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한 선배가 있었다. 시도 쓰고, 동화도 쓰던 그 선배. 엄청나게 가난한 탓에 중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채 막노동판을 떠돌았고, 글을 쓰면서도 돈이 떨어지면 여전히 막노동을 하곤 했다. 개인적으로 아주 친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들과 어울려 자주 보고 집에 놀러가기도 했다. 한동안 그 선배의 얼굴이 보이지 않다가 아프다는 말을 들었다. 병원에 입원했고, 정신병원이란 말을 들었다. 정신분열증이었다. 얼마 뒤 조금 호전되어 퇴원했다는 말을 듣고는 친구들과 함께 집을 찾았다. 언덕을 올라 집으로 향한 때는, 날선 바람이 불던 연말이었다. 선배의 얼굴은 약간 수척했지만, 약간은 경박하게 느껴지던, 그 맑은 웃음만은 여전했다. 그런데 조금 달랐다. 선배는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 엊그제는 지구의 미래가 걱정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이 지구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를 고민하며 밤새 뒤척였다. 선배의 눈에는 밝은 빛이 서려 있었다. 그건 일종의 믿음이었다. 왜 그랬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그 순간 선배는 정말로 지구의 운명을 걸머지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아무도 웃지 않았다. 진지하게, 그 선배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 있었다. 그렇게 선배를 만나고 얼마 뒤, 다시 소식을 들었다. 중대 부속병원으로 갔다. 검은 테로 둘러싸인 사진 속에서 여전히 선배는 웃고 있었다. 자살이라고, 한강에서 떠내려온 시신을 발견했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들었다.
그뒤로, ‘세계’를 생각할 때면 가끔 그 선배가 떠오른다. 약자들이 고통받는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자괴감에 빠질 때 간혹 생각이 난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로 바뀌고 이러다가 나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인간이야, 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나의 약함 때문에 바닥으로 빨려들어갈 때, 나는 그 선배를 생각한다. 나도 조금씩 미쳐가는 것이 아닐까, 아니 미치는 것이 오히려 편하지나 않을까. 선배는 그 거대한 사유 속으로 어떻게 걸어 들어갔을까. 걸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약함을 생각했을까, 자신의 임무를 생각했을까. <지구를 지켜라!>를 보다가 문득 그 선배가 겹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 내 모습이었던가? 트럭을 운전하면서 자신의 뺨을 때리는 병구를 보면서, 과거를 생각했다. 거대한 세상의 벽과 폭력과 마주쳤을 때, 무릎을 꿇었을 때 스스로를 비웃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을 괴롭히지 않고는 단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던 시간을 다시 만났다.
병구라는 인물은,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아주 이상한 캐릭터다. 그의 내면에는 이성과 광기가, 현실과 비현실이 공존한다. 지극히 논리적으로 선택된 희생자들을, 완전히 비현실적인 이유로 고문을 하고 죽여버린다. 그는 외계인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강 사장이 유일한 치료약이라고 말한 벤젠을, 어머니에게 먹이려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래, 나 외계인 맞아’라고 외치는 강 사장의 교활한 속임수를 한눈에 꿰뚫어볼 수 있을 만큼 병구는 영리하다. 아니 그 많은 사람을 납치하여 죽여버리고도 추적을 당하지 않았을 만큼 병구는 영리하다. 그러나 병구는 미쳤다. <지구를 지켜라!>는 그 모두가 옳다고 말한다. 그는 미쳤지만 현실적이고, 과대망상이지만 가장 작은 부분에 상처받는다.
웃기는, 그러나 그뒤에는 지독한 현실이
<지구를 지켜라!>의 모든 캐릭터 역시 그렇다. 병구의 연인인 순이는 동춘 서커스단에서 외줄을 타는 여인이다. 태어날 때부터 서커스단에 있었던 그녀는, 병구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서커스단이라는 비현실적인 공간에 속하고 평생을 살아왔던 순이는, 지구를 지킨다는 병구의 말에 태연하게 동의한다. 강 사장의 말에 속아 떠나간 것도, 단지 병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병구와 순이는 우리의 비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이고, 영화가 막바지로 달려가면서 강 사장 역시 그 비현실로 들어가게 된다. <지구를 지켜라!>는 비현실적이지만,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다.
<지구를 지켜라!>는 장준환 감독의 데뷔작이다. 누구나 알겠지만, 데뷔작은 인생에서 단 한번이다. 걸작은 평생 몇번이나 만들 수 있지만, 데뷔작은 두번 다시 만들 수 없다. 요즘은 DVD 덕으로 편집을 다시 하거나 해서 데뷔작을 뜯어고칠 수는 있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의 교훈처럼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영화라는 세계에 뛰어들어, 대중을 상대로 첫 승부를 거는 데뷔작에는 특별한 향취가 있다. 피터 잭슨의 <고무인간의 최후>나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 같은 영화들에는, 그 어떤 걸작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원초적인 생명력이 있다. 걸작은 말 그대로 걸작이다. 걸작들에 견주어볼 때 <고무인간의 최후>나 <이블 데드>는 분명하게 못 미친다. 하지만 그 작품들에는, 기존의 논리와 감각으로는 해명할 수 없는 패기와 도전 정신이 있다. 데뷔작에는 조금의 어설픔과 혼란이 용인된다. 때로는 조잡함이 장점이 되기도 한다. 데뷔작에는 모름지기 ‘breakthrough’라고 말할 수 있는, 기존의 상식과 한계를 돌파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