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발견! 올해를 빛낸 남자 조연 6인 [4] - 조경훈
2004-11-17
글 : 박은영
사진 : 이혜정
<썸>의 추 형사 조경훈

“깡패 얼굴이라면 깡패 연기의 최고가 되야지”

장윤현 감독은 <와일드카드> 현장에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는 한 남자를 눈여겨보게 됐다. 커다란 몸집, 우락부락한 인상에 빨간 트레이닝복과 운동화를 ‘세트’로 차려 입고 다니는 그 남자 조경훈은 당구장 주인 ‘곰탱이’로 출연하는 단역배우로, ‘내 일 네 일’ 가릴 것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일꾼’이자 현장의 ‘분위기 메이커’였다. 1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몸이지만, 깡패나 양아치 역할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그를 위해 장 감독은 <썸>에 ‘추 형사’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넣었다. 범죄 용의자와 분간이 안 되는 험악한 인상, 연기 같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로, 조경훈의 추 형사는 <썸>에 유쾌한 쉼표를 찍었고, 투박한 리얼리티를 불어넣었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전북 익산의 철공소집 아들로 태어난 조경훈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신부가 되려고 했으나,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자신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포기했다. 어릴 때부터 그는 외모 때문에 손해를 많이 봤다. 학교 때는 “쟤 무서워서 공부 못하겠으니, 반 바꿔달라”는 민원을 들어야 했고, 대학 입시에서 “학교 이미지 나빠진다”고 탈락한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래서일까. 데뷔작 <삼인조>부터 <와일드카드>까지 그의 역할은 언제나 깡패 아니면 양아치였다. “난 왜 늘 깡패인 걸까, 속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조·단역에 대한 대우에 마음 상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역할에는 귀천이 있더라.”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나 살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개그콘서트>에 출연하는 ‘외도’를 하기도 했지만, 씁쓸한 기억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는 ‘연기자’라는 자의식을 버린 적이 없었다. 부르는 이 없어도, 고마워하는 이 없어도, 스크린쿼터 집회에 자진 출석한 건 그래서였다.

내가 나온 명장면을 말한다

조경훈이 꼽는 명장면에는 최종 편집에서 잘려나간 것들이 많다. 포커스의 사각지대인 조·단역이지만, 처음으로 그가 관객의 눈에 띈 것은 <와일드카드>를 통해서다. “당구장 주인 곰탱이로 나오는데, 등장하는 신이 1분이 넘는 롱테이크다. 인사하는 장면인데, ‘어, 레자 입었네’, 이런 애드리브를 치다가 NG 내고는, 세 번째에 오케이를 받았다. 그 신이 기억에 남는다.” <썸>에서는 장윤현 감독님이 그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준 장면에 대한 애착이 컸다. “강 형사가 누명을 쓰고 쫓길 때, 위치 추적의 위험을 무릅쓰고 휴대폰을 켜놓고 있는 걸 보면, 그가 범인이 아닌 거라고 큰소리치는데, 휴대폰 전원이 갑자기 꺼지면서, 아닌가 싶어 머쓱해지는 바로 그 장면. 추 형사의 캐릭터는 원래 디테일이 없었다. 감독님이 처음부터 ‘추 형사는 너다. 맘대로 해봐라’ 그러셔서, 이런저런 설정을 많이 했고, 애드리브도 넣었다.”

나를 스크린으로 이끈 것은

“아버지가 영화를 좋아하셔서, 어릴 때부터 <주말의 명화>와 <토요 명화>를 즐겨 봤다. 서부극을 많이 봤던 것 같은데, 거기 보면 ‘산초’류의 캐릭터로, ‘나 같은 놈’들이 많이 나오더라. 주로 나쁜 짓 하는 역할들이긴 하지만. 어린 마음에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연기를 시작하고 나서, 누구도 연락하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을 때도, 커다란 스크린에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고 한다. “<약속> 때 같이 출연했던 진영이 형이 잠시 맡긴 트로피를 들고 있는 동안 가슴이 뛰었고, ‘경훈아, 내년엔 네가 받아’라고 덕담해줄 때 너무 고마웠다.” 오늘까지 자신을 지탱해준 것은 그런 소박한 기쁨과 희망이었다며, 그는 수줍게 웃는다.

내가 스크린 안에서 살아내고 싶은 사람은

“외모 콤플렉스가 왜 없었겠나. 그런데 이 얼굴과 이미지로 할 수 있는 게 깡패, 양아치 역할뿐이라면, 내가 우리나라에서 깡패 연기 제일 잘하는 사람이 되야겠다고 생각했다. 옛날에 허장강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영화 촬영장이나 극장에서 사람들이 “저 새끼, 진짜 깡패 같다”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더란다. “나처럼 외모 때문에 한 가지 이미지만 소모하는 배우들, 그래서 자기 얼굴 탓하는 배우들이, 나로 인해 힘을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징하게’ 그려내고 싶다는 바람을 슬쩍 흘린다.

인터뷰 말미에, 조경훈이 “꼭 써달라”고 부탁한 한마디가 있다. 배우들의 데이터베이스가 생겨서, 필요한 프로젝트에 연결시켜주는 작업이 활성화됐으면 좋겠다는 것. “배우가 없다고들 하는데, 준비된 배우들은 얼마든지 있다. 주변을 한번 둘러봐달라.”

글 박은영 cinepark@cine21.com·사진 이혜정 socapi@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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