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배우를 기르는 선생님들 [2] - 최형인
2004-09-22
글 : 오정연
“치부를 숨기려 할 때, 연기는 거짓이 된다”

설경구, 배두나, 이영애, 임은경 등 길러낸 연기전문가 최형인

아트(art)는 본래 기술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잠언은 창조력의 위대함이 아니라, 부단히 갈고닦아야 하는 정진(精進)의 어려움을 뜻하는 말이다. 배우고 연마해야 하는 기술은 일면, 예술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신비로움과는 전혀 다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가라 부르는 사람들, 순간의 상상과 우연한 감성에 충실한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어떤 경지에 오르기까지 취해야 하는 끊임없는 노력은 기술과 예술이 배치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연기 또한 마찬가지. 배우들은 꾸준한 훈련을 통해 숱한 자세를 갖춰야 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식을 쌓아야 한다. 더군다나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표현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아의 장벽’을 허무는 것인데, 이것은 단언컨대 세심하게 단련된 기술이 필요한 과정이다. 감성과 이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연기라는 마술은, 전적으로 배우 개인의 수련만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의 연기수업은 _ 한 인간이 자기를 부숴가는 순간이다

<핏줄><심바새메><트루 웨스트>(위부터)

최형인(55)은 바로 그처럼 무수히 많은 조건들을 갖출 수 있도록 숱한 배우들을 도왔던, 자타가 공인하는 연기전문가다. 연세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했지만 대부분의 대학 시절은 연희극회에서의 활동으로 점철됐다는 최형인은, 학부 졸업 이후 도미하여 1979년 뉴욕대에서 연기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연기전문가라는 호칭은, 그가 국내에서 유일한 연기학 석사소지자라는 사실에 상당 부분 기댄 것이다. 그러나 최형인 자신은 이에 대해 “연기를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들 중에 그걸 전공한 사람이 없다는 게 이상한 일일 뿐 대단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 겸손함은, ‘연기는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믿음’을 가진 배우들이 차고 넘치는 현실, 연출·이론 전공자가 대학에서 연기를 가르치고 있는 상황에 대한 날선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한양대에서 연기를 가르치는 교수이기 이전에 무대에 서는 배우이고, 무대 뒤의 연출가이며, 극단 한양레퍼토리의 대표인 그가 가장 애착을 가지는 분야는 가르치는 일. 연기를 가르치는 것과 연극을 연출하는 것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지만, 둘은 엄연히 다른 분야라고 최형인은 잘라 말한다. “연기수업은 철저히 배우 위주로 진행된다. 배우가 어떤 부분은 자유롭고, 어떤 부분이 위축돼 있는지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학생과 선생이 완전히 일치돼야 한다. 하지만 연출은 배우가 배역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 배우와 작가의 의도를 연결시키는 과정이다.”

그의 배우수업은 크게 두 과정으로 나뉜다. 독백을 비롯한 각종 게임으로 배우 개인을 조율하는 과정. 그리고 둘이서 특정 장면을 연기하면서 상대 배우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이에 반응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연기교육에 대한 최형인의 모든 철학을 드러내는 것은 독백수업이다. 수업시간. 무대 위에서 독백을 마친 학생에게 그는 주문한다. “지금 했던 걸 다시 하는데, 미동도 하지 말고, 네 생각을 얘기해봐.”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학생을 자극하기 위해, “지금 한 대사에 말끝마다 ‘미친놈아’를 붙여서 해볼 것”을 지시한다. 감정이 격앙된 학생에게는 “넌 지금 왜 슬프지?” “이젠 어떻게 할 건데?”라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의 지시를 따르는 학생들은 미묘하게, 그러나 분명히 달라진 연기를 선보이고,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에 빠져서 대답하던 학생은 감정에 복받쳐 울음을 터뜨린다. 최형인은 수업시간 내내 학생들의 개인적인 부분을 들춰내고, 자존심을 건드리며, 여지없이 구석으로 몰고간다. 강철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울지 않을 도리가 없고, 아무리 온순한 사람도 끝내는 악에 받친 욕지거리를 내뱉게 된다. 대학 시절 그의 수업을 빠지지 않고 “뒤에서 듣기만 했던” 설경구는 “너무 개인적인 치부를 드러내서 무대로 나가기 싫어하는 학생도 있었다”고 끔찍했던 수업을 회고한다. 이런 이유로 연기자 홍석천은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최형인을 가장 기억에 남는 스승으로 꼽기도 했다. 그가 연기수업 시간에 생애 최초의 커밍아웃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처럼 개인적인 측면을 꿰뚫고 질문해서 자신의 입으로 비밀을 털어놓게 만드는 최형인 덕분이었던 것. 언제나 위축되고 자신없어하는 배두나에게는, 동기들 한명 한명, 눈을 보고 욕을 하도록 했다. 욕을 하는 당사자도, 듣는 동기들도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에 수업시간은 끝내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한 인간이 자기를 부숴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혹한 과정을 통해 최형인이 이루려는 일차적인 목표는, 배우가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것. “자신의 치부 한 가지를 숨기려 할 때, 배우의 모든 것이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그의 배우들은 _ 자신감이 넘친다

