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배우를 기르는 선생님들 [6] - 박근형
2004-09-22
글 : 이종도
사진 : 오계옥
“배우에겐 칭찬과 격려가 약이다

박해일, 고수희, 윤제문, 엄효섭 등 길러낸 연극연출가 박근형

그의 연극에는 _ 돌발적인 상상력과 웃음이 있다

4년 전 연극연출가 박근형(41)이 들려준 일화. 집에서 전화를 하고 있던 그는 왼손으로 수화기를 받고 오른손으로는 무심코 앞에 있는 무엇인가를 계속 돌렸다. 그것은 자기 앞에 서 있는 어머니의 젖꼭지였다.

박근형의 연극은 뒷골목과 일상의 어두운 그늘, 가족의 신화 뒤에 숨어 있는 애증을 우습고도 슬프게 담아낸다. 위의 일화는 그의 연극이 갖는 놀라운 폭발력과 웃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임순례, 봉준호, 김지운, 박찬욱 감독 등이 그의 공연 때마다 슬그머니 뒷자리를 차지하고 배우들을 눈여겨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길들여지지 않은 듯한 눈빛, 정식 연극 교육에서 닦은 세련된 화술과는 거리가 먼 시장 좌판의 언어들, 신문 사회면에서나 봤음직한 우스꽝스럽고 전도된 가족 관계를 태연히 보여주는 꾸밈없는 연기…. 그의 연극은 영화계에서는 주목받는 또래 연출가 집단 가운데서 가장 많은 화제를 불러모았다. 대표작인 <청춘예찬>(1999), <대대손손>(2000)에서 최근 막을 내린 <선데이 서울>(박찬욱, 이무영 감독과 함께 만든)까지 돌발적인 상상력과 상황 전개는 놀라움과 찬탄을 이끌어냈다.

그의 배우들은 _ ‘짐작’이 아닌 ‘그대로’ 연기한다

“내가 진짜 되고 싶었던 게 사회부 기자였는데. 형사 수준으로 잠입르포하는 거.” 아마 박근형이 사회부 기자가 됐다면 매우 현장감 있으면서도 드라마틱하고, 읽으면 허를 찔리는 듯한 기사를 썼을 것이다. “술 취한 동네 아저씨, 몸이 안 좋은 사람, 시장통 아주머니….” 그의 관심사는 골목길 뒤편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는 기자가 되는 대신 골목길의 삶을 무대로 옮기는 일로 나섰다. “깨끗하고 반질거리는 게 오히려 낯선” 건 이 연출가만 그런 것이 아니다. 함께하는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기본적으로 배우들이 겉도는 연기를 안 해요. 과장된 연기, 짐작의 연기가 아니라 ‘너 화날 때 어떻게 해? 그대로 해라’ 하는 식이죠. 연기가 구체적이에요. 그러니까 영화하는 분들이 원하는 연기를… 아니, 맞아떨어진 것일 수도 있겠죠.”

박근형은 동네 형처럼 슬리퍼 질질 끌고 연습장에 나타나 배우들에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건넨다. 새로 들어온 배우에게는 살아온 이야기를 적어오라고 한다. 배우와 노는 시간을 많이 갖고 배우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 배우들의 삶은 실제 희곡으로 반영되기도 한다. 박해일이 고등학교 때 음악을 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으며 불량기가 있었다는 얘기 등등이 <청춘예찬>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실향민 부모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경성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연극에 관심을 가졌다. 졸업하자마자 장충동에 자리한 ‘연극촌’에 들어가 배우로 입문했다. 대학을 1년 다니긴 했지만 등록금을 연극에 몽땅 퍼붓고 학교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선배 김갑수를 보면서 그 ‘배우라는 어마어마한 일’에 자신이 없어 포기했다. 부모는 ‘배고픈 일이니 직장을 다니라’고 했지만 이 ‘한심한’ 외아들은 6개월 방위 군복무를 마치고도 연극이 계속 하고 싶었다. 76극단의 연출가 기국서를 만나면서 그의 연극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지피족> <아스피린> 연출로 서서히 자신의 세계를 만들던 그는 1997년 <쥐>로 독특한 자신만의 개성을 알렸다.

그의 대사와 문법에는 _ 현장이 있다

<대대손손><선데이 서울>(위부터)

그는 자신의 특이한 대사와 연극 문법이 “정규교육, 문학수업을 받지 않고 현장에서 지냈기 때문” 아닐까라고 추측한다. 위대한 전통이니 하는 문학의 근엄함이, 이를테면 ‘정규코스’적 냄새가 그에겐 나지 않는다.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야전성이 있어요. 다듬어지고 깔끔한 배우는 좋아하지 않아요. 거칠고, 덜 알려진 배우랑 하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난 배우에게 가능하면 잘할 수 있는 걸 하라고 하고 자신감을 북돋워주죠. 주위를 보면 배우들이 연기를 하면서 주눅이 들곤 하는데, 난 격려해요. 가령 윤제문이 악기를 잘 다루는데요 극중 역할에서 기타도 쳐봐라, 피리도 불어봐라 하고 말해요.”

