀라울 정도로 연기에 몰입하는 그가 기특했다. 간혹 정도가 지나쳐 당황한 일도 있었지만. 영화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 둘의 격렬한 격투장면을 찍을 때가 그랬다. 병구 캐릭터에 대한 몰입이 지나쳐서 그랬던지 신하균은 항상 멈춰야 할 곳을 지나치곤 했다. 감독이 “컷”을 외치면 마땅히 힘을 풀고 일어나야 하거늘, 신하균은 계속 힘을 주며 눈을 부라렸다. 백윤식이 ‘내가 쟤한테 뭐 잘못 한 게 있던가’ 하고 고민까지 했을 정도니 그의 열정만큼은 사줄 만한 것이었다. 물론 나중에 기회가 있다면 백윤식은 “배우는 캐릭터에 몰입할 줄도 알아야 하지만 거리도 둘 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해주고 싶기도 하지만.

하지만 대통한 듯했던 그의 운은 이상하게도 세트장이 차려진 부산에만 가면 턱 막히곤 했다. 오죽하면 부산에서 1차 스튜디오 촬영을 하던 6월의 어느 날 밤 어둠 속에서 ‘아무리 월드컵이 좋기로서니…’라며 한숨을 내뱉었겠나. 사정은 이랬다. 때는 월드컵 시즌. 수영만 스튜디오에서 가까운 해운대의 거의 모든 숙박시설이 매진을 기록하고 있었다. 제작진은 여관을 간신히 구했지만 시설이 시원치 않았다. 방음장치 또한 부실했다. “대∼한민국!” 밤이면 밤마다 인근 방에서 울려나오는 우렁찬 함성에 그는 단잠을 설쳐야 했다. 충분하고 달콤한 잠을 유일한 보약이요, 아끼는 취미로 여기는 백윤식으로선 괴로운 나날일 수밖에. 엉뚱하게도 어떤 스탭은 눕는 방향을 바꿔보라고도 하고, 누구는 집에서 덮고 자던 이불을 공수해오라고도 했지만, 피끓는 젊음들에게 “아 조용히 좀 해”라고 속내를 털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부산의 악몽, 아니 불면은 10월의 2차 스튜디오 촬영 때로 이어졌다. 제작진은 “이번엔 정말 호텔로 모시겠습니다”라고 장담했지만, 막상 부산에 당도해보니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저기… 아시안게임 때문에 방이 없다고….” 전보다 시설이 나은 여관에서 묵은 것을 위안으로 삼는 수밖에 없었다.

Mission 6. 마지막 비밀을 간직하라 - 복잡하고 어려운 마케팅의 길

“내가 뭐 첩보원인가?” <지구를 지켜라!>의 개봉을 앞둔 요즘 백윤식은 마케팅팀 직원에게 농담을 던지곤 한다. 혹시 그가 인터뷰 자리 같은 데서 영화 후반부에 벌어지는 대반전을 드러낼 것을 우려한 영화사에서 철저하게 ‘입단속’을 시키는 탓이다. 비밀임무를 수행하는 첩보원이나 임금님 귀에 대한 비밀을 간직한 이발사처럼 그는 입 주변에 심한 ‘가려움증’을 앓고 있다. 그 또한 그런 정도야 충분히 지켜줄 수 있지만, “어디 나가서 작품성이 좋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뼈있는 농담’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뭐? 관객은 작품성이 있다고 하면 영화를 안 보는 게 요즘 흥행의 법칙이라고?” 이렇게 되물었을 정도로. 한편으론 영화계쪽으로 안테나를 세우지 않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뭐가 그래?” 하고 싶어진다. 아무래도 배우로선 재미보다는 작품성에 더 관심을 쏟게 마련인데 말이다.

게다가 이 영화가 작품성에서나 흥행성에서나 어디에 밀리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백윤식으로선 남들이 그렇다니까 그런가 받아들이는 척하는 거지, 아직도 작품성을 내세운다고 흥행에 지장이 있을 거라고 진심으로 믿진 않는다. 그 때문에 백윤식은 가려움증에서 해방되고 흥행 법칙의 진위를 두눈으로 확인하게 될 4월4일을 고대하고 있다. 만약, 당신이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주위를 잘 둘러보시라. 객석에 조용히 숨어들어와 ‘심하게 망가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는 백윤식 혹은 강 사장, 또는 외계인의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장소협찬 홍익대 앞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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