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예술> 407호 2004년 봄호 - <박하사탕>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살인의 추억>
역사의 망령을 껴안고 현재와 공명하다 - 기타고지 다카시/ 영화평론가
세계에서 주목받는 한국영화의 선풍은 역설적으로 한국사회의 급속한 경제성장의 거품을 터뜨린 통화위기 직후에 시작됐다. 이에 대해 한국의 영화연구자 김소영은 1998년 이후 한국사회에서의 ‘영화적 호황’과 ‘경제적 불황’을 기묘한 공존이라 부르며, 1929년 대공황의 끝에 막 시작됐던 1930년대 할리우드의 황금시대를 상기시킨다(<유레카> 2001년 11월호)고 했지만, 여기선 단지 다음과 같은 점만 지적하겠다.
한국영화의 번성이 고도의 대중소비 사회에 이른 것을 배경으로 한다 하더라도, 지금의 대중소비 사회가 단순히 경제적 번영의 산물이 아니라 그 좌절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이야말로 중요하다. 요컨대 현재 한국의 대중소비 사회는 경제적 번영 등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고통스런 인식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장이기도 하다. 무성에서 토키로 극적인 전환에 성공한 30년대 미국영화가 이른바 ‘고전적 영화’의 골격을 확립하면서 경제 불황의 직격탄을 맞아 가난에 시달리던 노동자와 농민의 모습을 효과적인 소재로 삼은 것처럼, 현재의 한국영화는 경제성장을 향해 돌진해온 사회의 번영뿐 아니라 그 와해의 광경도 피사체로 삼고 있다.
<박하사탕>의 시선 : 역사의 필연화
그런 의미에서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역시 상징적인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거기에선 영호라는 평범한 인물의 파란만장한 생애가 자살 직전의 광경부터 거꾸로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며 그려진다. 불황에 따른 사업 실패와 결혼생활 파탄, 사업가로서 경제적인 성공, 반체제운동의 탄압에 손을 더럽혔던 형사 시절, 소박한 공장 노동자로서 지내던 나날…. 영호의 생애를 매개로 한국 현대사를 소급하는 말들을 배열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1998년 이후 한국영화의 특징은 한국이 경제성장과 그 좌절이라는 역사의 사이클을 끝냈다는 점을 배경으로 서두르며 빠뜨려왔던 역사를 ‘리사이클’(이야기화=소비)하려는 전략의 채용이다. <박하사탕>으로부터 최대한의 가능성을 끌어낸다면, 최후의 장면에서 강가에 잠시 머물던 젊은 날의 영호에게는 이제까지 우리가 목격해온 가혹한 역사-이야기가 다시 한번 기다리고 있을 뿐, 거기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고 생각할 수 없다. 역사를 불가피한 필연으로 보려는 이런 태도는 예를 들어 한국산 블록버스터의 전형인 SF 대작(?) <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 미묘하면서도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온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수정주의적 역사관
만일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되지 않았다면 지금도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 지배가 계속됐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이 영화의 이야기는 전개된다. 2009년 일본 제3의 도시라는 지위에 만족하는 서울에서 독립을 되찾으려는 민족파의 지하운동(테러리스트? 그렇다면 한국의 대테러 전쟁 참여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이 대다수 ‘조선계 일본인’들로부터도 고립된 상황에서 끈질기게 계속된다. 그들은 알고 있다. 어떤 일본인이 1909년으로 시간여행을 해 역사에 개입해 이토 암살을 실패하게 만든 결과 ‘거짓의 역사’를 현재 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따라서 민족파가 노리는 것은 다시 1909년의 하얼빈에 돌아가 안중근을 민족의 영웅으로 되돌려놓고, 원래의 정당한 역사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제작과정에 일본 내 역사 수정주의의 고양이 영향을 끼쳤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역사란 것은 픽션이며 어떻게든 바꿔쓸 수 있다는 역사 수정주의적인 주장에 대한 비판을 이 영화로부터 읽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본쪽에 의한 낯 두꺼운 역사 바꿔쓰기는 규탄하고 바른 역사의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이 영화- 작품으로서의 지루함은 제쳐놓더라도- 는 정당한 주장을 담은 영화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역사 수정주의에 대항해 민족파가 채용하는 전략도 역사 수정주의의 변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자들도 결코 역사를 왜곡하려는 목적으로 역사교과서를 다시 쓰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관점에서 본) 역사기술의 왜곡을 수정하려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바람이다.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말한다면, 역사기술은 정당한 역사를 향해서 수정할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는 태도가 <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 일본 역사 수정주의의 사이에 공유된다. 그리하여 이 둘은 역사의 안이한 리사이클쪽으로 움직이는, 역사의 종언 이후(?) 소비사회의 산물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관계에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어떤 재앙을 당한 공동체는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그 원인을 찾아내고 죄인을 벌하거나 원인을 극복해 흐트러진 질서를 회복시킨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선 어떤 죄가 범해진 뒤 범인이 체포되고 벌을 받지만, 그 반대는 없다. 무엇인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그 원인을 과거에서 구하지 미래에서 구하진 않는다(<마이너리티 리포트>가 그린 세계는 이런 점에선 독창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2009 로스트 메모리즈>를 바라보면 이렇다. 일본인은 조국의 패전이라는 비극을 수정하려 과거로 거슬러올라가 원인이 되었던 이토 암살사건을 없앤다. 한편 조선민족파도 거기에 대항해 과거로 돌아가 왜곡된 역사를 재수정한다….
