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아시아 영화 네트워크, 불꽃놀이를 시작하다 [5]
2004-01-02
글 : 김소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
아시아, '아시아' 영화를 만들다

아시아에 대한 무지를 넘어서서 새롭게 대두하는 인터-아시아 연구

튀니지 작가인 압델바힙 메뎁은 “우리는 아라베스크, 전복 그리고 미로와 같은 구축물 그리고 문장과 언어를 끊임없이 탈중심화함으로써 우리를 방어할 것이다. 그래서 타자들이 카스바(북아프리카의 토착민 구역)의 협소한 거리에서처럼 길을 잃도록”이라는 탈식민적 글쓰기 방식을 제안한다. 아시아영화에 대한 글을 위의 인용으로 시작하는 것은 아시아영화라는 범주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라는 역사 속에서 태동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탈식민주의 그리고 탈냉전이라는 비판적 틀 안에서 비로소 아시아영화는 자신의 말을 시작할 수 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영화가 아시아에 유입될 당시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는 대부분 식민지나 반식민 상태였다. 조선 영화계의 나운규의 예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식민시기, 주권이 부재한 가운데 형성된 상상적 ‘내셔널 시네마’는 민족주의를 모태로 자라난다. 아시아영화는 식민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쌍생아의 후예인 셈이다. 서구 제국주의가 아시아에 남긴 흔적 중 우리가 동시대의 아시아영화를 지도화하는 데 커다란 장애로 작용하는 것은 아시아를 향한 앎의 욕망의 부재다. 그래서 아시아 관객에게 아시아영화는 아라베스크이자 미로이자 카스바가 된다. 즉, 압델바힙 메뎁의 탈식민적 글쓰기로서의 카스바에 대한 비유와 정반대로 아시아영화는 우리 인식의 오지 어딘가에 알 수 없는 카스바로 자리잡고 있다. 부산영화제의 아시아영화의 창이라는 프로그램이 한국의 관객을 그쪽 영화에 대한 밝은 눈을 갖게 해주지만 아직 인식론적 지도가 그려질 정도는 아니다.

’아시아영화’란 성립할 수 있는가

<칸다하르>

<칸다하르>는 서구의 중재나 번역 없이는 서로를 알 수 없는 아시아의 모습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영화다. 또한 장이모의 <영웅>은 지극히 오리엔탈적인 '아시아'영화다. 이런 점에서 <칸다하르>와 <영웅>은 '아시아'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세계의 ‘헤게몬’이며 슈퍼파워인 미국이 할리우드를 거느리고 있는 것은 별 설명이 필요없는 부분이다. 할리우드와 미국은 서로에게 치명적 유혹이다. 글로벌 자본주의를 주도하는 미국이 그에 걸맞은 글로벌한 문화산업을 창출하는 것은 필연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도나 이란 그리고 한국, 대만, 홍콩 등이 영화적·사회정치적 영화를 생산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보면 그리 필연적이 것이 아니다. 이런 국가의 영화들은 민족-국가 단위와 관계된 내적 필연성이라는 긴장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그리고 강력하게 작용하는 이러한 내적 필연성은 외부의 시선으로 보면 이들 영화를 일종의 침투불가능(impenetrability), 불가입성의 문화생산물로 부상하게 한다.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칸다하르>에서 그 제목의 도시 칸다하르에서 열리는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 색색의 부르카를 입은 채 조랑말을 탄 하얀 부르카의 신부를 앞세우고 사막을 걸어가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떠올려보라. 베일을 쓴 여성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듯, 이슬람 문화 특히 근본주의자의 질서, 그 내부의 작동방식은 불가입성의 이미지로 남는다. 일식이 일어나는 날 자살하려고 하는 자매를 찾아 칸다하르로 입성하려는 아프칸-캐나다 망명 여성의 중재와 번역에 의해서만 이 영화의 서사는 가까스로 판독성을 얻는다. 작은 테이프 레코더에 대고 사건과 심상의 여정을 녹음하는 그녀의 내레이션은 필사적으로 이 불가해한 문화적 종교적 논리를 이해가능한 서사로 끌고가고자 한다. 현지 가이드에게 달러를 주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고 걸을 수도 없는 사막 위의 길. 하지만 그녀는 어딘가에 있을 희망의 길을 묻는다. 이렇게 낯익으면서 낯선 아시아. 서구의 중재나 번역 없이는 서로에게 말걸 수 없는 아시아가 <칸다하르>와 같은 영화에서 부지불식간에 드러나는 셈이다.