박근형은 배우들에게 많은 것을 맡겨둔다. “배우들이 바보가 아니거든요. 내가 똑똑한 게 아니에요. 배우들이 똑똑하다는 걸 내가 알면 되고, 그걸 배우들 자신이 알게끔, 자신이 최고임을 잊어버리지 않게끔 하게 하면 되는 거죠.” 김영민, 배두나, 장영남 등 재능있는 배우들이 함께하고 싶은 연출가로 선뜻 박근형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박해일, 고수희, 윤제문, 엄효섭 등 주력부대들이 영화판 곳곳으로 빠져나가고 있어 매 작품 캐스팅이 쉽지 않다. 올 10월2일부터 올릴 <청춘예찬>은 그런 점에서 박근형에게는 무척 행운 같은 작품이다. 최근 가장 각광받는 배우 가운데 하나인 김영민(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수취인불명>)이 객원으로 들어와 박해일이 맡았던 청년 역으로 나섰고, 고수희가 ‘간질’, 윤제문이 아버지, 천정하가 어머니, 엄효섭이 선생님을 맡았다. 최근 대학로에서 보기 드문 황금배역이다. <청춘예찬> 연습장에서 지켜본 그의 작업 과정은 ‘왜 박근형인가’를 잘 알게 해주었다.

조금이라도 더 현실의 냄새가 짙게 밴 대사로 현장에서 계속 수정을 가하던 박근형은 아빠(윤제문)와 청년(김영민) 사이의 대화가 어디서 나왔는지 그 사연을 설명해준다. 그것은 술자리에서 치고받고 욕을 하면서도 계속 술을 마시는 아주 이상한 아버지와 아들의 에피소드였다. 박근형은 “욕해도 사랑하는 거지. 다만 표현하지 않는 거지”라며 연극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연극의 느낌을 살아나게 하기 위해 가져다놓은 식탁 위의 소주잔을 배우들과 함께 홀짝거리며 툭툭 내던지는 몇 마디 우스개. 그 농담들이 알코올 기운처럼 연습장에 스며들었다.

박근형의 배우들-골목길에서 마주친 그들과 그녀들

박근형이 이끄는 극단 ‘골목길’은 골목길에서 마주쳤을 법한 배우들로 득시글거린다. 친숙하면서도 낯설고, 대단하지 않을 듯한데 놀라운 힘을 보여주는 배우들이다. 연륜이 짧은 소극단이지만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기국서가 이끄는 극단76의 내공이 이들에게서 느껴진다. 여기엔 76극단 출신의 중견배우 최정우(45·영화 <라이방>의 최 상무)의 공이 크다. 극단76의 노련한 힘과 골목길의 패기를 이어주는 거멀못 노릇을 하는 배우다. 젊은 극단 특유의 어수선함보다는 관록이 더 두드러지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 기인한다.

박해일 l <질투는 나의 힘> <살인의 추억> <인어공주>

<청춘예찬>에서 불량학생이면서도 천박하지 않고, 연민을 느끼게끔 하는 연기가, 모질 땐 모질면서도 미워 보이지 않는, 선을 지키면서 하는 연기가 좋았다. 대사와 감정이 때묻지 않은 게 장점으로 작용하는 듯. 그리고 대사가 담백하다.

고수희 l <플란다스의 개>

처음엔 스탭으로 거들어주기 위해 왔다. 전화받는 것도 그렇고 음향, 조명하는 데 되게 재치가 있더라. 안 좋은 상황을 잘 넘기는 데 놀랐다. 살아온 얘기를 듣고 보니 보기와는 다르게 풍요롭게 살았더라. 경찰대 교수 딸인데 애써 고생해 배우할 필요도 없는 애였는데. 이 사람을 보고 <청춘예찬>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워풀하면서도 아주 서정성 넘치고 섬세한 연기를 보여줬으니까. 대형배우가 될 듯거라고 생각한다. 술자리에서도 거침없이 놀고. 남자 역할도 잘하고 이번 <청춘예찬>에서 간질병 환자도 어려운 역인데 잘 소화했다. 에너지가 있다. 내숭 떨거나 수줍음 없이 바로 거침없이 표현한다. 레지면 레지, 사이비교주면 사이비교주 l <선데이 서울>), 택시운전사 l <삼총사>) 등 다 하기 힘든 독특한 역을 잘 소화한다.

윤제문 l <인플루엔자>(디지털 삼인삼색) <남극일기>

생각을 하는 배우. 말만 하는 배우랑 다르다. 자기 생각을 말하는데 말을 위한 말이 아니라 하고 싶을 때 한다. 찾아서 하는 배우라고 할 수 있다(봉준호 감독의 <인플루엔자>에서 지하철 행상을 전전하는 서른한살의 무직자 조혁래로 분했다.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꺼내려는 할머니를 자빠뜨리고 “이대로 누워계세요”라고 말할 때의 표정은 압권이다. 사업을 하다가 스물다섯 늦은 나이에 연극판에 뛰어들었다. <정글쥬스>(2002)의 조폭 행동대원으로 장편영화에 데뷔했고 <남극일기>에서는 반골 기질의 탐험대원으로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