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남성미 물씬 풍기는 영화 없나요?”
일단 극장으로 들어가면 군사독재 시절 야만적인 교실의 악몽과 맞닥뜨려야 했다. 에누리 없이 누구나 등굣길에 마주쳐야 했던 선도부는 그 악몽의 한가운데였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선도부 이종혁은 그 악몽을 오롯이 되살아나게 했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배우가 튀어나왔을까 하는 궁금증은 그러므로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그의 존재로 인해 더욱 잔혹해졌다. 영화가 첫 경험인, 서른한살 먹은 아이 아버지이자 유부남의 고등학생 연기였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대학로는 이종혁의 조련사였다. 채찍은 오디션이었다. 매번 오디션을 거쳐 역을 따냈고 그때마다 한 계단씩 밟고 올라갔다. 어쩌면 그는 <말죽거리…>가 아니라 뮤지컬 <토요일 밤의 열기>의 주인공으로 먼저 떴을지도 모른다. <토요일 밤…> 연습을 하다가 <19 그리고 80> 오디션을 보게 됐다. <19 그리고 80>은 장기공연으로 이어졌고 그는 <토요일 밤…>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문식 등과 함께한 연극 <라이어>가 첫 대학로 무대였다. 뮤지컬 <의형제>와 <오 해피데이> 그리고 <19 그리고 80>. 작품은 많지 않지만 모두 다부진 것이었다.
누군가는 ‘시를 쓸 수 있는 얼굴’이라고 했다지만 외모와 달리 어렸을 때부터 남들 앞에서 튀는 질문을 해놓고 남들 웃으면 뿌듯해하고, 노래부르는 걸 좋아하는 등 ‘깨는’ 캐릭터가 영화 오디션에서 먹혀들었다. “욕을 좀 하니까, ‘하자’ 하시더라고요.”
내가 나온 명장면을 말한다
“옥상 결투신이죠. 진짜 쌍절곤이 아니고 PVC 파이프에 스펀지를 댄 거였지만 맞을 땐 따끔했어요. 밑에선 바닥에 깔린 시멘트 가루가 올라오고, 위에선 현수를 덮친 유리 조각이 떨어지고. 그래서 코도 찢어졌어요. 준비는 많이 했는데 액션신은 계속 뒤로 밀리고, 정진이랑 상우는 바쁜데 저만 일이 없으니까 계속 연습만 해서 힘들었죠. 아, 그것도 있다. 현수한테 ‘눈깔아 개새꺄’라고 하는 대목.” 힘있게 나와서 만족스럽다고 했지만, “우식(이정진)이 사라진 뒤 명실상부한 짱이 됐으니 더 여유있게 갖고 놀았어야 하는데 너무 덤빈 것 같다”고 분석한다. 인터뷰 내내 손톱을 뜯더니 여유가 생겼는지 손이 가지런해졌다.
나를 스크린으로 이끈 것은
서슴없이 유하 감독을 지목한다. “연기하지 않은 듯이 하라고 연기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첫 장면 때 근육이 경직될 정도로 힘들었어요. 저 때문에 헤드폰을 던지셨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더운 여름날 동복을 입고 교실 창문을 다 닫고서 찍고 있는데 모두 폭발 일보 직전에서 제가 테이크를 많이 가면 정말 짜증나는 거죠.” 누굴 만나도 아래로 내려다보며 이야기하던 그에게, 자신보다 8cm나 큰 192cm의 감독은 여러모로 어렵고 존경스러웠을 것이다. 시인 특유의 섬세한 대사와 톤도 감명을 주었다. 무엇보다 감독은 고등학교 선배였다.
내가 스크린 안에서 살아내고 싶은 사람은
“위치가 아직….” 미래를 섣불리 이야기할 때는 아니라는 조심스런 말투다. “주어진 작품 안에서 열심히 하는…”류의 준비성 멘트를 날리더니 ‘정말 잘되면’이라는 단서를 달고는 <올드보이>의 오대수 같은 역할을 하고 싶다고 한다. “<말죽거리…>에서 뜬 줄 알고 이제 섭외가 들어오려나 했는데 아니더라고요.” 중국에서 사전 제작한 TV드라마 <비천무>와 12월 개봉하는 <신석기 블루스>(감독 김도혁)가 있지만 <말죽거리…> 뒤로 뜸했다. “이미지가 너무 강했나. 어디 남성미 물씬 풍기는 영화 하나 없어요? … 없다는데요.”(몸이 풀렸는지 너스레풍으로 자문자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