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세계가 바라보는 한국영화 [5] - 일본 ②
2004-08-10

<키네마준보> 6월 하순호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거듭 되는 만남의 유예 - 우다가와 유키히로/ 영화평론가

현재 한국영화의 융성은 90년대 말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한국영화가 새로워졌다는 선명한 느낌을 최초로 준 것은 허준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였다. 그 이전의 한국영화가 전반적으로 감정표현이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한 경향이 있었던 데 비해 상당히 억제되고 자연스러운 게 신선했기 때문이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이재용 감독도 허 감독처럼 98년에 데뷔했고, 나이는 2살 아래인 65년생이다. 그도 억제하는 스타일이 특징이다. 하지만 영화 제작 스타일을 보면 허 감독과 대조적이라 해도 좋을 만큼 다르다. 허 감독이 등장인물의 감정, 기분을 되도록 자연스러운 감촉으로 전하기 위해 과장된 몸짓을 배제하는 데 비해 이 감독은 장면의 자연스러운 분위기보다도 작품 전체의 구도와 계획을 우선시한다.

그의 데뷔작 <정사>는 주연배우인 이정재와 이미숙이 심야의 공항에서 둘만 있게 되는 장면부터 시작하지만 여기서 둘은 아직 만나지 않는다. 거기에선 그저 함께 있게 된 관계없는 두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만남은 다음으로 유예되고 사랑이 시작되는 것은 또 그 다음이다. 일본에선 2001년 먼저 공개됐던 두 번째 작품 <순애보>에선, 만남이 늦춰지는 것이 더욱 철저해진다. 서울의 공무원 이정재와 도쿄 여고생 다치바나 미사토의 일상이 어떤 접점도 없이 반복되며 그려지고 실제 만남은 끝나기 직전에 이뤄져 거의 연애영화라고 말하기 힘든 기묘한 영화였다. 사랑의 만남을 되도록 뒤로 미루려고 하는 이재용의 구도는 면밀히 계산된 구성과 섬세한 손질로 달성된다. 고요한 표정 아래 마음의 열정을 품고서 주인공들은 만남을 기다린다.

세 번째 작품 <스캔들…>에선 이전 두 작품과 같은 구도는 눈에 띄지 않는다. 배용준과 전도연은 영화가 시작하면 곧 만나고 이미숙과는 이미 잘 아는 사이다. 구도와 계획의 주체는 작자로부터 등장인물로 옮겨졌다. 라클로의 원작 <위험한 관계>를 본떠 이조시대의 연애유희에 숙련된 여자와 남자가 순진하고 정조 높은 여자를 노리는 게임을 꾸민다. 계획은 있지만 감정은 억제되고, 작자의 의도는 눈에 띄지 않는 ‘쿨’한 스타일이 유지된다. 그리하여 여기서도 사실은 만남의 유예가 일어난다. 부도덕한 계획이 자신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진실한 사랑과의 만남을, 나중에 일으키고 말기 때문이다.


<키네마준보> 6월 하순호 <실미도>

액션의 극한에서 개인의 존엄을 묻는 역작 - 이토 다카시/ 아시아 오락문화 연구가

1968년 4월, 한국 정부는 사형수와 무기징역수 등으로 특수부대를 편성했다. 무인도에 모여 3년에 걸친 가혹한 훈련을 받은 그들의 임무는 단 하나. 북한에 잠입해 김일성 주석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설정만 보고 어떤 이는 로버트 알드리치의 <특공대작전>을, 어떤 이는 히지가타 데쓰토가 만든 자주영화의 쾌작 <특공임협자위대>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실미도>는 이런 통쾌한 액션의 계보로 연결될 수 없는 작품이다. 이런 전대미문의 설정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강우석 감독은 “재미있고 우스운 영화가 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지만, 사실 <실미도>는 그 말대로 장식적인 구도나 기교적인 편집으로 작가성을 과시하지 않는, 거칠고 세련되지 않은 영화로 완성됐다. 그렇다고 시종 무겁고 괴로운 공기가 짓누르는 ‘사회파식’ 고발영화라는 것은 아니다. 관객서비스랍시고 필요없는 여성 캐릭터를 삽입한다든지, 쉬어가는 회상신을 집어넣는 잘못된 계산은 배제하면서도, 부원들이 훈련받는 장면까지는 모험소설적인 기분까지 든다.

