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배우를 기르는 선생님들 [3] - 최형인
2004-09-22
글 : 오정연
사진 : 오계옥
그의 연기에는 _ 따뜻한 온기가 있다

주변 사람들이 최형인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내세우는 것은 ‘정확성’. 직면한 문제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구체적인 답을 주는 교습이 그렇고, 언제나 ‘왜’를 질문하면서 연기의 동기를 찾아가는 연출이 그렇다. 그가 어느 정도 기본이 된 배우에게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작가가 대본을 통해 전달하려는 것을 가장 정확하게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다. 위대한 작품은 인간과 인생을 꿰뚫는 작가가 며칠 밤을 새워서 모든 장면을 공들여 쓴 것들이고, 그 자체가 엄청난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등장하는 인물의 과거나 행동의 동기는 대본 안에서 모두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동기는 희미해선 안 된다. 악착같이 그것을 이루려는 힘이 좋은 연기를 만들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남자가 여자를 왜 원하느냐에 따라 연기는 달라진다. 돈 때문인지, 외모 때문인지, 그 원인에 따라 그가 취하는 방법도 달라지는 것 아닌가. 정답은 대본에서 언제나 찾을 수 있다. 이 인간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된다.” 한양레퍼토리가 <심바새메> <트루 웨스트> <상사주> 등 외국의 고전을 주로 공연하는 것도, 배우가 뭔가를 배울 수 있는 최고의 희곡만을 무대에 올리겠다는 그의 신념 때문. 최형인은 절박하게 대본을 분석하면서 알게 된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연기는 믿지 않는다. 하긴, 평생 직업으로 택한 연기인데, 본능에 의한 순간적인 것, 평생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우연에 기대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배우는 따뜻한 온기가 뿜어져 나와야 한다. 살기등등한 연기를 하더라도 온기가 남아 있어야지. 진짜 못된 인간을 뭣 때문에 사람들이 보러 돈을 내겠나.” 좋은 연기자는 착한 심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그의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 이와 함께 그는 제자들에게 넓은 사람이 될 것을 주문한다. “결국 배우는 자기가 아닌 걸 할 수는 없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자기를 넓혀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알코올 중독자를 연기하기 위해 알코올 중독자가 돼야 한다는, 기계적인 처방이 아니다. “애정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관찰해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많이 찾을 수 있으면 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지식과 애정이다. 독백 연기를 보고 배우의 그날 컨디션을 알아내고, 몇분만 이야기해보면 처음 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할 수 있는 그를 두고 제자들은 점쟁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사람을 사랑하고 늘 관찰해왔던 그의 습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최형인은 현재 영화 <사과>에, 주인공 문소리의 어머니로 출연 중이다. 지난 93년 <그 섬에 가고 싶다> 이후 10여년 만에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다. 명색이 연기 선생님인데 여러 사람에게 자신의 연기를 선보인다는 것이 부담스러울 법도 하지만, “애들 가르치려면 나도 가끔은 이런 도전을 해야 한다”며 밝게 웃는다. 캄캄한 객석, 차가운 카메라를 앞에 둔 공포도 그와 함께라면 즐거운 도약으로 느껴질 것 같다.

최형인의 배우들

당당함으로 무장된 친구들그의 혹독한 훈련을 견뎌낸 배우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설경구, 유오성, 권해효, 이문식, 박광정 등 한양대에서 그의 수업을 들은 뒤에 한양레퍼토리에서도 함께한 이름들. 장동건, 배두나, 김민정, 이동건, 최지우, 이정진 등 한국예술종학대학과 한양대에서 가르친 학생들. 마지막으로 박상원, 채시라, 이영애, 이은주, 임은경 등은 특정 작품을 앞두고 단기간 개인교습을 했던 배우들이다. 최형인 교수가 자신이 기억하는 제자들의 이야기를 다소 터프한(?) 방식으로 들려줬다.

설경구 l <실미도> <오아시스> <공공의 적>

그 병신이 그렇게 유명한 배우가 될 줄 누가 알았나. (웃음) 큰 역할도 한번밖에 못 맡았고, 걔가 배우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별로 야단도 안 쳤다. 4학년 때, 처음으로 연극을 연출했는데, 복잡한 상황 연출을 잘하기에 연출가를 하려는 줄 알았으니까. 딴 애들이 배우하려고 난리쳤던 것에 비해 극성스럽지도 않았고, 하긴 뭐, 최민식, 송강호 이런 사람들도 옛날에 연극할 때는 지금처럼 유명한 영화배우가 될 줄은 몰랐지. 그중에서 경구는 가장 오버도 안 하고 심플하면서도 파워가 있는 연기를 한다고 생각한다. 생긴 것도 제일 배우 같지 않게 생기지 않았나. (웃음)

권해효 l <패밀리> <선물> <진짜 사나이>

제자 노릇도 제일 열심이고, 언제나 열심히 살려고 하는 놈이다. 처음부터 굉장히 당당하고, 깰 만한 게 없었다. 처음 보는 순간 흥분되는 아이였으니까. 답답한 구석도 없어서 야단도 별로 안 맞은 편이다.

배두나 l <복수는 나의 것> <고양이를 부탁해> <플란다스의 개>

머리도 좋고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는데, 활동이 너무 바빠서 수업을 오래 못 들었던 게 아쉽다. 인생을 길게 보고 계획 세워서 살아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정말로 깡이 없는 애였다. 그랬던 애가 이제는 나가서 잘하는 걸 보면 정말 기쁘다.

이영애 l <공동경비구역 JSA> <봄날은 간다> <선물>

<공동경비구역 JSA> 때, 영어 연기 때문에 처음에 연락이 왔지. 근데 영어 연기가 보통 연기랑 별로 다르지 않거든. 일단은 한국말로 한번 해보고 그 위에 영어를 얹는 식으로 했어. 이영애는 다이내믹하고는 거리가 있는 사람이어서 정적인 방법을 썼어. 우울한 사람을 치료할 때 우울한 음악을 쓰는 것처럼. 한번도 인간적으로 흐트러지는 걸 못 봤다. 확 뒤집어지는 연기를 할 만한 성격이 아닌데, 지금쯤 <친절한 금자씨> 때문에 본인은 아마 걱정이 태산일 거다.

임은경 l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품행제로> <인형사>

너무 맑은 애였다. 생각이나 오기 같은 게 하나도 없는. “내가 뭘 할 수 있겠나” 이러면서 평생을 산 것처럼 자기에 대한 존경심이 없었어. 자신을 심어주고 그게 얼마나 소중한가 가르쳐주면 막 울고 그랬으니까. 그런 애한테는 “넌 너무 소중하고,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음”을 계속해서 말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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