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배우를 기르는 선생님들 [4] - 오태석
2004-09-22
글 : 이종도
“배우는 레미콘차를 등에 짊어진 사람”

박영규, 손병호, 성지루, 임원희 등 길러낸 연극연출가 오태석

“임 형(임상수 감독)이 (영화에 극단 목화레퍼터리컴퍼니 배우들을) 많이 데려가서 써서 그런지 밖에서 평가가 좋아.”

“저야… 죄송할 따름이죠. 목화 배우들은 TV든 영화든 어딜 가서도 유연해요.”

9월3일 막 오른 극단 목화의 <백마강 달밤에>가 끝난 뒤 대학로의 카페 장. 극단 목화의 수장 오태석(64) 과 임상수 감독이 맥주 잔을 두고 마주 앉아서 나눈 말의 일부다. 대학생 때부터 오태석 연극의 골수팬이 된 임상수 감독은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오태석을 ‘한국 공연예술계가 낳은 5대 천재’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의 연극에 나온 정진각, 정원중, 성지루 등을 일찌감치 자신의 영화에 쓸 배우로 눈여겨봐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오태석, 1962년 데뷔 뒤 어느덧 42년의 연극 인생이다. <태> <춘풍의 처> <부자유친> <비닐하우스> 등 대표작만 꼽아도 두손이 모자라다. ‘한국 연극계의 이단아’이자 가장 ‘문제적 인간’이었던 그의 극단 목화가 생긴 지 벌써 20년, 작품 수확뿐 아니라 배우를 거두는 데도 빼어났다. 조상건, 박영규, 김일우, 정진각을 위시해 정원중, 한명구, 손병호, 김병옥, 정은표, 성지루, 박희순, 임원희, 황정민(여), 장영남 등 연극팬이라면 듣기만 해도 설렐 이들이 모두 목화에서 나왔다. 지금 이들은 충무로의 가장 인상적인 배우들로 각기 자리잡았다. 과연 어떤 이기에 오태석은 그렇게 많은 명배우들을 길러냈나.

그의 연극에는 _ 우리네의 참혹과 신명이 있다

<코소보 그리고 유랑><춘풍의 처>(위부터)

오태석 연극 밑바닥을 흐르는 가장 큰 두 물줄기는 한국전쟁의 참혹사와 고향(충남 서천 아룽구지. 아룽구지가 바로 그의 극장 이름이다)의 기억이다. 그의 연극은 아직도 구만리 장천을 떠도는 한국전쟁의 원혼을 위로하는 동시에 가장 한국적인 언어를 찾아 무대 위에서 관객에게 돌려준다. 이 작업은 매우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발랄하고, 무거우면서도 가볍다. 언제나 한국 연극의 전위에서 수행하는 이 선도적인 작업은 너무 압도적인 나머지 숱한 오해와 질투를 불러모았다.

11살에 맞은 한국전쟁의 기억은 도처에서 되살아나 그의 연극 속을 흘러다닌다. 아버지는 인민군 손에 빼앗겼다. 보이는 것이라곤 사방을 뒤덮은 시체였고 죽음의 냄새가 온통 사방을 떠돌아다녔다(퇴각하는 인민군이 서천군 등기소에 마을 유지 120여명을 가두고 불을 지른 사건은 연극 <자전거>의 모티브가 됐다). 그러나 오태석의 연극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만 떠돌지 않는다. 죽은 혼들은 굿과 판소리 탈춤 등 신명나는 놀이 속에서 나타난다. 참혹과 신명이 동시에 진행되는 불가사의함이야말로 오태석식 연극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이 소년 오태석의 가장 큰 짐이었다면, 가난은 청년 오태석의 제일 무거운 짐이었다. 연세대 철학과 재학 시절 오태석은 친구들의 자취방과 강의실에서 동가식서가숙하며 생활의 방편으로 <연세춘추>에 소설 연재, 희곡 원고 투고, 학교 노랫말 응모 등을 닥치는 대로 했다. 졸업 뒤엔 신춘문예 응모와 공모작 모집으로 이어졌다.

<초분>(1973) 이후 그는 논쟁의 한가운데 서며 기린아로 기대를 모았다. 전통과 현대, 동과 서가 뒤엉키고 마주치는 그의 연극은 한국의 집단무의식을 가장 잘 드러낸 사례로 꼽혔다. 직관과 감성 그리고 파격과 즉흥으로 그는 한국 연극계를 뒤흔들었다. 셰익스피어와 입센, 베케트가 아닌 판소리와 탈춤, 굿의 세계로 그는 관객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3, 4조 또는 4, 4조에 맞춰 입에 달라붙게 만드는 그의 대사는 구어체 한국어의 질박하면서도 찰진 호흡을 되살려냈다.

