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녹화 테이프가 하나 있다. 그 테이프의 녹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일부 편집된 내용으로 방영되었기 때문에 원본 테이프의 시간은 알 수 없다). 화면 비율은 DV로 찍힌 것으로 보아 두 가지 비율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그중 3 대 4의 비율을 택했다. 김선일씨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의 수를 생각하면 1.66 대 1의 비율이 더 효과적으로 보이지만, 이 테이프는 처음부터 텔레비전 방영을 목표로 만든 비율인 것 같다. 그래서 텔레비전 방영시 레터박스 처리될 수 있는 것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이라크어가 각국어로 번역될 것을 염두에 두고 그 비율을 생각한다면 1.66 대 1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 테이프는 알자지라에 제공되었지만, 결국 이 테이프가 해외방송에 방영될 때 번역의 문제가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은 뒤에 늘어서 있는 ‘유일신과 성전’(이라고 알려진 무장단체)의 테러리스트들과 그 앞에 앉아 있는 김선일씨가 전부이다. 배경은 장소를 알 수 없게 별다른 특징이 없는 벽을 기대고 서 있으며, 그 벽에 ‘유일신과 성전’을 나타나는 커다란 휘장이 걸려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장소를 추정할 수 없게 만들면서, 동시에 자신들을 나타내는 효과적인 미장센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여기에 더해 좀 복잡한 문제가 있다. 알자르카위로 추정되는 복면 괴한과 그 주변의 테러리스트들이 들고 있는 총기의 종류와 발음 악센트, 인질을 앉혀놓은 의자의 색, 그리고 벽면 색과 미군 이라크 수용소 사진을 추정해서 첫 번째 미국인 인질 테이프 자체가 미국의 조작이라는 음모론이 있다.
그러나 그 문제와 이 테이프의 진위 여부를 판독하는 것은 내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일이다). 카메라의 구도는 좀 특별하다. 생각하기에 인질로 잡힌 김선일씨를 잘 보여주기 위해 화면 비율 3 대 1의 지점에 놓을 것 같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구도상으로 김선일씨 부분은 화면 프레임에서 상반신 바스트숏만 나오며, ‘유일신과 성전’ 인물들이 거의 니숏으로 잡힌다. 아마도 이 구도는 ‘유일신과 성전’을 나타내는 휘장을 중심에 놓고 마스터숏으로 잡은 것으로 보인다. 별다른 기교없이 찍혔으며, 우리가 볼 수 있는 테이프만으로는 녹화 카메라 기종을 알 수는 없을 것 같다. 조명을 하지 않았지만, 배경의 벽이 보여주는 반사광과 인물들의 그림자를 보건데 실내의 차단된 공간에서 키 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메인 전광등 아래서 찍힌 것으로 보인다. 전체를 원 테이크로 찍지는 않았지만 일체의 인위적인 편집을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해 거의 원본 테이프에 손을 대지 않았다. 몇번의 카피를 거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화질이 거칠기는 하지만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 카메라는 고정된 장소에서 고정된 앵글로 찍혔으며, 의도적으로 아무런 감정없이 찍혔다. 인물의 반응에 따라 카메라가 움직이지 않으며, 김선일씨의 모습이나 표정, 얼굴, 자세, 행동을 자세히 보여주기 위한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는 말하자면 카메라의 개입이 없다. 그러나 개입하지 않은 카메라가 오히려 김선일씨의 대사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테이프의 효과는 사실상 이미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운드에 있다. 김선일씨의 말은 알자르카위가 요구한 것인지, 그 자신이 한 말인지는 (내가) 알 수 없다. 다만 그 내용은 명확하며, 오해의 여지가 없다. 가장 중요한 말, 나는 살고 싶다. 그러나 그는 죽었다. 더 정확하게 그를 살리지 않았다.
김선일 테이프는 짓밟힌 휴머니즘의 유령
(영화평론가로서의) 나는 이것을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 녹화 테이프에 대해서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않는 점이 하나 있다. 이 테이프가 ‘이제부터 항상 현재로서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김선일씨가 살아났다면 이 테이프는 과거의 역사 뒤로 물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김선일씨가 죽는 순간 이 테이프는 역설적으로 불멸성을 획득했다. 왜냐하면 이제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살려달라고 하소연했던 그를 살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을 하소연한 그 순간은 앞으로 영원히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우리에게 하소연하게 될 것이다. 불가능의 역설. 그러므로 이 테이프에 담긴 내용은 항상 우리의 휴머니즘을 질문할 때 실제시간이 될 것이다. 이 말이 중요하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도 우리는 녹화 테이프의 저 살려달라는 비명과 함께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판의 현장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녹화 테이프와 함께 부끄럽게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이 테이프는 미안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지금의 정부)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입으로 휴머니즘을 이야기할 때마다 돌아와서 제발 살려달라고 하소연할 것이다. 비유가 아니라 그 화면이, 그 이미지가, 그 얼굴이, 울부짖으면서, 비명에 차서, 우리에게, 아주 구체적으로, 무엇보다도 직접적으로 한 인간의 있는 힘을 다해서 하소연할 것이다. 그 앞에서 휴머니즘을 말하는 것은 위선이다. 지금의 정부가 퇴진한 십년 뒤에도, 찬성을 찍은 국회의원들이 다 죽은 백년 뒤에도, 그리고 다시 천년 뒤에 (혹시 대한민국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그저 역사 안의 국호만으로 남는다 할지라도) 2004년 대한민국에 살았던 인간들의 휴머니즘에 대해 질문할 때마다 ‘라이브’하게 돌아와서 우리의 휴머니즘에 대해서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살려달라고 울부짖을 것이다. 그렇게 이 녹화 테이프는 살아남은 우리를 영원히 죽기 직전의 그 시간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죽기 직전의 순간에 번번이 무기력해질 것이다. 같은 장면의 영원한 반복. 테크놀로지의 시대가 보여주는 플래시백의 끝없는 재생 효과가 가져온 지옥의 영겁회귀. 아무리 사과하고 끝없이 용서를 빌어도 녹화 테이프는 그보다 더 오래 살려달라고 호소할 것이다. 그 어떤 후회도, 그 어떤 반성도, 그 어떤 용서도 오늘날 녹화 테이프보다 더 진실되지 못하다. 그 어떤 미사여구도 재생된 장면 앞에서 잘못의 시인 이상의 의미를 얻지 못한다. 김선일씨는 지금도 우리 앞에서 하소연하고 있다. 그렇게 간절하게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다. 그는 죽었지만, 그는 녹화 테이프 속에서 지금도 우리의 결정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이 녹화 테이프는 우리 시대의 짓밟힌 휴머니즘에 대한 유령이다. 이 테이프는 하나로 끝나야 한다. 정말로, 정말 끔찍한 말이지만, 이 녹화 테이프가 우리 시대의 예고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