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지구를 지켜라!> & 백윤식 [4]
2003-04-04
글 : 문석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30년 안방대감 <지구를 지켜라>완수, 백윤식의 6가지 미션

악랄하고 비굴하고 때론 인간이길 포기했어요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고, 백윤식은 오십에 영화를 만났다. 50여년의 세월 속에서 30년 넘도록 브라운관의 스타로 군림해왔던 그는 <지구를 지켜라!>를 통해 연기인생의 새 장을 열었다. 1970년 KBS 공채로 연기활동을 시작한 이후 뭇 여성의 애간장을 태우는 꽃미남이었고, 특집극에서 나운규, 이중섭 등이나 <TV문학관>의 주연을 단골로 맡는 연기파였으며, <서울의 달> <파랑새는 있다>에선 무표정한 얼굴로 촌철살인의 유머를 구사해 ‘코미디언을 웃기는 연기자’로 불렸던 백윤식이지만 <지구를 지켜라!>의 강 사장 역은 완전히 새로운 도전이었다. TV와 제작 패턴이 크게 다른 영화현장에 적응하는 것에서부터 한국영화사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황당한 내용의 시나리오를 소화하는 점,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 강 사장 캐릭터를 체화하는 일까지 그로선 하나같이 난제였다. 그가 충분히 안정적일 수도 있었을 큰 길 대신 복잡하고 험난한 샛길을 선택한 것은 스크린에 대한 오랜 욕망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동안의 연기활동보다 앞으로의 여정이 훨씬 많이 남았다”며 스스로에게 또 다른 변신을 촉구한 그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백윤식이 <불후의 명작> 등 이전에 출연한 영화 대신 <지구를 지켜라!>를 “사실상의 영화 데뷔작”으로 꼽는 것도 그런 탓이리라. ‘신인 영화배우’ 백윤식이 <지구를 지켜라!>를 만드는 과정에서 맞닥뜨렸고 극복해야 했던 6가지 험난한 과제를 그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Mission 1. <지구를 지켜라!>를 지켜라 -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선생님, 좀 망가져주시죠.” 2002년 초 어느 날 강남의 한 호텔 커피숍. 중견연기자 백윤식에게 ‘무례한’ 말을 건넨 이는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였다. 지구를… 지켜라? 제목도 황당한 영화인데 망가지기까지 하라니…. 그가 택배로 보내도 되는 시나리오를 굳이 직접 전하겠다고 했던 건 배우에 대한 존중만이 아니었던가. 그만큼 어려운 작업이니 미리 양해해달라는 뜻 또한 포함돼 있었음을 백윤식은 그제야 깨달았다. 물론 그 자리에서 차 대표가 “오래 전부터 선생님의 팬이었습니다”라며 오래 전 출연한 특집극까지 줄줄이 읊어댔던 일이나 영화사 사장, 프로듀서, 감독이 나와 배우에 대해 깍듯하게 예의를 지켜준 점은 좋은 인상을 줬지만, 차 대표가 지나치듯 슬쩍 던진 말에선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묻어났다.

백윤식이 그 ‘망가짐’의 의미를 파악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지구를 지켜라!>의 시나리오를 펼쳐든 순간, 그는 적이 당황스러웠다. 사실, 이 외계인의 존재를 믿는 한 청년의 이야기는 그에게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동안 한국에선 영화건 TV건 볼 수 없었던, 황당무계하면서도 나름의 의미가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됐기에 구미가 당겼다. 문제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었다. 그가 제의받은 역할인 강만식 사장은 극중에서 병구라는 과대망상증 환자에게 납치돼 잔인하게 린치당하는 인물이었다. 발가벗겨지고, 머리를 박박 깎이며,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당하는 강 사장 역할을 맡자니 도무지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영화 내내 격앙된 감정을 지속시켜야 한다는 점도 커다란 벽으로 느껴졌다. ‘그럼 한번 망가져 봐?’와 ‘아냐, 무리야’라는 생각이 매일 같이 색을 달리해 머릿속을 비췄다. 얼마 뒤 큰아들의 긍정적인 조언과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오기에 힘입어 결국 그는 출연을 결정한다. 여기에 시나리오를 전달받던 날이나 계약서를 쓸 당시 제작사가 보여준 성의와 신뢰감이 한몫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Mission 2. 강 사장이 누군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군가 - 캐릭터 설정의 이면

