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세계가 바라보는 한국영화 [6] - 프랑스
2004-08-10

<카이에 뒤 시네마> 590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불가시성을 향해가는 홍상수- 실뱅 쿠물/ 영화평론가

창조자가 자유를 행하는 순간에 그 자유의 일부가 부족할 수 있다는 것이 의외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배우 유지태가 전해준 홍상수의 다음 말을 생각한다면 그 모순은 약해진다. “사람들은 제가 현실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고 하죠. 착각입니다. 전 제가 생각해낸 구성에 따라 영화를 만듭니다.”

창조자 자신의 전권을 선언하자마자 그 뒤를 잇는 것은 바로 구성이다. 그것은 ‘현실’에 휩쓸려가는 금덩이가 걸러질 수도 안 걸러질 수도 있는 체가 되어준다. 이번에는 홍 감독이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 자신을 위로해주는 청년의 스웨터 속으로 가소로운 듯 울고 있는 젊은 여자의 코. 베드신의 리듬에 따라 요동치는 분홍색 이불의 끝부분. 앞장면에서 자기는 절대, 절대, 절대로 부천에 안 가겠다고 장담하던 친구 곁에 앉아 부천을 향해 택시 타고 가는 청년의 보일 듯 말 듯한 미소.

별것 아니기도 하고, 많은 것이기도 하다. 최소한으로 보자면 일련의 가슴 뭉클한 묘사다. 최대한으로 보자면 전작에서 가져온 테마들, 나아가 전체 서사의 주요 부분들이다. 그러나 <생활의 발견>의 ‘밀착과 환기(통풍/공간두기)의 균형’(<카이에 뒤 시네마> 586호) 이후 이번에 이 이야기를 실어가는 것은 환기이다.

확실히, 환기를 통해 편집에서 의외로 가장 아름다운 발견들을 하게 된다. 또 다른 침실장면 뒤에 떠오르는 공항의 하늘, 몰이해가 섞인 부드러운 시선 다음에 내리는 눈, 청년이 여자의 신랄한 독설에 당하고 자기방어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클로즈업으로 보이는 꽃무더기. 환기는 이번에는 컷 안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편이다. 대화장면에서 대화를 지배하고 이끌어가는 사람은 항상 화면의 왼쪽에 위치한다. 처음에 인물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더니 카메라는 곧 이동해서 왼쪽으로 더 기울어지며 약간 왜곡 효과를 주고, 다른 곳에 있고 싶어하는 이의 물리적인 존재감을 확대한다. 그 결과 심정적 장점으로는 그 인물의 불편함을 더해주고, 교육적 장점으로는 장면의 가독성을 유도한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알게 된다. 잊혀지지 않는 식당의 말싸움 장면에서 그 사건의 진정한 패자는 공격받는 이가 아니라는 것을.

후퇴라는 인상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영화의 한 대사가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둘이 같이 들이닥치는 건 웃기잖아.” 예비감독인 헌준이 문호에게 선화가 일하는 술집 안으로 따라오지 않게 하려 하면서 하는 말이다. (동시등장의 시각적 효과를 예상하는) 연출가의 말이기도 하지만 라이벌에 대해 우위를 차지하려는 기만이 가득한 옹색한 술수이기도 하다.

실마리는 홍 감독이 자신만의 수완을 경계하고 감독으로서 갖고 있는 재능을 비웃기 시작했다는 것에 있다. 형식에 대한 관심에서 떠난 그는 시간에 따라 점점 그 형태에 머물게 될 테고 언젠가 고전주의, 달리 말해 불가시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어떤 점에서는 이는 이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전하는 ‘메시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세 사람의 이야기는 엄정함, 의무감, 곧은 감정, 이런 것은 모두 옛날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제 우리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냥 가는 대로 두자. 마시고, 아무렇게나, 어떻게든, 서로 사랑하고, 그러다 보면 알게 될 테지. 앗, 눈이 오는군.

영화라는 층위에서는 촬영감독이 ‘과거/현재’, ‘꿈/현실’ 사이의 구분을 너무 구현하지 못하게 한 것은 실수이다. 그때부터는 두 시기와 세 계절이 은근히 섞여가서 여름에 갑자기 눈이 오기 시작하는 것에 대해 거의 무감각해지게 된다. 구성의 불가시성을 노리는 홍 감독은 그 구성이 가진 표현력을 뺏어버린다.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는 바로 그 행위 가운데 자유를 제한하는 일에 가담하는 것이다.

구성 중인 작품이라는 층위에서는, 반면 이 위기로서의 영화는 매우 자극이 된다. 한때 중간 단계로 인식되던 그 일말의 ‘물렁함’(무기력함)조차 흥분과 다음에 올 것에 대한 즐거운 기다림의 원천이 된다. 비평의 기준이 구체에서 전체로 옮겨가고 있기 때문에 이 영화를 결국에는 그 자체로서 좋아할 수 있게 하는 두 가지를 주장해본다. 바로 소주와 신도시다.