물론 최형인이 언제나 그처럼 개인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깨버리는 공격적인 수업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배우들은 정말로 예민한 사람들이다. 방어기제에 대해서는 부숴야 하지만, 내가 누군지에 대한 긍지나 자존심은 키워줘야 한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데 배역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나.” 공연을 앞둔 제자들의 원기를 보충하기 위해, 직접 김치를 담가 밥을 해먹일 정도로 정이 많은 그는, 유난히도 소심했던 학생 배두나, 임은경 등을 회고하면서 이들에 대한 염려를 곱씹는다. 이런 스승의 마음은 제자들에게도 전달되는 법. “처음 교수님 앞에서 연기를 할 땐 안절부절못했다”는 임은경은 최형인을 “때로는 엄마처럼 제 얘기를 들어주던, 친구처럼 따뜻한 분”으로 기억하고, 이영애는 최형인에게 받은 가장 큰 것이 ‘자신감’이었다고 말한다. “최 선생님 덕분에 연기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는 설경구, 이문식 등 제자들의 뒤늦은 고백도 끊이지 않는다.

이처럼 심혈을 기울여 가르친 제자들도 일단 무대로 올려보내면 연극이 끝날 때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다. 지켜보는 안타까움은 브라운관과 스크린으로 떠난 뒤 제자리를 찾지 못하거나, 연극으로 돌아오지 않는 제자들을 볼 때 극대화된다. “연극 안 하는 애들을 보면 불안하다. 소모되기 전에 연극을 통해서 숨이 긴 연기를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딴 극단 출신들보다 우리 극단 출신 배우들이 유독 더 연극을 안 하는 것 같다. 다들 돈에 환장을 했는지.” (웃음)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배우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개인의 퍼스낼러티만을 팔아먹는 연예계의 현실. 그러나 시나리오와 미장센, 후반작업에는 그처럼 신경을 쓰면서도 정작 배우의 연기연출에는 무지한 한국 영화감독들에게도 불만은 있다. “외국은 영화 공부의 절반이 연기다. 자기도 연기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감독을 하는 거다. 그래서 난 한양대에서 영화연출하는 애들한테도 연기수업을 많이 받게 하고 있다. 무엇보다 배우를 알아야지 그들의 최대치를 끌어낼 수 있지 않겠나. 뭐든지 열심히 했던 정지우 같은 경우는 그래서 연기연출도 잘하는 것 같다.”

TV도 다르지 않다.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바로잡아주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리는 배우가 한둘이 아니다. “동기 같은 건 하나도 없이 갑자기 무턱대고 돌변하질 않나, 있는 대로 인상만 쓰면서 호통을 치지 않나.” 무조건 강렬하게, 모든 대사를 화를 내거나 과시하면서 연기하도록 만드는 대입학원식 연기가 넘쳐난다. 물론 보석 같은 연기를 발견하는 순간도 있다. <네 멋대로 해라>의 양동근이 대표적인 케이스. “배역이 느끼는 것을 본능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있다. 배우가 순간에 느낀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인데, 그걸 하고 있었다. 깡, 배알이 있다고 할까? 기본을 배양하면 성장할 수 있는 배우처럼 보였다.”

<구렁이 신랑과 각시><상사주><러브레터> (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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