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04 여름을 책임질 한국 공포영화 다섯편 [2] - <령>
2004-04-20
글 : 이영진
사진 : 오계옥
너 아니?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령>

Story● 과거의 기억 찾기

지원은 ‘그날’ 이후, 기억상실과 악몽으로 고통받고 있다. 남자친구 준호와 언제, 어떻게 만났는지조차 모를 정도다. 심리치료를 위해 수영장에 다니지만 별 소용없다. 친구들은 과거의 흔적들을 불쑥불쑥 그녀 앞에 들이민다. 당혹스럽다 못해 이제는 무섭다. 새로운 기억을 갖겠다고 마음먹은 지원. 유학을 결심하지만 이조차 쉽지 않다. 남편이 죽은 뒤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린 엄마는 자신을 어떻게 내버릴 수 있냐며 윽박지른다. 그러던 중 지원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친구들이 한명씩 미쳐가고 죽어가는 걸 알게 된다. 서서히 부상하는 기억. 지원은 친구들의 죽음이 ‘그날’의 사건과 관련있음을 직감한다.

Motive●● 숨바꼭질 노래

김태경(30) 감독은 2년 전 머리나 식힐 겸 인디밴드 공연장에 갔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어둠 속 공연 직전 흘러나온 여자아이의 가녀린 목소리. 마침 스크린에는 일제시대 순사가 단속하는 장면이 투사되기 시작했다. 그때 당시엔 무덤덤했는데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등골이 오싹했다. 어린 시절 숨바꼭질할 때마다 아무 생각없이 불렀던 그 노래가 일제시대 때는 그렇게 불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령>은 이때 받았던 음산한 느낌에 평소 관심을 가져왔던 ‘나는 정말 내가 맞나’ 하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의심을 덧붙인 영화다. 영화 속에서 지원은 과거의 기억을 찾기 위해 술래가 된다. 예전의 자신을 온전히 되찾기 위해서다. 그러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나와 대면해야 하는 상황에 빠진다. “술래잡기 같아. 나만 술래를 모르는 숨바꼭질”이라고 중얼거리는 지원처럼, <령>은 보는 이를 ‘현실 아닌 악몽’으로 초대하여 ‘악몽 같은 현실’을 마주하게 한다.

Model●●● <나이트 메어>

망각의 늪에 던져진 과거의 사건. 그로 인해 계속되는 악몽. 인물들의 일상은 악몽 때문에 끊임없이 위협받는다. 꿈과 현실을 오가는 공포의 궤적은 웨스 크레이븐의 <나이트 메어>와 닮았다. “어릴 적에 보고서 잠을 못 잔 영화이니 <령>에 잔영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감독은 “인물들의 심리적 공포와 전율이 증폭되는 과정을 강렬하게 묘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고 말한다. 공포영화의 인장과 같은 혈흔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 영화의 특징. 대신 물귀신이 나온다. “물을 마시면 자살충동이 인다고 하지 않나. 술 마시고 물에 들어갔다 변을 당하는 일도 많고. 죽음에 대한 근원적인 이끌림 같은 걸 표현하려고 한다. <검은 물 밑에서>보다 좀더 공포스런 상황을 연출하려고 노력 중이다.”

Visual●●●● 회색빛 저주

“물속이 아닌데 어느 순간 물속으로 변해 있는 느낌이랄까.” 감독이 애초 머릿속에 그린 영화의 전체 이미지는 실행이 쉽지 않았다. 간단한 장면이라도 물과 같은 유기체는 CG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던 터다. 감독은 “왜 여태까지 한국에서 물귀신이 나오는 공포영화가 없었는지 촬영에 들어가서야 알게 됐다”고 말한다. 물귀신이 등장하는 후반부의 장면을 제외하고 제작진은 주로 배우들의 연기에 의존하는 실사 위주로 표현하려 했다. 대신 효과적인 촬영과 조명으로 주요 공간 및 캐릭터 등을 강조했다고. “호러 하면 푸르스름한 조명을 떠올리는데 <령>은 회색에 가까운 색감이다. 지원의 집 같은 경우, 리얼리티에 다소 위배되는 걸 알면서도 복도에 갓등을 써서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꾸몄다.”

Director's Commentary●●●●● 나는 정말 내가 맞나

“자명하다고 믿었던 것이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됐을 때의 충격은 말로 할 수 없다. <식스 센스>나 <디 아더스>가 그렇잖나. 우리 또한 마찬가지다. 과거를 돌아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근원적인 반성이 불가능한 사회다.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누구나 갖고 있다. 이번 영화에서 그걸 느끼게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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