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지구를 지켜라!> & 백윤식 [1]
2003-04-04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김봉석이 <지구를 지켜라!>를 최고의 데뷔작으로 꼽는 이유

<지구를 지켜라!>는 이야기와 캐릭터 모두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아주 괴상한 영화다. 그러나 이건 분명 애니메이션이나 괴수가 나오는 특촬영화, 패러디영화가 아니다. <지구를 지켜라!>는 신랄한 드라마다, 철저하게 비주류 감성으로 무장한.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해줄 수 없는 마지막 반전은 너무 이상해서 오히려 현실적이다. 평론가들은 <지구를 지켜라!>를 어떻게 보는지. 김봉석에게 물었다. <지구를 지켜라!>는 4월4일 개봉한다.


<지구를 지켜라>. 이건 독수리 오형제에게나 어울릴 대사가 아닐까? <지구를 지켜라!>란 제목을 듣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일 반응이다. 나 역시 그렇다. 스파이더맨과 엑스맨, 헐크까지 지구를 지키겠다고 나서는 판이지만 여전히 <지구를 지켜라!>라는 제목은 촌스럽고 유치하다. 지가 뭔데 지구를 지키겠다는 거야? 게다가 누구한테? 그런데 외계인이란다. 병구가 홀로 떨치고 일어나 싸우는 침략자는 바로, 이슬람교도가 아니라 외계인이다. 외계인에 맞서 지구를 지키는 이야기라면, 이건 분명 애니메이션이거나 괴수가 나오는 특촬영화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패러디영화이거나. 그런데 모두 틀렸다. <지구를 지켜라!>는 신랄한 드라마다, 철저하게 비주류 감성으로 무장한.

자신이 존 레넌의 환생이라고 믿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단편 <2001 이매진>보다도 <지구를 지켜라!>는 더 황당하다. 애초에 데뷔작으로 생각했던 방귀 뀌는 남자의 이야기보다는 현실적일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지구를 지켜라!>는 평범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의 사고 반경 내에서는 찾아내기 어려운 이야기다. 외계인이 있다고 믿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외계인을 믿는다고 해서, 누군가를 납치하는 사건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병구는 강 사장을 납치한다. 그리고 고문을 한다. 물파스와 때밀이 수건, 전기와 도끼를 이용하여 지독하게 잔인한 고문을 한다. 이건 정말 끔찍한 일이다. 아무것도 고백할 것이 없지만, 고문을 당해야만 하는 <마라톤 맨>의 더스틴 호프먼을 보는 것 같다. 차라리 <미저리>는 낫다. 캐시 베이츠의 요구대로 글을 쓰기만 하면, 그래도 그는 안전하다. 그러나 더스틴 호프먼과 강 사장은 아무 고백할 것이 없다. 그런데도 치과도구로 이에 구멍을 내거나 전기고문을 당한다. <마라톤 맨>의 고문장면이 가장 경악스러운 고문장면으로 꼽히는 이유는 그것이다. 그런데 <지구를 지켜라!>는 웃긴다. 이건 웃지 말아야 할 상황인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병구와 순이가 때밀이 수건으로 강 사장의 발등을 문지르는 장면을 보면 픽픽 웃음이 터진다.

철저하게 비주류로 무장한 드라마

그런데 또 뒤통수를 친다. 뭐 이런 ‘웃기는’ 영화가 다 있어 하며 한참 즐거워하고 있는데 갑자기 강 사장이 찬물을 끼얹는다. “난 네가 누구인지 알아. 네 엄마가 그렇게 된 게 왜 내 잘못이야. 네 애인이 죽은 것도 내가 그런 게 아니야.” 과대망상 환자인 병구를 웃으며 바라보는 나는, 아득해졌다. 이게 다 이유가 있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병구를 과대망상으로 만든 것은 허무맹랑한 외계인의 존재가 아니라, 지독한 현실이다. 공장에서 일하던 어머니는 알 수 없는 중독증세로 식물인간이 되었고, 애인은 파업을 하다가 폭행을 당해 죽었다. 아니 그뿐이 아니다. 가난한 병구는 선생에게 맞았고, 심약한 병구는 불량학생들에게 맞았고 늘 내몰리기만 했다. 무고한 희생자 병구는, 그래서 생각했다. 이건 모두 외계인 짓이야. 세상 사람들 아무도 모르지만, 나만은 알 수 있어. 나 혼자라도 지구를 지킬 거야, 라고. 병구의 인생은 고통 그 자체였고, 그 지옥에서 도망치기 위하여 ‘망상’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망상을 통하여 다시 현실로 귀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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