<춘풍의 처>(1976), 유년기의 전쟁체험을 상징적으로 되살린 <자전거>(1983), 인신매매를 <심청전>과 연관시킨 <심청이는 왜 두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1990),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을 다룬 <부자유친>(1987), 백제 병사의 원혼을 달래는 <백마강 달밤에>(1993) 등은 발표될 때마다 거센 논란과 뜨거운 호응을 얻어냈다. 현대사와 과거의 역사를 두손에 각각 잡고 박치기시키는 이 기발하고 엉뚱하면서도 날카로운 작품들은 이성의 논리가 아닌 직관의 논리로 관객의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논리로 이어지지 않는 틈을 관객으로 하여금 직접 뛰어들어 그 틈을 메우게 만드는 생략과 비약의 문법은 언제나 객석을 붐비게 했다.

그의 배우들은 _ 부글부글 끓는다

“부글부글 끓는 상태로 있으라는 거지. 응결시키지 말고.” 오태석은 배우들이 늘 흉내내서 ‘무엇이 되는’ 게 아니라 ‘되지 않는’ 상태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배우는 ‘레미콘차를 등에 짊어진 사람’이다. “레미콘 탱크 안에서 자갈과 모래와 물과 시멘트가 계속 돌아야 한다.” 부글부글 끓는다는 것은 늘 준비하고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그가 즐겨 쓰는 비유는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리기 위해 4천장의 데생을 필요로 했다는 일화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시선이다. 목화 배우들은 상대역 배우를 보지 않고 관객을 바라보며 연기한다. 연인과의 대화도, 부자 사이의 대화도 서로를 바라보며 하지 않는다. 객석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서로 할 얘기를 나눈다.

“그렇게 하면 도망갈 데가 없다. 배우끼리 하면 숨을 데가 있지만. 무대는 해부실이다. 감출 수도 없고 솔직해진다. 800개 눈동자 앞에 뭘 숨겨. 결국 믿을 건 자기 연습량밖엔 없는 거야.” 그가 설명하는 목화 배우들의 특징은 또 여럿 있다. 분장이나 치장의 개념이 없다는 것, 즉흥에 강하고 돌발적인 사태에 늘 대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극단 목화의 배우 선발 시스템도 독특하다. 극단 목화 배우들은 거의 모두 오태석이 극작과 학과장으로 있는 서울예대 출신이다. “100∼120명의 연극과 학생들 가운데 하나를 데려오니까.” 선배들이 고르고 고른 후배를 스카우트해 극단에 데려오는 만큼 원래부터 배우의 수준이 높은 것이다.

목화 출신 배우들은 오태석의 연극에 대한 열정과 태도에서 많이 배운다고 한 목소리로 말한다. 성지루가 들려주는 두 가지 에피소드. “1996년 <서푼짜리 오페라>를 할 때다. 내가 사는 원당 자취방에서 집들이를 했는데 오선생께서 1시간30분을 지하철을 타고 내집까지 손수 오셨다. 모두들 음식을 데워 놓고 먹으려고 하는데 리딩을 하자고 하시는 거다. 놀러들 왔으니 배우들이 책이나 제대로 가져왔겠나. 한쪽에서 음식은 끓고, 우리는 셋이서 책 한 권씩 붙잡고 리딩을 했다.” 〈심청이는 왜…〉에선 막이 벌써 올랐는데도 대사 하나를 고치기 위해 직접 낮은 포복으로(관객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 무대에 들어와 배우에게 수정된 대사를 건네기까지 했다고 한다. 이 무모할 정도의 완벽주의자 밑에서 어찌 허약한 배우들이 나올 수 있을까.

임원희는 오태석이 낚시하는 법을 가르치는 스승이라고 회고한다. “끊임 없이 생각하게 만드신다. 공연이 올라가면 매공연이 끝날 때마다 노트를 적으시고 고칠 것을 말씀하신다. 늘 긴장하고 변화할 수밖에 없다. 계속 돌아가지 않으면 굳는 레미콘처럼 말이다.” 배우들로 하여금 창의성을 북돋워주는 것도 오태석 연극의 특징이다. 박희순은 “배우들에게 일일이 가르치기 보다는 스스로 공부한 것을 무대에 가지고 올라와 마음껏 펼칠 수 있게 한다”고 말했다. 자기 배역에만 몰입하지 않고 연출가의 눈으로 연극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천년의 수인><부자유친> (위쪽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