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대사에는 _ 한국어의 질박하면서도 찰진 호흡이 있다
오태석 연극의 무한한 상상력과 시공간을 넘나드는 무대도 배우에겐 큰 가르침이자 도전으로 다가온다. 관객은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되지만 배우들은 허겁지겁 그 엄청난 사유의 공간을 자신의 연기로 메꿔야 한다. “그만한 상상력을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로 역량이 동원되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이런 상상력과 분석력이 없으면 도태된다. 독종이 될수밖에 없고 영리해질 수밖에 없다”는 게 정원중의 지적이다.
그러나 허리라고 부를 만한 중견배우들이 하나둘 TV, 영화로 빠져나가고 연극학도들이 연극보다는 영화와 방송 쪽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세태 속에서 극단 목화의 힘이 예전 같지 않다는 우려가 들린다. 연극이 위축되면서 독특한 목화만의 스카우트 방식도 차질을 빚고 있다. 그것이 오태석과 극단 목화의 근심이다.
당장 <백마강 달밤에>도 캐스팅에 애를 먹었다. 창단 20주년 기념과 연극열전 참여 프로그램이 겹치는 큰 공연이었지만 영화 출연 등으로 바쁜 고참급 배우를 부르기가 어려웠다. 더블 캐스팅도 허용하지 않고 연습 전 기간 참여를 해야 한다는 오태석의 고집도 한몫했다. 손병호와 성지루가 이번 작품에 참여한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의 속마음이야 바깥으로 나간 제자들을 다 불러모으는 것이었겠지만, 배우들에 대한 애정보다 앞에 두는 것이 관객과의 약속이다. 영화와 TV로 간 제자들이 다시 연극으로 돌아오거나 공연을 보고 인사를 와도 오태석은 겉으로 반가움을 쉽게 내색하지 않는다. 올해 봄 <심청이는 왜 두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공연이 모두 끝나고 쫑파티 때 일이다. 성지루가 인사를 하자 ‘누구세요’ 하며 딴청을 부려 제자를 당황하게 했다. 그가 섭섭함과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는 이번 공연에 나선 성지루와 손병호를 두고 “점검하고 싶을 거야. 아마. 어디를 수리해야 하는지, 고쳐야 하는지”라며 내심 돌아온 제자들을 환영했다. ‘돌아온 탕자’에 대해 차마 내색하지 않고 반가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러할까.
“퀴퀴한 지하실 냄새 나는 아룽구지 극장에서 저런 걸작들이 나온다는 건 기적”이라는 임상수 감독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극단 목화의 시스템은 언제나 똑같이 굴러간다. 연습과 공연이 끝날 때마다 오태석은 빼곡하게 적은 4∼8쪽의 노트를 들고 배우를 다시 만난다. 목엔 늘 수건을 두르고 있고 군복 같은 바지와 운동화 차림, 상의 호주머니엔 네개의 펜과 돋보기가 있다. 교수나 연출가라기보다는 영락없는 목수의 차림이다. 관객이 돈까지 내고 자신의 공연을 찾아오는데 허투루 준비할 수 없다고 그는 믿는다. 하루에 겨우 한두끼를 챙기는 둥 마는 둥 하며 아내 최난선씨의 속을 썩이는 데는 이런 연유가 있다. 오태석은 배우로서 무대 위에 선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남 앞에 선다는 게 무엇인지, 내 모자란 걸 갖고 인생을 꾸려가야 하니 관객에게 여쭈어보고 의논드린다는 심정이야말로 볼거리를 만드는 이의 자세다.” 극단 목화 출신 배우들에게는 이런 엄격함과 성실함이 배어나온다.
글 이종도 nacho@cine21.com·사진 오계옥 klara@cine21.com
오태석의 배우들
개성으로 똘똘 뭉친 얼굴들
많은 배우들을 거느린 가장이라 그런지 오태석은 남들 앞에서 여간해서는 특정 배우를 칭찬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다른 배우가 섭섭해할 수 있어서이리라. 쑥스러움과 부끄러움을 잘 타는 성격은 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친해지기 어렵지만 마음을 열면 한없이 따뜻한 이 성격을, 목화 배우이자 상임무대디자이너인 조은아는 ‘배우로서의 자존심’이라고 명쾌하게 정리한다. 어렵사리 몇몇 배우들에 대한 그의 칭찬을 적으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깨물면 안 아플 열 손가락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목화가 배출한 배우들이 어디 한둘인가. <백마강 달밤에>에 출연 중인 배우와 최근 활약이 눈에 띄는 젊은 배우를 중심으로 제자들에 대한 스승의 느낌을 몇 마디 적어본다. 그는 넉넉한 연습기간을 갖고 준비하는 연극과 달리 한국영화가 급조하는 느낌이 있어 제자들의 영화는 보지 않는다고 했다. 저평가된 배우를 꼽아달라는 부탁엔 정진각을 꼽았고 그 이상은 ‘아직 젊으니 더 지켜보자’는 말로 마무리했다.
<심청이는 왜 두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에서 주정꾼 연기로 탁월하단 소릴 들었다. 즉흥성과 의외성을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키포인트인데 거기서 잘 보여줬지. 믿을 수 있는 배우가 된 거다. <천년의 수인>에서 안두희 아들 역도 잘했고. 연극의 분위기를 확 뒤집어버리는 의외성을 잘 운영하는 지혜가 있다. 감각도 뛰어나고 몸짓과 제스처가 거침이 없다.
인물 추적에서 치밀하고 집요해. <부자유친>에서 영조대왕을 맡았는데 삼십대 초반에 그 역을 맡았다. 아들 역이 박희순이었는데 실제 두세살 차이 나는데 전혀 부자 사이라는 게 우습지가 않고 ‘어!’ 하게 만들어냈다고. 언어를 화려하게 구사하기보다 언어의 힘을 닦아서 광택이 나게 하는 사람이다.
‘어, 저런 게 있어?!’ 하게 만들지. 표정이나 표변하는 힘이 어디서 나나 놀라울 정도다. <춘풍의 처>에서 남편을 찾아내려 애쓰는 여인네를 그 어린 나이에 도달한 것처럼 해내거든. 놀라운 거지. 서울예대 졸업 공연에서 <사천의 선인> 주인공을 했는데 평론가들 모두 ‘저런 애가 있냐’고 놀랐다.
<로미오와 줄리엣> <여우와 사랑을> 등에서 단역만 하다가 나갔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목검에 앞이빨이 부러지기도 했는데. 원희는 굉장히 순발력이 있다. 좀더 있어줬으면 했는데 아쉬움이 있다. 다시 올 줄 알았는데 더 바빠지더라.
희순이는 연극을 잘 안다. 그 친구 얘긴 선배들도 귀기울여 듣는다. <심청이는 왜…>에서 얼굴을 자해하고 물에 빠지는 여자 역을 맡았는데 객석을 숙연하게 하더라. ‘아, 이 친구 봐라’ 이랬지. <백마강 달밤에>에선 마을의 광대 역으로 나왔는데 우스운 연기를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