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 6회 씨네21 영화평론상 [2] - 유운성 작품 비평
2001-05-11
글 : 유운성 (영화평론가)
<아바론> 유운성 작품 비평 전문

욕망의 모호한 대상

오시이 마모루의 <아바론>은 어떤 면에서 워쇼스키 형제가 <공각기동대>로부터 빌려간, 그리고 왜곡시킨 것들을 되찾아 복원시킨 작업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돌아온 것이 예전 것과 같을 수 없듯 복원시킨 것 또한 돌아온 것과 같지 않다. 오시이 마모루에게 문제는 현실과 가상현실의 대립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과 가상현실의 구분은 전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현실은 결여이며 인간들은 그 결여된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가상현실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아바론>은 명확히 하고 있다.

현실에는 결여되어 있으나 게임 <아바론> 내에 넘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끝없이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증식시키는, 구조화된 대상들의 총체이다. 각기 수준이 다른 여러 필드들, 게이머의 수준에 따라 세심하게 분류된 임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궁극의 단계이자 난공불락의 단계라고 일컬어지는 ‘클래스 스페셜 A’의 존재.

그런데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은 동시에 결핍이 생성되는 순간이며 완전한 충족은 도저히 채울 길 없는 결핍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결국 욕망이 욕망하는 것은 욕망 자체이다. 이것이 시각적으로 형상화된 것이 <천사의 알>의 벽에 나타나는 실러캔드이며, <아바론>의 ‘고스트’인 것이다. 대상은 그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이 끝없는 추구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천사의 알>에서와 달리 <아바론>의 ‘고스트’는 욕망에 단계를 매겨주면서 끝없는 순환의 길에 들어서는 자들을 위한 ‘게이트’(Gate)가 된다.

이 ‘게이트’를 처음 통과했을 때, 게임기 위에 누워 있는 주인공 애쉬의 옆에 놓인 모니터에는 ‘클래스 리얼에 온 것을 환영한다. Welcome to Class Real’이라는 메시지가 나타난다. 이것은 현실-가상현실 사이의 다소 단순한 대립에 기반해 있던 <매트릭스>의 ‘Welcome to the real world’(모피스가 네오에게 던진 말)에 대한 오시이 식의 뒤틀기이다. 골방의 게임기 위에 누워 게임 <아바론>을 하고 있던 애쉬는 게이트를 통과한 뒤, 환하고 널찍한 방의 또다른 게임기- 게임기 속의 게임기- 위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맞물림의 전략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단순한 방식으로 허물기 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오시이 마모루는 애쉬가 깨어난 곳이 가상현실 속임을 분명히 한다. 이 신 이전까지 영화는 시종 탈색된 모노톤의 화면을 유지해왔다. 그것이 욕망의 탈색을 의미하는 것임은 쉽게 알 수 있다. 현실뿐 아니라 게임 <아바론> 내부도 마찬가지다. 마치 전설처럼 떠도는, 그 진위가 확인되지 않았던 클래스 스페셜 A의 존재를 제외하고 나면, 그 또한 언젠가 끝에 다다르게 될, 충족이 불가능한 결핍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클래스 스페셜 A, 혹은 클래스 ‘리얼’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그리하여 끝없이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존재하는 곳이다. 진짜 현실이 무엇이든간에 이러한 대상-욕망의 구조를 지닌 곳이야말로 진정 ‘현실적’이라는 것이 <아바론>의 전제이다. 하나의 ‘문’(Gate)을 통과하자 앞서의 문은 어느새 다시 다가와- 애쉬의 눈앞에 다시 나타난 ‘고스트’- 또 한번 그 문을 열고 지나갈 것을 재촉, 아니 유혹한다. 그 문 너머에 특별히 다른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 문 너머에는 또다른 문이, 아니 그 문 너머에는 다시 바로 그 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 작고 귀여운 대상은 우리에게 미소짓는다.

비로소 ‘아바론’(Avalon)에 들어선다(“Welcome to Avalon”이라는 마지막 자막). 게임 <아바론> 속으로 들어간 애쉬가 다시 ‘아바론’으로 진입한다는 것은 대상-욕망의 영겁회귀의 길에 들어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물론, <공각기동대>에서처럼 <아바론>에서도 명확한 대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혹자는 이 결말 이후에 애쉬가 비숍과의 약속에 따라 다시 현실로 복귀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영화 <아바론>은 오락실 게임의 논리를 환기시키게 된다. 마지막 단계에까지 이르러 적을 해치우고 나면, 다시 첫 단계로 돌아가되 난이도는 좀더 높아지게 되는 나선적 반복의 논리. 이 또한 처음으로 돌아왔으되 전과는 같지 않은 회귀임에는 틀림이 없다.

영화 속의 게이머들 가운데는 아더왕 전설에 나오는 ‘9자매’가 ‘아바론’을 설계한 당사자들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고스트’의 모습은 영화 속에 잠깐 제시되었던 ‘9자매’ 가운데 하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망각의 여신. 애쉬가 두 번째로 게이트를 통과하는 순간은 어쩌면 망각의 여신에게 이끌려 새로운, 하지만 전혀 전과 다르지 않은 ‘아바론’의 세계로 들어가는 순간일 수도 있다(이러한 해석을 통해서만이 <아바론>의 결말을 <공각기동대>의 결말과 연결짓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처럼 모든 새로운 것은 단지 망각의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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