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세계가 바라보는 한국영화 [3] - 미국 ③
2004-08-10

<LA 타임스> 2004년 4월2일 금요일자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느리지만 확실하게 관객을 홀리다 - 케네스 튜란/ <타임> 영화평론가

일단 제목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인 것만 봐도 이 영화가 <킬 빌>류의 영화가 아님은 분명하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이 느긋한 한국영화는 타이틀이 암시하는 만큼이나 명상적이고 아름답다. 그런데 의외로 일단 영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관객을 몰입시키는 힘이 대단하다. 이 영화의 감독이, 한국 영화계의 악동으로 악명 높은 김기덕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킬 빌>류의 영화를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더욱 놀랄 만하다. (중략)

오프닝신에서 고요한 산중 호수 한가운데 자리잡은 작은 절을 소개하는 파노라마 숏은 이 영화가 상당히 우화적일 뿐만 아니라 사건들이 여유롭게 진행될 것임을 암시한다. (중략) 사시사철 변하는 호수의 그 놀랄 만큼 평정한 이미지야말로 인생과 생명의 순환을 이야기하는 이 담담한 우화를 기대 이상으로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데 핵심 역할을 한다. (중략)

<봄 여름…>의 도입부인 봄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수련 깊고 현명한 노승(오영수)과 마음속에 어리석음을 한 자락 감춘 활기찬 동자승(김영민)을 만난다. (중략) 봄 에피소드에서 시작된 노승과 동자승 사이의 작은 갈등은 계절이 바뀜에 따라 반복된다. 분명, 삐딱하게 보자면, 이 일련의 사건들은 그다지 의미심장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영화의 감정과 액션들이 종종 슬로 모션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점에서 관객이 끝내 지치고 말 위험도 있다.

하지만 가을 에피소드에서 젊은 스님 역을 직접 연기한 김기덕 감독은 영화가 이런 위험에 빠지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감독은 구체적인 불교의 수행 과정을 중심으로 영화를 구성했을 뿐 아니라 촬영감독 백동현의 멋진 풍경 사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 있다. 반짝이는 호수의 물결이라든지 푸른 잎에 반사된 빛 같은 평범한 이미지들도 이 영화에선 매혹적이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영화를 기획하고 감독한 김기덕 감독이 전심전력했음이 느껴진다. <봄 여름…>을 관객을 홀릴 만한 영화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심감과 할말이 분명히 있다는 확신에 찬 태도로 김기덕 감독은 실제로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음을 영화로 증명해 보였다.


<스크린 데일리> 2004년 6월7일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평

제목이 그나마 제일 멋지네 - 피터 브루넷/ 영화평론가

홍상수의 칸영화제 진출작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의 가장 큰 미덕은 아라공의 시에서 따온 그 제목에 있다. 영화는 반듯하게 구성돼 있고, 한국 도시인의 비속한 언동을 지켜보는 건 흥미로운 일이지만, 보는 이의 감정을 공략하지는 못한다. 영화에는 인상적인 순간도 더러 있고, 섹스신도 많지만, 로메르 식의 끝없는 수다와 브레송식의 미디엄 숏 롱테이크는 지루하게 느껴진다.

홍상수가 일상적인 사회 탐구에 애쓴 흔적은 보인다. 혼란에 빠지고 쾌락에 기대면서, 현대화의 경제 성장이 야기한 여러 가지 악덕에 휘둘려 고통받는 한국 젊은이들을 그는 메마른 시선으로 보듬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의도가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그보다 그는 현대 한국 버전의 <쥴 앤 짐>을 지향한 것 같고, 그 때문에 이도 저도 아닌 결과를 낳고 말았다. 대중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스토리를 따라가기가 힘들고, 보기에도 좋지가 않다.

영화는 오늘의 한국 문화에 대한 논쟁을 품고 있지만, 서구 관객으로서 이를 포착하기란 쉽지 않다. 이 밖에 홍상수는 한국인의 섹스에 대한 관심을 심각하고도 웃긴 톤으로 드러내려 했지만,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수준을 넘어서는 통찰은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는 대만 감독 차이밍량의 영화들을 연상하게도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보면 은근하면서도 배꼽 잡게 하는 쾌감을 선사했던 그 영화들과는 다르다. 간단한 문장이 되풀이되는 반복적이고 산만한 수다는 대개 이런 장치가 유도하게 마련인 유쾌함을 주지 못한다.

