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인들의 파병반대 선언 [2] - 박찬욱
2004-07-20
노무현 대통령에게 고하는 편지

안녕하십니까? 영화감독 편지를 받으니 또 스크린쿼터 문제냐 싶어 짜증부터 나시죠? 하지만 참으십시오, 오늘은 그 얘기 아니니까요. 이번 이슈는 훨씬 더 짜증스러운 이라크 파병 문제랍니다.

요즘 같으면 미국 사람 마이클 무어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무어가 누구냐고요? 왜 그 <화씨 9/11>이란 기록영화 만든 감독 있잖아요, 그이 말입니다. 남프랑스 어딘가에서 황금종려상을 뺏겼기 때문이냐고요? 정녕 사람을 어이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신단 말입니까! 제 질투의 까닭은 그게 아닙니다. 그건 무어 감독이 맘먹고, 대놓고, 질리도록 욕해대는 상대가 바로 조지 부시이기 때문입니다. 좀더 친절하게 말씀드리자면 ‘노무현이 아니라’ 부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도 당신을 그런 식으로 공격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감히 생각건대, 만약 제가 미국 감독이라면, 또는 부시가 한국 대통령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아니 차라리 지금 한국의 대통령이 박정희나 전두환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누가 봐도 악당인 자를 욕하기란 얼마나 쉬운 일일까요? 그 얼마나 후련하고 통쾌한 일일까요?

파병, 대통령을 세운 국민들을 저버리는 행동

대통령님께서도 그 옛날, 민주화 투쟁 대열 맨 앞줄에서 독재타도 구호를 외치면서, 국회 청문회에서 탁상 한번 내리친 다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면서, 보수우익 이회창과 한나라당을 처절하게 비판하면서, 얼마나 신명나셨습니까? 그때 우리 국민들 속은 또 얼마나 시원하게 뚫렸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내가 부시만큼이나 나쁜 놈이냐는 항변이 들리는 듯하군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부시가 훨씬 나쁩니다. 그러나 부시는 적어도 실망스럽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실망스럽습니다. 애초에 부시에게 누가 무슨 기대를 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이 지금 이렇게 행동하리라고 누가 짐작이라도 했겠습니까. 그는 기대에 부응했고 당신은 배반한 것입니다. 배신이 못된 행동인 이유는, 사람에게서 희망을 앗아가기 때문입니다. 믿어줘봐야 돌아오는 게 고작 이런 반응이라면 누가 누구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을 수 없는 사람끼리 모인 사회라면 거기 어떤 희망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저는 지금 한때 개혁세력의 영웅이었던 바로 그 사람을 비판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당신을 향한 비판은 어쩌면, 우리 세대 전체가 지향해온 가치에 대한 부정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개혁 세력의 한 아이콘인 당신을 우리가 어떻게 비난한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일종의 자살폭탄공격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당신을 비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민의 한 사람을 죽이도록 방치한, 또 앞으로도 계속 죽음의 위협에 노출시키고자 노력하는 지도자를 계속 지지하는 행동은 일종의 자살행위가 아닐까요?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은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습니까? 아니, 정확히 말해 우리나라는 어떻게 당신이라는 대통령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이라는 여정은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린 끝에 마침내 이 나라가 당신을 갖게 되었는데, 이제 당신쪽에서 먼저 이 나라 사람들을 버리려 하는 것입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도대체 누구입니까? 휴머니즘보다 경제적 이익을 앞세울 권리를 ‘누가’ 당신에게 선사했습니까? 자국민을 살해하라고 부추기는 명령을 내릴 자격을 ‘누가’ 부여했습니까? 부시 정권의 협박에 굴복할 자유를 ‘누가’ 허락했습니까? 즉, 대통령으로서 행사하는 그 모든 권한을 ‘누구’에게서 받은 것입니까? 절대로, 그 ‘누가’가 과거 그토록 당신을 흠모했던, 그래서 당신을 정부 최고위에 앉힌 그들이라고는, 절대로 말하지 마십시오.

지금 미국에서 마이클 무어는 부시 재선을 막기 위한 캠페인에 한창입니다. 이제 조만간 여기 한국에서 누군가 노무현 퇴진을 위한 운동을 시작하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 만약 그런 비극이 정말 벌어진다면 보나마나 그것을 주동하는 ‘누군가’란, 다름 아닌 당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사람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몹시 화가 나 있거든요. 배신감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거든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생명과 인권과 진실과 진보와 평화와 자존과 희망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일 테니까요. 당연히 그는, 노무현도 바로 그런 사람인 줄 알았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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