소주는 말콤 로리에게 테킬라가 그랬듯이, 베를렌에게 압생트가 그랬듯이, 홍상수에게 술이자 세계관이다. 투명하게, 정신 속에 맑고 푸르게 흐르고 있다.

신도시를 이해하려면 거기서 자랐어야 할지 모른다. 부천은 다른 신도시처럼 낮에 하얗고 저녁에 붉은 같은 색과, 같은 불빛에, 같은 가능한/불가능한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곳이다.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니라는 것, 그곳에서 펼쳐지는 것들과 거기서 진행되는 것들이 전에 알려진 그 어떤 것과도 닮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퍽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중에 소주와 신도시의 공통점은 정상적인 시공간의 인식을 깨고, 명상이나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나 우리 속에 설레는 에너지 같은 것에 깃든 듯한 고유한 지속성을 안겨준다는 데 있다. 지속에 대한 이 작업이 형태의 불가시성을 향하는 홍상수와 함께할 것임이 틀림없다.


<리베라시옹> 2004년 5월17일자 <올드보이>

맥이 없는 스릴러, 밀려드는 피로감 - 필립 아쥬리/ 영화평론가

쿠엔틴 타란티노가 <올드보이>를 칸영화제 수상작으로 선정한 이후 이를 둘러싸고 이견이 분분하다. 일본 만화를 각색한 별난 한국영화 <올드보이>는 모든 장르와 해괴한 짓들(불법감금, 만두 먹는 장면, 옥상 자살 소동 등)로 이루어졌으며, 이 영화를 보려면 다른 영화들보다 네배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영화가 모든 사람에게 팝콘과 콜라를 먹으며 즐기는 것이 될 수는 없다. 영화를 보는 눈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관객에게 <올드보이>는 되지도 않는 이야기일 뿐이다. <올드보이>를 둘러싼 견해는 극단적으로 달라진다. <복수는 나의 것>이 호평을 얻은 뒤 생긴 박찬욱의 프랑스 팬클럽은 한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감독의 의지를 열렬히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이들(박찬욱 팬클럽을 제외한 지구의 모든 사람들)에게 <올드보이>는 별다른 관심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비디오 게임의 리듬으로 두 시간이 지나갈 뿐 이야기와 상황 전개에서 개연성이나 치밀함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어쨌든 <올드보이>는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는 영화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 591호 <살인의 추억>

역사를 비추는 어두운 거울 - 앙트완 티리용/ 영화평론가

제목에서 말해주듯 <살인의 추억>은 사건 당시의 자료들이 픽션을 통해서 어떻게 다시 세상에 나오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속에 나오는 사건의 장소들은 망각의 장소들이며, 이 장소들은 영화를 시작하게 하고 고고학적인 의미를 지닌 채 결론을 맺게 한다. 이러한 장소들에서 시작된 영화의 도입부에는 어떠한 용이함도 보이지 않는다. 봉준호는 이 장소들을 복잡한 이야기와 범죄수사물 영화의 액션, 그리고 역사를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끈질긴 작업에 유기적으로 연계하려는 과감함을 보여준다.

<살인의 추억>에는 연쇄살인범을 다룬 할리우드 장르영화에서 볼 수 있는 두 가지가 빠져 있다. 첫째, 노력의 결실, 즉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수사의 결말이 없다. 둘째, 규칙적인 데쿠파주, 즉 수사의 노하우나 현란한 테크놀로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봉준호의 미장센은 한편으로는 힘과 폭력,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스꽝스럽게 반복되는 실수의 코믹함을 끌어낼 줄을 안다. 범죄수사물 영화의 복잡한 장치는 요란하게 시작됐다가 썰렁하게 끝나는 고풍스런 코믹 연극 무대가 된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같은 장르에 지나치게 많이 나오는 주검의 규칙적인 발견이나 형사와 범인의 만남 대신 좁혀지지 않는 시간의 간극이 게임을 만들어준다. 라디오 프로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는 매번 사건을 예고해주지만 형사들은 늘 한발 늦는다.

<살인의 추억>은 서로 만나지 않는 극들로 이루어진 영화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방해하는 일련의 냉혹한 현실을 암시해준다. 간간이 들려오는 민방위 훈련 경보 소리, 텔레비전 뉴스 화면 등이 당시의 상황을 드러내주는 다큐멘터리적 요소들로 드러난다.

결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가면 속에 감추어진 역사는 따로 있지 않고 수사가 진행되는 방향을 따라 나란히 전개되며, 이것은 <살인의 추억>을 성공의 길로 이끈다.

전체주의 시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획일화 정책을 위해 망각을 유도하는 시기에 이러한 기억은 드문 것이다. 그리고 봉준호와 같은 시네아스트가 장르영화와 역사 한편에 숨겨진 기억 사이에 교차하는 긴장관계 위에 하나의 정치를 구성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

발췌·정리 차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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