헌준의 회상 속에서 강간당한 선화를 씻겨주는 장면처럼 매우 강렬하고 중추적인 장면들도 있고, 엔딩 즈음에 문호와 학생들의 관계로 집중하려는 노력도 보인다. 그러나 이런 순간들도 흘러가버리고, 중요할 수도 있었던 이야기들은 결국 형상화되지 못했다.


<뉴욕 타임스>에서 본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인간의 본질을 함축한 5개의 삽화 - A. O. 스콧/ 영화평론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절묘할 만큼 단순한 영화다. 김기덕이 각본과 연출을 담당한 이 영화는 호수를 끼고 있는 그림 같은 한국의 외딴 산을 단일 로케이션으로 촬영됐다. 그리고 이 영화는 한 스님과 제자 사이의 관계에 중심을 두지만 캐릭터의 이름은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노래, 경험의 노래>(Songs of Innocence and Experience)처럼, 이 작품의 서정적인 명백함은 깊고 세련된 예술적인 감각의 신호라고 할 수 있다. 계절의 흐름과 함께 5개의 날카롭고 간결한 비네트(vignettes)를 통해 김 감독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정수를 분리시켰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와 함께 인간의 경험을 이해하고 함축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챕터인 ‘봄’은 정신적인 수양을 주제로 한 것으로, 노승이 장난에서 비롯된 동승의 잘못된 행동을 직접 느낄 수 있도록 한 동시에 때로는 수수께끼 같은 훈계를 통해 가르친다. 짐승을 괴롭힌 동승에게 돌을 매다는 내용은 단순히 슬랩스틱 같은 징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이와 함께 책임과 의무감을 가르치려는 단호함을 볼 수 있다.

작품 속 다른 챕터에서 나오는 동물들- 꼬리가 붓으로 이용되는 고양이, 기묘한 수탉, 무표정한 거북이 등- 은 인간애에 대한 자만함을 말없이 지적하는 듯 이솝 우화적인 은유법을 통해 자연 세계를 상징한다. 노승과 제자는 극심하게 격리된 곳에서 생활한다. 그들의 작은 암자는 호수 가운데에 떠 있고, 인근 수마일 내에 있는 유일한 거주지로 보인다. 그러나 바깥 세계의 밀정들이 가끔 그들을 찾아온다. ‘여름’에서 이들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암자를 찾은 한 젊은 여인을 맡게 된다(여인의 옷차림으로 이 작품이 현대사회를 배경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청년이 된 제자는 젊은 여인과 관계를 갖고, 이는 그가 순수에서 경험으로 떨어지는 전환점을 표시한다.

육욕에 대한 노승의 경고가 ‘가을’에서 증명되자, 처음에는 지나치게 멜로드라마식이고 글자 그대로 표현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 감독의 작품은 격렬하고 연극적인 느낌을 주는 순간들이 있다. 조화와 평화의 전형을 그리려면, 어느 정도의 불협화음과 부조화를 반드시 인내해야 한다. 이 작품에서 사용된 음악은 때로 이같은 인내심을 시험하는 것 같다. 일부 음악은 노승이 젓는 낡은 보트보다는 침몰하는 타이태닉에나 어울릴 것 같다.

그러나 이야기는 계절의 변화와 함께 더 큰 생명 또는 인생의 순환과 자연스럽게 맞물려 완벽함을 이루어낸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놀랄 만한 일들이 발생한다. 챕터가 지나가면서 얼마나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는지 확신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종반에는- 우리가 다시 봄으로 돌아왔을 때, 동승과 이제는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린 노승을 보면서 마치 암자에 있는 부처상처럼 이 작품에서 무게와 인력을 느끼게 된다. 이 작품은 현대 예술작품이라기보다는 발견되기를 기다리며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견고한 고대 예술품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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