‘사실에 근거한 영화’라는 무게가 효과를 발휘하는 건 후반이다. 섬에서 가혹한 훈련이 계속되는 사이 한반도의 정치 상황은 대결로부터 대화로 옮겨가고 특수부대는 무용지물을 넘어 방해물이 된다. ‘범죄자로 죽을 것이냐, 영웅이 될 것이냐’며 몰아세우던 국가가 이번엔 ‘이제 너희들은 필요없다’며 그 존재를 말살하려는 것이다. 이런 부조리에 남성들의 혼이 타오른다. 그들의 마음에 남아 있던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일어선다. 적은 국가권력, 표적은 청와대. 목숨을 건 반란이 시작된다. 그 싸움은 복수를 위한 것도, 살아남기 위한 것도 아니다. 다만 자신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그래서 그 싸움의 한가운데 부대원들은 자신의 피로 이름을 써 남긴다. 대원에 설경구, 지휘관 안성기라는 연기파를 모아놓은 연기진이 여기서 살아난다. 이 영화가 액션영화의 포장 아래서도 어떤 인간도 존엄하며 그것을 짓밟는 어떤 이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보편적인 주제를 달성하는 것은 그들의 연기력이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투캅스>를 봤을 때 실망했고 평이 좋았던 <공공의 적>에도 별로 공감 못했지만, 이번만은 강우석에게 경의를 표한다. <실미도>는 존 프랑켄하이머를 비롯해 지금은 사라진 기골 있는 영화작가의 작업, 또는 조지 C. 스콧의 분노 넘치는 역작 <격노>를 계승하는 작품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돼야 할 사실을 품고 있는 것일까.


영화예술 407호 2004년 봄호 <태극기 휘날리며>

화려한 가식미, 한국전쟁의 본질을 흐리다 - 모리모토 수이치/ 프리 저널리스트

강제규 감독의 전작 <쉬리>가 일본에서 공개된 지 4년이 지났다. 남북 분단의 현실과 러브스토리를 엮어가며 할리우드에 뒤지지 않는 액션 묘사와 스펙터클을 더해 오락영화로서 대단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방영돼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가 보았지만, 어느덧 영화에 푹 빠져 끝까지 보고 말았다. 한석규와 김윤진 등 배우진, 특히 인민군을 연기한 최민식은 매력적이라 테러리스트라지만 무심결에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쉬리>의 광채는 아직도 퇴색하지 않았다.

그 강제규 감독의 신작 <태극기 휘날리며>는 지난 4월3일 기준으로 1109만명을 동원해, 한국에서 최고의 관객 기록을 세웠다. 대략 국민의 4분의 1이 보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처음부터 세계 배급을 염두에 두고 전례가 없는 규모로 촬영했으며,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형제애를 그렸다고 한다. 초대작이라는 선전문구에 일말의 불안을 안고 보았더니….

결혼을 앞둔 형 진태는 아버지가 죽은 뒤 구두닦이를 해 가계를 지탱하면서 동생 진석의 대학 진학에 꿈을 건다. 일만 하는 어머니, 약혼자의 동생들과 함께 가난하지만 행복한 생활을 해왔지만 전쟁이 터지자 형제는 강제 징용을 당하고 만다. 진태는 전투에서 공을 세워 동생을 제대시키려는 생각으로 귀신처럼 싸우며 화려한 전과를 올려간다. 부하의 죽음에도 개의치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포로를 학대한다. 진석은 형의 그런 변모와 형의 희생으로 전쟁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반발하지만….

미국과 중국의 개입으로 공격과 수비가 정신없을 정도로 바뀌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해 그려낸 전투장면은 과연 시간과 돈을 투자한 만큼 박력이 있었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너무나 유사해 흥미가 줄어들고 말았다. 설정과 묘사에서 노골적이기 그지없는 미국영화를 모방하는 것이 한국영화의 활력이라고 너그럽게 봐주는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했건만.

그 가운데 서울의 점령군이 남북 진영으로 교체될 때마다 인민재판으로 격렬한 보복전쟁을 벌인 것을 시사하는 장면이 있어 잔혹한 전투장면보다도 더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1천만 이산가족의 문제를 포함해 전쟁의 말할 수 없는 부분과 현대에 대한 영향에까지 파고든 묘사를 기대한 사람들이 한국에서도 적지 않았던 모양이지만, 극중에선 깨끗하게(?) 비켜갔다. 거기까지 갔더라면 파탄이 있더라도 괴작이 됐을지도 모르지만, 감독 자신이 복잡한 구성은 피해 어느 정도 도식화된 스토리로 말하는 것을 선택한 면이 있다.

‘격화소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게끔 영화는 어디까지나 형제 두 사람의 이야기에 수렴된다. 그 밖의 등장인물은 그들의 갈등을 높이기 위한 역할만 우선돼 각각의 캐릭터를 개성 있게 그려냈던 <쉬리>에 비해 떨어지는 느낌이다.

역시 대작인 만큼 미리 최대공약수로 정리되는 운명을 거스르진 못했나보다고 한탄을 했지만 2시간 반의 상영시간이 결코 고통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쉬리>에서 보여줬던 세련된 연출과 적확한 묘사의 화려한 맛은 건재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엔 대작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좀더 마음대로 만든 작품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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