<살인의 추억>, 떠나지 않는 역사의 망령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수정주의적 사관과 다른 태도를 찾아야 할 것이다. <박하사탕>은 역사를 거스르는 조작을 역사 수정주의와 공유하면서도, 처음으로 돌아간 역사가 다시 불가피한 비극을 반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렇지만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의 결말과 마찬가지로, 역사의 바꿔쓰기와 역사=비극 이전의 목가적인 광경으로의 회귀를 암시하는 가능성까지 부정하진 않는다. 여기서 현재의 한국영화의 역사관 또는 기억에 관한 태도를 고찰하는 데 중요한 작품인 <살인의 추억>을 마지막으로 불러내고 싶다. 1986년부터 91년에 걸쳐 서울 근교의 농촌에서 실제 일어난 연쇄 여성 강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서울올림픽 직전의 한가한 농촌의 풍경, 북한과의 군사적 긴장관계, 학생들의 반체제 데모 등을 시대배경으로 효과적으로 짜넣어가면서도 단순한 연쇄살인물로 즐길 수 있을 만한 긴장을 마지막까지 유지한다. 하지만 여기서 강조할 것은 <살인의 추억>이 역사를 교묘하게 리사이클하는 태도를 지금의 한국 오락영화와 공유하면서도 그 주류로부터 의연하게 선을 긋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다뤄진 어둡고 참담한 연쇄살인 사건은 미해결로 끝났다. 따라서 단순한 과거에의 회귀 또는 역사=이야기화를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는 관점이 봉준호의 명쾌하며 중후한 연출로 우리에게 제시된다. 앞의 구도로 돌아가면 모든 공동체는 자신을 덮친 재앙의 원인을 과거에서 구하고 그것을 없애 질서를 회복하려고 한다. 하지만 <살인의 추억>에서 전개되는 사건은 그러한 악마 쫓기 같은 작업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가 히트하며 사건의 재조사 요구가 한국에서 높아졌다지만, 미해결의 사건=재앙은 결코 질서의 회복이나 상처의 치료를 주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흔적=망령으로서 공동체에 계속 들러붙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나가야 할 ‘역사’가 아닐까.
자크 데리다의 논의를 참조해 말한다면 (포스트 콜로니얼이 아니라) 네오 콜로니얼한 상황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없앨 수 없는 흔적=망령과 함께 살아가는 태도가 아닐까라고 강내희는 주장한다(<흔적> 1호). 몇번이든 되살아나고, 우리에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망령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식민지와 거듭된 전란, 남북 분단, 군사독재 정권의 억압, 거품과 그 붕괴 등등을 경험해 소비사회화한 지금 한국에서 핵심이 될 만한 태도일 것이라고. 강내희도 언급하듯, C. S. 퍼스가 제창하는 인덱스 같은 기호개념은 무언가의 대리와 상징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어떤 종류의 물질성을 갖춘 흔적=망령이다. 예를 들어 일찍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상징하는 기호인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파괴한 것도 역시 ‘과거의 근절’을 이뤄내지 못한다. 식민지 지배의 기억은 역사에 들러붙어 기호=인덱스로서 잔존한다. 역사의 리사이클=소비에 분주하는 현재 한국영화의 주류는 꺼려지는 과거의 악마 쫓기(근절)를 목표로 해, 과거에 구속돼 있으면서도 건전한 미래지향을 표방하는 건망증 환자 같은 증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한편에선 망령=흔적으로서 과거와 함께 톱니바퀴가 어긋난 이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역사라는 인식 또한 <살인의 추억>과 같은 뛰어난 영화가 던지고 있다. 이런 기억을 둘러싼 투쟁의 장으로서 바라볼 때 한국영화의 현재는 우리가 살아가는 네오 콜로니얼한 세계 상황과 스릴 있는 공명을 보여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