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늪에 빠지지 말라
아시아라는 지역 단위의 사고가 왜 필요할까? 일단 일본의 ‘대동아공영론’이나 대만의 ‘서진 이데올로기’와 ‘남진론’은 모두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만들어낸 ‘문화상상’이라는 점에서 아시아의 비판적 지성이 다루는 아시아적 상상과 배치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오랜 시간 동아시아 담론에 집중해온 창비가 최근 펴낸 <동아시아의 비판적 지성> 시리즈에 등장하는 지식인들은 국민국가는 당분간 계속 존재할 것이지만 국민, 민족, 인종 같은 범주에 빠져 있어서는 식민주의가 구축해놓은 자기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본다. <인터-아시아 문화연구>의 주간인 천쾅싱은 90년대 후반 대만의 야당조차 동조했던 ‘남진론’이 “주변에서 중심으로 진입하고자 하는 피식민자의 욕망”이라고 단정한다. 천쾅싱은 라캉의 거울이론을 통해 이른바 ‘식민지 정신분석학’이라는 이론적 기초를 형성한다. 즉 피식민자는 식민자를 자기의 거울이미지로 삼아 그것과 자기동일시함으로써 자아를 구성한다. 따라서 피식민자의 문화상상은 식민자의 그것을 그대로 복제하는 과정이 되기 십상이다. 예컨대 남진담론은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문화상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번역본에 불과한 것이다. 천쾅싱은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자>를 인용한다. “원주민은 식민자의 지위를 꿈꾸는 것을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다. 아니 식민자가 되기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식민자의 자리에 앉고 싶어한다.”
<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에서 사카이 나오키는 “일본인의 아이덴티티라는 것은 서구인을 매개로 해서 성립한다”며 천쾅싱과 비슷한 논지를 펼친다. “패배한 곳에서 ‘동일성의 정치’가 시작된다. 이는 패배 이후의 마이너리티의 동일성을 내세우기 위한 운동으로서 일어난다. …마이너리티의 동일성은 메이저리티의 시점을 내면화해서 이뤄진 것인데, 마이너리티의 동일성이란 것은 차별의 폭력을 통해 만들어진 역사적 상처다.” 예컨대 일본인의 아이덴티티가 확립될 때 일본인이 진정한 국제인이 될 수 있다는 식의 ‘일본문화론’은 서양이란 타자의 의식을 내면화하지 않으면 일본인의 동일성을 내세울 수 없는 딱한 처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비판한다. 문제는 마이너리티가 동일성을 추구하는 한, 차별이 일어나는 사회현실은 파기되기는 커녕 온존된다는 것이다.
천쾅싱은 <제국의 눈>에서 “이렇게 분열된 주체와 자기 인식의 불안감이야말로 과거 식민지들이 현재 겪고 있는 정체성 위기의 근본적 특징”이라며 탈식민, 탈냉전, 탈제국의 삼위일체를 이루기 위해 ‘아시아적 상상’을 제시한다. “윤리학적 원칙은 ‘타자되기’이다. 피식민자의 자아, 주체를 내면화하여 (강자가 아니라 약자인) 타자로 되는 것이다. 즉 여성, 원주민, 동성애자, 양성애자, 동물, 가난한 사람, 흑인, 아프리카인 등을 내면화하고, 다양한 문화요소들을 주체성 속에 함께 혼융하여 체제가 구획지어놓은 정체성의 위치와 경계를 넘어서며 계급, 가부장제, 이성애, 인종 쇼비니즘에 의해 강요된 ‘식민’의 핵심관계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는 피식민 약소주체들간의 문화적 동일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아시아 내부의 상호 ‘비교’를 통해 서로의 ‘참조체계’로 삼는 것이며, 이는 자기 동일시할 수 있는 대상과 참조체계의 다원화를 의미한다. 이럴 때에야 우리 자신의 특정한 문화주체성에 대해 새로운 비판적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