처음 각오는 굳었지만, 막상 머리를 밀고 `야한` 옷차림으로 스탭들 앞에 서니 쑥스러움 같은 게 느껴졌다. 하지만 촬영이 시작되자 백윤식은 연기 속으로 몰입하는 프로정신을 보여줬다.

“아, 그게 아니라니까.” 촬영 초반 백윤식은 답답했다. 2002년 4월 촬영 시작과 함께 그는 자신의 ‘플란’(plan)에 따라 강 사장을 표현하려 했지만, 감독과 의견이 맞지 않았다. 다른 데서 그가 세워놓은 계획은 나름대로 성공을 거뒀다. 물파스 고문, 전기 고문, 다리미 고문 등 각기 다른 고통에 따른 상이한 비명소리나 신체의 반응, 술취한 장면에서 냈던 ‘유사 외계인 언어’ 등은 그가 미리 생각해둔 것이었고 감독으로부터 찬사를 들었다. 그런데 유독 강 사장이란 캐릭터의 성장배경에 대한 견해만큼은 장준환 감독과 일치를 보지 못했다. 사실 출연을 결정할 때 백윤식에게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온 것은 그동안 굳어진 자신의 이미지를 바꿔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다. <서울의 달>과 <파랑새는 있다> 이후 그는 ‘무표정하게 실없는 이야기 하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여인천하> <장희빈> 같은 사극에 출연해도 그는 <서울의 달>의 ‘선생님’이나 <파랑새는 있다>의 ‘관장님’의 그림자 밖으로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영화에 자주 출연하지 않았던 것은 기회가 없어서도, 시간이 없는 탓도, 개런티 문제 때문도 아니었다. ‘맥락없는 코믹연기’를 하는 캐릭터만을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지구를 지켜라!>는 달랐다. 그는 당할수록 강해지는 인물이었고, 분노하고 열을 올리다가도 때에 따라선 비굴함을 보이기도 하는 존재다.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 강 사장의 캐릭터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시나리오를 몇번씩 꼼꼼히 읽으면서 메모를 해둔 뒤 캐릭터 해석을 하는 등 자신만의 ‘플란’을 체계적으로 세운 것도 그런 의욕에서 비롯됐다. 그의 ‘플란’에 따르면 강 사장은 원래 가정형편이 좋고 ‘문교부 혜택’도 많이 받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더 악랄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머리를 이상한 쪽으로 굴리면 더하다는 게 그의 추론이었다. 그런데 장 감독에게 강 사장은 못 배운 한으로 오로지 돈만을 추구해온, 이를테면 재벌 1세대 유형의 인물이었다. 그의 문제제기에 장 감독은 “어, 그래요?”라며 머리만 긁적거릴 뿐 좀처럼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듯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째 그럴 것 같더라니.’ 백윤식은 호텔 커피숍에서 감독과 처음 대면하던 몇달 전을 상기했다. “장 감독 이 친구, 천재입니다, 천재”라는 차 대표의 칭찬에 그냥 웃음으로 대꾸했지만, 속으론 ‘뭔가 허술한 듯하면서 아주 똑똑한 것 같기도 하고…. 저런 유형의 사람도 다 있구나. 하긴 천재도 여러 종류가 있으니. 그래도 자기가 하는 일엔 아집이 좀 있겠는걸’ 하고 생각했던 터였다. 그런 짐작은 백윤식이 입을 하트 무늬의 빨간 팬티를 구하기 위해 장 감독이 밤새도록 인터넷을 뒤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백윤식은 감독과 여러 차례의 대화 끝에 두 가지 요소를 어느 정도 다 내포하고 있는 강 사장을 연기하게 된다.

장소협찬 홍익대 앞 ‘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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