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4 여름을 책임질 한국 공포영화 다섯편 [1]
2004-04-20
글 : 김봉석 (영화평론가)

우리의 공포는 무엇일까?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링>과 <식스 센스>는 우리의 공포가 일상적인 영역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말해주었다. 더이상 원혼은 산속의 폐가에만 숨어 있거나, 직접적인 가해자만을 쫓아다니지 않는다. 불특정 다수를 향하여, 휴대폰이나 엘리베이터 같은 문명의 이기를 통하여 분노와 억울함을 토해낸다. 그건 우리의 잘못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지만, 당신이 직접 행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4인용 식탁>을 기억해보자. 단지 그들을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가련한 영혼들은 그 남자를 쫓아다닌다.

지난 여름의 공포를 알고 있다

2003년의 공포영화는 훌륭한 첫걸음이었다. 흥행에 성공을 거둔 영화도 있고,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도 있다. 무엇보다 각각의 영화들은 자신만의 공포에 도전했고, 절반의 성공을 거두었다. 사이코 살인마와 스플래터에만 집착했던 2000년과는 전혀 달랐다. <장화, 홍련>은 전통적인 설화를, 성장의 공포라는 주제로 비틀어 관객을 사로잡았다. 〈4인용 식탁>은 거대한 아파트가 상징하는 현대 문명이 빚어내는, 소통 부재의 공포를 말했다. 성공적이진 못했지만, <거울 속으로>는 거울이라는 기제를 통해 인간과 문명의 정체성을 탐구하려는 야심적인 시도를 했다.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은 소녀들의 질투와 사랑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다. 흉내도 있고, 관념적인 발상도 있었지만 2003년의 공포영화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공포에 근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2004년의 공포영화가 더욱 풍부하고, 더욱 야심에 찬 기획에 도전하는 것은 지난해 공포영화들의 성과에서 출발한다. 올해 공포영화들의 소재는 더욱 다양해졌다. 전형적인 원혼의 복수를 그린 작품도 있고, 공포영화의 전통적인 주제 중 하나인 ‘정체성’의 혼란을 그린 작품도 있고, 인형이나 분신사바 같은 익숙한 소재를 바탕으로 공포를 끌어내는 작품도 있다. 올해는 <령> <분신사바> <알 포인트> <인형사> <페이스>, 이 5편의 공포영화가 관객의 등골을 서늘하게 할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영화는 <알 포인트>다. <하얀 전쟁>의 시나리오를 썼던 공수창 감독의 <알 포인트>는 30년 전 베트남전의 혼령이 불러오는 공포를 그린다. 그 공포는 우리가 겪어낸, 우리가 저지른 ‘역사’의 공포다. 우리의 내면을 돌아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찾아갔던 우리의 공포영화가 이제는 역사에 정면도전하는 것이다. 이라크 파병을 눈앞에 둔 지금, 베트남전의 상흔과 군대라는 집단의 공포를 어떻게 그려낼 것인지 궁금하다. 전쟁의 ‘미시적인 공포’를 이끼의 붉은빛으로 그려내겠다는 <알 포인트>는 7월에 찾아올 예정이다.

인형, 분신사바 등 소재 더욱 다양해져

‘그날’의 흔적이 죽음과 공포를 불러오는 <령>은, 기억하지 못하는 그날을 찾아가는 소녀의 악몽이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과거를 돌아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근원적인 반성이 불가능한 사회다”라고 말하는 감독의 말처럼, <령>은 자기를 찾고 싶어하지만 한켠으로는 회피하는 소녀의 마음을 회색 빛으로 그려낸다. 한국 유일의 공포영화 ‘전문’ 감독인 안병기 감독의 <분신사바>는, “쉴새없는 공포장치들을 이용한 잔재주보다는 관객의 감정 깊숙한 곳을 자극하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말처럼, 전편의 단점을 넘어 정통적인 공포영화에 가까워질 것으로 보인다. 인도에서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건너온 ‘분신사바’라는 주문은 많은 소녀들이 학교에서 이미 행한 적이 있는 익숙한 소재다. 분신사바가 불러낸 ‘무엇’의 공포를 그려낼 <분신사바>는 가장 짜릿한 공포의 쾌감을 안겨줄 것으로 기대한다.

<페이스>는 해골에서 원래의 얼굴을 복원하는 직업의 남자가, 딸의 심장이식과 관련있는 연쇄살인에 얽히며 원혼을 만나게 되는 스릴러풍 공포영화다. “할리우드영화에서 두드러지는 간결한 색채와 사운드, 일본영화가 내세우는 기묘한 공포감”을 아우르겠다는 <페이스>는 <왓 라이즈 비니스>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인형사>는 너무 사실적이어서 오히려 소름끼치는 구체관절인형이 가득한 외딴 미술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버림받은 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고 싶다”는 말처럼, <인형사>는 가해자의 마음을 깊이 파고들어, 그의 슬픔을 안아주는 공포영화가 될 것 같다. 원혼은, 뭔가 억울한 것이 있기 때문에 세상에 남은 것이다. 가해자는 과거의 피해자이고, 슬픔을 분노와 공포로 바꿔버린 가련한 존재인 것이다.

올해의 공포영화들은 그 내용과 주제만이 아니라, 공포의 빛깔에서도 각각의 작품이 두드러질 것이다. 베트남의 정글이 무대인 <알 포인트>는 배경 자체만으로도 가장 인상적이지 않을까. <령>은 <링>과 〈13일의 금요일> <죠스> 등 공포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물’의 공포를 극대화할 것이고, <분신사바>는 반대로 ‘불’의 공포에 도전한다. <페이스>는 어둠 속에서 등장하는 ‘얼굴’의 공포를, <인형사>는 인간과 닮은, 그래서 더욱 두려운 인형의 무서움을 알려줄 것이다.

한국의 공포영화는 이제 막 걸음마를 다시 시작했지만, 그 성과는 출중하다. <폰>은 ‘핸드폰’이라는 도구를 세계에서 가장 먼저 공포영화에 끌어들였고, <장화, 홍련>의 슬프고 아름다운 공포는 해외의 공포영화의 마니아들도 만족할 만큼 매혹적이다. <소름>과 〈4인용 식탁> 역시 영화광의 모험심을 자극하는 공포영화다. 본질에 접근하는 공포영화는, 자기 자신을 다시 만나게 한다. 자신의 믿음, 가치관, 세계를 파열시키지 않는 공포영화는 한순간의 놀람일 뿐이다. 2004년에 만나게 될 공포영화들은,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다시 돌아보게 할 것인가. 올해는 새롭고 순수한 공포, 그걸 꾸며내고 다듬어내는 재능을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