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지구를 지켜라!> & 백윤식 [5]
2003-04-04
글 : 문석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Mission 3. ‘찌리리’와 ‘찌지직’을 극복하라 -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서 살다

“잠깐 스톱. 영화사에서 온 분들 좀 불러줘요.” 백윤식은 등골 저편에서 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아직 촬영을 시작하기도 전인데 벌써 찌리리하다니.’ 백윤식은 걱정이 됐다. 일을 하다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맞거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몸 안 깊숙한 곳에서 전류 같은 게 발생하곤 하는데, ‘찌리리하다’는 건 이때 쓰는 그만의 표현이다. 이보다 더한 단계는 ‘찌지직’이라고 하는데, 촬영 도중 이 단계로 진입한 적이 없었던 건 천만다행으로 보인다.

이날의 ‘찌리리’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 쌀쌀하던 어느 날 신체의 틀을 뜨기 위해 미사리 부근의 특수분장 업체를 찾았을 때 발생했다.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특수분장 직원이 그에게 “혹시 감기 걸리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었다. 난데없는 질문에 도리질을 치며 맥락을 파악하려는데 갑자기 콧구멍만 남겨두고 머리 전체에 실리콘을 칠하는 게 아닌가. 귀의 틀을 뜨기 위해서라나. 갑갑한 가운데 약 30분이 흐르고 나니 맨발에 실리콘을 입힌 뒤 엉거주춤 세워놓은 채 꼼짝 말라고 한다. 허리가 아파도 또 30분. 그가 영화사 스탭을 찾은 것은 ‘이번엔 손…’으로 이어지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화를 치밀어오르게 한 것은 사전에 아무런 귀띔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어떤 작업이며 얼마 정도가 소요되니 준비를 하라는 공지없이 밑도 끝도 없이 부동자세를 취하려니 ‘찌리리’ 경보가 울린 거다. 영화사 직원을 불러 호통을 쳤건만, 그렇다고 작업이 빨리 끝나진 않았다. 결국 백윤식은 3시간에 걸쳐 7개 부위의 틀을 뜬 뒤에야 특수분장 업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가 그 업체에서 가장 많은 신체부위를 틀로 만든 배우였다나 어쨌다나.

스트레스가 치솟아 ‘찌지직’의 선을 침범할 뻔한 적도 있었다. 제작진들이 자신을 비롯한 배우의 안전에 대해 무심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포승줄을 풀고 탈출을 시도하다 병구에게 붙들려 계단 아래로 질질 끌려오는 장면도 그런 경우였다. 시멘트 바닥에 질질 끌리면 등이 까질 거고,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서 뒤통수가 쿵쿵 소리를 낼 게 뻔한데도 별다른 안전장구가 준비되지 않은 채 촬영에 임하려는 게 아닌가. 어디 이때뿐이었을까. 입에 파스용 대형 테이프를 붙였다 떼었다를 반복하다보니 입 주위가 다 헐기도 했고, 우둘두툴한 벽과 바닥에 맨몸으로 기고 굴러대니 늘 팔다리가 퍼런 멍에 생채기투성이었다. 물론 그때마다 ‘만능 발명가’인 연출부원들이 등과 뒤통수에 비닐 장판을 붙이거나, 물기를 이용해 입에 테이프를 고정하는 방법을 연구하곤 했지만 그리 효과적이진 않았다. 그는 이런 건 촬영을 준비할 때나 세트를 만들 때부터 다 계산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10월의 한기에 식은 차가운 물을 맞으며 신하균과 격투장면을 찍을 때도, 11월 휑한 여천공단에서 살갗이 드러나는 분홍 치마 차림으로 촬영할 때도, ‘이게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현주소인가’라고 자문한 것도 그런 연유 때문이다.

Mission 4. 브라운관 밖으로 탈출하라 - 영화 세계 적응기

‘음…. 저건 아닌 것 같은데.’ 스탭들과 기술시사를 하는 자리에서 백윤식의 마음 한구석은 섭섭해졌다. 처음으로 완성품을 보며 자신이 펼친 연기만을 집중적으로 보다보니 좀 민감해지기도 했겠지만, 그래도 그 장면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마음에 턱 걸린 장면은 소변이 급한데 의자에 팔다리가 묶여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순이에게 도움을 청하는 부분이었다. 그는 시나리오대로 순이에게 동정심을 유발하는 표정도 짓고, 스스로도 난감하다는 시늉도 하며, 매우 급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끙끙거리기도 했다. 그것이 감정의 흐름에도 맞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막상 스크린에는 그 절차가 생략된 채 후닥닥 소변을 보는 것으로 나오는 게 아닌가. 여러 컷을 자른 것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촬영했는데, 이게 뭐란 말인가.’ 섭섭한 기분은 뒤풀이 자리까지 따라왔다. 결국 감독에게 조용히 그 문제를 제기하니까 “자르기 싫었는데 2시간 정도로 러닝타임을 맞추려다보니 그렇게 됐다”며 머리를 조아린다. ‘응? 아니, 영화는 찍으면 찍는 대로 쓰는 TV와는 다르단 말인가. 3시간 분량을 찍었으면 3시간 상영하면 되는 게 아닌가.’ 백윤식은 그 자리에서야 영화가 너무 길면 배급사와 극장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그 때문에 어렵게 찍은 장면도 눈꺼풀을 꾹 누르고 잘라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영화와 TV드라마가 제작방식에서 가장 다른 지점이 이곳이란 사실도 그때야 깨달았다. 그래도 뭔가 아쉬웠다. ‘그렇게 편집할 줄 알았다면 달리 연기했을걸. 아니면 처음부터 딱 쓸 만큼만 찍던가.’

조명도 방송과 영화는 다른 느낌이었다. 백윤식은 병구네 집 지하실 장면을 찍으면서 혼란을 느꼈다. ‘자고로 배우란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눈빛으로 연기하는 것이거늘, 왜 나에게만은 조명을 안 주는 건가.’ 이상했다. 지하실이라는 공간과 그의 내면을 고려해서 그랬다는데 쉽게 받아들이긴 힘들었다. 이해되지 않았던 쪽은 분장도 마찬가지였다. 왜 온몸에 분가루와 검은 칠을 많이 바르는지. 오죽하면 “분장 선생, 아니 내가 붙잡혀왔지 연탄광에서 굴렀어요?”라고 했겠나. “선생님 피부가 어찌 하얀지 조명을 받으면 너무 빛이 나서요”라는 대답도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분장팀이 나중엔 잘 지워지지 않는 분을 칠한 것도 분장을 슬쩍 지우곤 했던 그의 ‘저항’을 막아보려는 조치였을 것이다. 하긴 영화 초반 병구에게 붙들려온 직후 옷 벗기고 머리 깎인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장면에선 ‘몸이 너무 하얗게 보여 눈이 부시다’는 의견도 있으니, 결과적으론 그가 필름이라는 기록매체에 익숙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장소협찬 홍익대 앞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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