<영웅>

‘우리’와 같은 아시아인들에게 아시아영화는 그 이름 때문에 선험적 이해의 길을 열어줄 것도 같고 또 동시에 바로 선험적일 것이라는 추정 때문에 불현듯 침투불가능해지기도 한다. 더구나 한국적 시점에서 아시아는 지정학적으로 동북아시아를 의미하기 때문에 동남아시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를 묶는 아시아의 인식론적 지도를 그리는 일은 매우 어렵다. 또한, 제국주의는 아시아 각국들이 자신의 이웃나라에 대해서는 무지하면서도 파리나 뉴욕, 베를린의 대도시의 거리들과 상점들 이름까지를 기억하게 한다. 근대 국가를 상상적 공동체라고 불렀던 베네딕트 앤더슨은 그래서 식민지 지식인들이 끊임없이 어떤 유령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비교의 유령”으로 예컨대 마닐라의 근대적 건축물을 볼 때 베를린에 있는 그 대응물을 거의 자동적으로 연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영화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강박적으로 들뢰즈를 불러온다거나, 한국의 멜로드라마나 액션영화들을 끊임없이 할리우드영화에 비교할 때 우리는 그 비교의 유령이 거는 주술에 꼼짝없이 사로잡히게 되는 셈이다. 그것은 주술이면서 또한 권력으로부터의 잠재적 승인이다. 참조틀로서의 서구는 이렇게 역사적, 인식론적으로 주변을 떠돌고 우리를 포획한다. 어떻게 서구지향적인 유령으로부터 몸을 빼낼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영화를 통해 새로운 역사와 인식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가?

아시아를 비교연구의 대상으로

대만의 문화연구자인 첸광신은 1997년부터 아시아의 여러 지식인, 활동가들과 함께 “무브먼트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인터-아시아 문화연구”(Inter-Asia Cultural Studies)라는 범아시아적 지식인 운동을 주도해왔다. 첸광신은 위와 같은 물음에 참조틀을 아시아로 바꾸자고 강력하게 제안한다. 즉 서구와 비서구라는 비교의 유령이 출현하는 장소에 인터-아시아라는 포스트를 세우자는 것이다. 아시아 상호간의 대화를 하자는 것이다. 한국과 대만, 그리고 일본과 중국, 홍콩과 인도가 서로의 참조틀, 비교의 지반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인도 학자인 디페쉬 차크라바티의 강력한 탈식민화 주장인 “유럽을 지방화하기” 그리고 나오키 사카이의 “추정적 단위로서의 서구”라는 기획들이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는 데는 효과적인 담론이나 실제로 아시아 상호간의 대화와 접촉을 촉발시키기는 어렵다. 은연중 서구의 참조틀 안에서 비교하는 인식의 관행을 전면적으로 수정하는 것은 사실은 20세기 초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이 한때 발화했으나 이루지 못한 꿈을 이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방법으로서의 중국”이라는 탈서구적 인식의 기반을 주장했던 일본의 중국 학자 미조구치 요조나 유럽만이 아니라 중국, 인도를 비교의 지반으로 하는 삼자 비교방법론을 제안한 다케우치 요시미 등은 분석의 대상으로서의 아시아가 아니라 지식생산을 전화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아시아간의 비교 연구를 일찌감치 주장했던 것이다. 이렇게 참조틀을 인터-아시아로 옮기는 발상의 전환이 가져올 수 있는 효과는 진정으로 아시아 지식인들의 상호연대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소수의 아시아 지역권 전공자들을 제외한다면 문화연구 역시 아시아의 지식, 문화 생산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데 비해 첸광신과 싱가포르, 인도, 중국 그리고 일본의 문화연구학자들 그리고 한국의 조한혜정, 김성례 등은 1998년부터 루틀리지 출판사에서 <인터-아시아 문화연구>라는 저널을 일년에 세 번 발행하고 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미국 내 일본 학자인 나오키 사카이 교수가 주도하는 <흔적>과 미국에서 발행되는 <포지션>이라는 저널은 지금까지의 탈식민문화연구가 동남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지역을 중심 의제로 설정했던 데 반해 동아시아의 식민주의의 흔적들을 역사화하고 이론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나는 <흔적>과 <인터-아시아 문화연구>에 편집진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그 기반 위에서 아시아에 대한 나의 역사적 이해의 부족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 무지가 역사적으로 명령된 것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아시아 문화연구 관련 학회가 열리는 베이징, 도쿄, 인도의 벵골로, 싱가포르, 타이베이 등지로의 여행은 생생한 충격과 영감을 주었다. 특히, 인도네시아에서 있었던 문화연구회의에서 체감했던 제국주의와 세계화란 폭력이 동시대 인도네시아에 남긴 상처에는 진정으로 깊은 슬픔을 느꼈다. 자바에 위치한 수라바야라는 도시에서 나는 네덜란드의 통치, 그리고 장구한 독재, 현재 IMF 위기가 남긴 상처들을 거리의 사람들로부터 직접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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